■ 사진과 함께 보는 화엄종주 월운당 해룡 대강백의 발자취
화엄종주 월운당 해룡 대강백은 1929년 음력 11월12일 경기도 장단에서 3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19세가 되던 1945년까지 향리 유릉서당(柳陵書堂)에서 4서와 3경 및 통감을 마치고, 그 해 남해 화방사 객실에서 유숙하다, 21세가 되던 1948년 단옷날 운허대종사를 은사로 출가, 법명은 해룡(海龍)이다.
1956년 월운스님(왼쪽에서 두 번째) 해인사강원 중강 시절. 사진제공 봉선사
1957년 해인사 강원 중강시절 월운스님(뒷줄 가운데)이 제자들과 함께 한 사진. 사진제공 봉선사
화방사에 머물면서 <선원제전집도서>를 비롯한 4집을 홀로 읽고 그 절에 있는 여러 경전을 열람했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동안거를 고성 문수암의 청담대종사 회상에서 마치고, 24세가 되던 1952년 4월 범어사에서 운허대종사와 상면했다. 당시 <능엄경> 흑판강의를 종강한 운허대종사는 경의 요지를 하문(下問)하자 “보살응기(菩薩應機) 시현미오(示現迷悟) 오타음실(誤墮淫陰)”이라 아뢰니, 운허 대종사는 “미면경정(未免逕庭)”이라 평했다. 뜻을 풀면, “부처님 제자 아난이 후세보살들의 수준에 맞게 어리석음을 보이시려고, 괜스레 음실에 떨어지는 꼴을 보여주셨습니다”인데, 운허대종사는 “그대의 수준은 아직 안방에는 못 들어오고 마당에 겨우 들어섰다”라고 하시며 더욱 정진하게 했다.
1966년 용주사 불교전문강원 제1회 졸업식에서 월운스님(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제공 봉선사
1982년
봉선사에서 열린 제1회 홍법가원졸업식.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월운스님. 사진제공 봉선사
이렇게 스승 제자의 상면이 끝나자 운허대종사는 “그대는 나와 함께 경학(經學)을 공부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을 가자” 하니 이 말 끝에 “예”라 대답한 인연이, 월운 대강백 평생의 사업이 되었다.
그 후 사부 운허대종사 문하에서 부처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열람했고, 영축산 통도사에서 1959년 5월16일 운허대종사로부터 게문(偈文) 한 통을 받았는데, 그 게문에서 월운(月雲)이라는 당호가 유래됐다.
이 날로 통도사 강석을 운허대종사로부터 물려받은 이후, 가는 곳마다 후학을 지도하다 1975년부터 임종 때까지 운악산 봉선사에 머물면서 강편(講鞭)을 놓지 않았다. 1964년 운허대종사가 동국역경원을 개원하자, 그때부터 팔만대장경을 한글화하는 ‘한글대장경 번역불사’에 일관했다. 팔만대장경 약 1/3정도의 번역 출간을 마친 1980년 10월10일 운허대종사가 열반에 들자 유야무야되던 ‘한글대장경 불사’에 새바람을 불어넣었으니, 그 때가 1993년이었다. 동국역경원장 직을 8년째 맡던 2001년 총 318책의 한글대장경 출간기념 봉불식을 장충체육관에서 봉행했다. 그 후에도 일찍이 손에 익혔던 컴퓨터 다루는 솜씨로 불경 번역으로 소일하며, 틈틈이 제자들을 교육했다.
1984년 봉선사 능엄학림 강주시절 강의하는 월운스님. 사진제공 봉선사
강백이 평소 강조했던 불교 교육 철학은 첫째 교리, 둘째 역사, 셋째 의례, 넷째 가람수호 방면이었다. 첫째, 교리 방면에서 교(敎)로는 <화엄경청량소>를 비롯한 강원 이력을 밟게 했고 선(禪)으로는 <선문염송>과 <경덕전등록>을 북극성으로 삼았다. 둘째, 역사 방면으로는 역대 <고승전>을 비롯하여 고려의 <석가여래행적송>을 중심으로 삼았다. 셋째, 의례 방면으로는 <작법귀감>을 비롯하여 손수 지으신 <일용의식수문기>로 갈래를 잡아주었다. 넷째, 가람수호 방면으로는 <백장청규>를 비롯하여 현대의 사찰 관련 각종 법령도 손수 편집하여 강의했다.
1995년 봉선사 다경실에서 월운스님. 사진제공 봉선사
2005년 운허스님 25주기 다례재를 마치고 지관스님과 함께 한 월운스님. 사진제공 봉선사
월운 대강백은 사부 운허대종사 앞에 현신(現身)한 이래 평소 일기를 썼는데, 이 또한 사부님이 일기 쓰고 메모하는 가풍을 쏙 빼닮았다. 86세가 되시던 2014년 2월 대강백은 평생 써오신 일기장을 토대로 지난 기록을 몸소 연도순으로 입력한 회고록의 일종인 <자초연기(自抄年紀)>를 편집 완료하여 가까운 제자들에게 오탈자를 잡게 하는 것으로 생을 마무리하고 정리했다.
2006년 봉선사에서 능엄학림 강의중인 월운스님. 사진제공 봉선사
그 후에도 조석으로 예불하고 대중과 함께 공양하며, 틈만 나면 봉선사 다경실 컴퓨터실에서 고문서 교정하고 자판으로 입력했다. 몸에 큰 병은 없었지만, 산문 밖을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최근 행보로는 2023년 4월11일 파주 보광사 수구암에 한국과 태국 불교교류 일환으로 태국 왓포사원 지원으로 수선당(修禪堂)이 신축되자 왕림하여 증명 공덕을 지었고, 5월25일에는 서울 수국사 참배 후 월초대화상이 건립한 ‘삼각산 수국사비’ 이운을 참관하고 증명했으니, 이 걸음이 산문 출타의 마지막이었다.
2023년 6월16일 저녁공양을 마치고 수박 한쪽을 드시며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를 들으시면서 평소처럼 관(觀)하셨다. 오후 8시30분부터 숨을 고르시더니 시자를 불러 장삼을 챙기게 하자 시자는 위급함을 감지했다. 제자들의 효도도 가시는 걸음을 붙들지 못하니 10시36분에 사바의 일기(一期)를 마치셨다.
1980년 음력 10월10일 운허대종사가 입적하고 3년 대상이 지나자, 사부님 거처하던 다경실로 드셨지만, 경전 읽고 부처님 말씀 번역하고 책 묶으면서도 차를 드시는 일은 없었다. 벽장에 박카스는 떨어트리지 않았으나 그마저도 시자들이 몸에 좋지 않다고 숨기니, ‘다경실(茶經室)’에서 ‘다’자는 옛날에 지워져 ‘경실’이 되고 말았다. 이제 경 읽는 주인마저 없으니 ‘경’자도 ‘실’자도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시적(示寂) 하시고 하룻밤이 지나, 한 노 거사님이 오셔서 쪽지 하나를 건네주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대강백은 20여 년 전 티베트로 성지순례 간 적이 있었고, 산이 높아 호흡 곤란으로 기절했는데 얼마 있다 소생했다. 동행하던 거사가 “큰스님,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라고 위로하니, 스님은 “혹시 순례 중 또 기절하면 이렇게 위패 써서 부처님 나라 티베트에서 장사지내라”고 하면서, 쪽지에 한문으로 아래처럼 적어주었다고 한다.
‘似僧非僧似俗非俗 虛頭長老月雲靈駕’. 한글로 번역하면, “중 같지만 중도 아니고, 속인 같지만 속인도 아닌, 헛소리하는 늙은이 월운 영가.‘
위 글을 임종게로 삼은 월운대강백 제자들은 말한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재가자들에게는 이렇게 해학이 넘치는 스님을 이제는 보내드려야 합니다. ‘허두장로(虛頭)’를 월운 대강백이 손수 번역한 <전등록>처럼 ‘허풍쟁이’로 번역해야 하나, <벽암록>처럼 ‘사기꾼’으로 해야 하나, 아니면 <선문염송>처럼 ‘허황한 중’으로 해야 하나. 사부님 안 계시니 여쭐 길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머리 맞대어 위에서처럼 번역하오니, 가시는 길 잠깐 멈추시고 증명하여 주시옵소서.”
2022년 5월 부처님오신날 봉선사 경내에서 ‘떡 팔아요’라고 하시며 농담하는 모습. 사진제공 양재숙
2023년 5월24일 광동학원 수계대법회에서 아이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는 월운스님. 법보신문이 촬영한 사진. 사진제공 초격스님
아이들이 절에 오면 유독 좋아하는 월운스님이 5월24일 광동학원 학생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 법보신문이 촬영한 사진. 사진제공 초격스님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월운스님 모습. 사진제공 봉선사
2023년 5월25일 서울 수국사에서 봉선사 중창조 월초스님이 작성한 수국사 사적비 이운에 증명법사로 참석했다.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스님이 월운스님이다. 이 날이 입적하시기 21일 전이다. 사진제공 봉선사
■ 월운대종사 49재 추모일정
월운대종사의 49재 추모일정은 다음과 같다. △초재 6월22일 오전10시 남양주 봉선사 △2재 6월29일 오전10시 남양주 봉선사 △3재 7월6일 오전10시 남양주 봉선사 △4재 7월13일 오전10시 남양주 봉선사 △5재 7월20일 남양주 봉선사 △6재 7월27일 파주 보광사 △49재 8월3일 오전10시 남양주 봉선사.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