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부제: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젠더·성의 재활과 정치)은 장애와 질병이 있는 몸의 현존을 부정하고 반드시 재활하고 극복해야 할 ‘치유’의 대상으로 여기며 폭력적으로 서사화해 온 한국의 역사, 정책, 제도, 문화 텍스트 등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미국 시러큐스대학교 여성/젠더학과와 장애학 프로그램 부교수 김은정의 저서로, 2017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후 여성학, 장애학, 한국학 등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2017 전미여성학학회 앨리슨 피프마이어상, 2019 미국 아시아학학회 제임스 B. 팔레이즈상을 수상하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를 다룬 소설, 영화, 신문 기사, 정책 문건, 활동가의 글 등을 텍스트 삼아 ‘치유’를 명분으로 장애와 질병을 가진 사람/삶을 파괴하는 ‘폭력’을 들여다보고 사회적·정치적 맥락 안에서 분석함으로써, 장애와 질병에 관한 사회적 경험과 문화적 재현의 다른 상상력을 제안한다. 「심청전」, 「노처녀가」, 「백치 아다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당신들의 천국』, 〈만종〉, 〈꽃잎〉, 〈팬지와 담쟁이〉, 〈수취인불명〉, 〈오아시스〉, 〈핑크 팰리스〉 등 고전에서 현대까지의 서사와 기념우표, 광고, 사진 등의 시각적 이미지를 망라해 여성주의 장애학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장애학적 문화 비평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조혜영 영화평론가는 이 책이 장애학뿐 아니라 문학, 영화, 드라마 등 서사와 관련된 활동과 연구를 하는 사람을 위한 필독서라고 권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국가주의가 장애의 문화적 재현, 관련 정책, 사회운동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저자 특유의 정교한 논리와 세심한 언어로 살필 수 있다.
책 속으로
일반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몸과 치유된 몸은 여전히 장애화되는데, 그 이유는 장애의 역사가 몸에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나은 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나이가 많이 들기 전까지는 재활의 노력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여성주의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 이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행복이라는 개념이 억압을 위한 기제라며 비판한다. 아메드는 행복이란 “성취되지 않음으로써 ……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망이라고 말한다. 치유 또한 그렇게 누구도 다다를 수 없는 목적지로서 그 지위를 유지한다. - 30쪽 ‘서문’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이들이 겪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고통은, 장애인들과 만성적으로 아픈 사람들의 삶이 그려지는 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 치명적인 병이 있는 삶을 반드시 치유되어야 하는 명백한 ‘악’으로 간주하는 정치적인 판단은, 치유가 불가능한 장애인을 위한 의사 조력 자살에 대한 담론을 강화한다. 또한 치료하지 않으면 치명적이지만 쉽게 완치가 가능한 질병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용의 효율성에 대한 분석에 따라 장애인을 위한 장기 돌봄의 필요성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될 수 있다. 치명적인 것에 대한 판단과 예후 또한 우리가 한 개인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 고통을 겪는 개인의 삶에 대해 죽은 것보다 못한 상태로 바라보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인 견해를 수반한다. - 37쪽 ‘서문’
나는 타자를 소위 나아지게 해줄 것이라는 명목으로 타자가 지닌 차이를 지우려는 힘의 행사를 묘사하기 위해서 ‘치유 폭력’curative violenc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치유 폭력은 치유가 장애의 존재 자체를 문제로 규정하고 치유 과정에서 그 대상을 파괴할 때 일어난다. …… 치유와 관련된 폭력은 두 가지 차원에서 존재한다. 첫째, 장애와 질병을 삶의 다른 방식으로 보는 여지를 없애는 폭력이다. 둘째, 치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장애인들에게 신체적·물리적으로 가하는 폭력이다. - 38쪽 ‘서문’
다양한 인권 운동과 장애여성 운동 사이의 연대가 이뤄지고 있다. 비규범적 가족들의 연대체나 무성애, 만성 질병,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HIV/AIDS 감염인 등을 탈병리화하는 운동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대들도 시도되고 있다. 성소수자, 노동자, 난민들과 연대 필요성이 늘어났고, 성산업 여성들을 위한 단체들과 연결 지점도 만들어졌다. 이런 진보적 반폭력 운동, 비장애중심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과 이슈별로 생겨나는 일시적인 모임들 안에서 제기된 의제와 토론들이 이 책에 담긴 텍스트와 역사적 맥락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비장애, 젠더 순응, 가족, 섹슈얼리티를 포함하여 정상성의 다양한 기준치들이 어떻게 치유의 개념을 구성하고 복잡하게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 52, 53쪽 ‘서문’
“이 책은 과거와 미래 사이, 타자성과 정상성 사이, 치유 전과 후에 존재하는 장애를 주목한다. 이 중간 지대에서 치유와 장애는 과정으로서 공존한다. 나는 역사적이고 초국가적인 맥락에서, 한국의 문화적 재현에서 장애와 치유가 어떻게 봉합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이 접점에서 치유라는 이름으로 가려지는 폭력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다. 장애화된 몸은 접힌 시간 속에서 다층적으로 구성된 타자성과 정상성의 경계로 이뤄진 지형 안에서 시각화되고 서사화된다.” (30쪽)
“저자의 장애학적 독해는 ‘접힌 시간’을 펼쳐 내 은유로서의 장애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살아 낸 장애의 신체성과 물질성을 감각하게 하고, 거래하고 협상하는 장애의 행위성을 인식하게 한다. 특히 이 책의 장애학적 비평이 빛나는 순간은 장애학이, 정상성과 규범성을 질문하는 페미니즘, 퀴어, 탈식민적 관점과 교차할 때다.” (조혜영, 추천의 글)
이 책에서 ‘치유’는 정신적·기능적·신체구조적 정상성을 갖게 되어 장애가 없어지고 아픈 몸에서 건강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상성과 건강의 범주는 유동적이기에, 치유가 되더라도 병력 때문에 낙인이 지속되거나 사회적 치유에 도달하지 못해 소수자로 남을 수 있고, 장애와 질병이 그대로이더라도 계급과 성별에 따라 더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간주될 수도 있다. 정상성과 건강의 범주는 장애와 질병의 정의뿐 아니라 치유의 정의에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치유는 도덕적인 당위가 아닌 정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11쪽). 김은정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치유가 “정상과 건강의 테두리를 만들어 내는 행위”이고 “추방된 몸들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포섭함으로써 경계를 강화시키는 과정”(10쪽)이라고 설명한다. 또 장애와 질병을 당연히 없애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장애와 질병을 가진 사람을 파괴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밝히며 ‘치유 폭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치유 폭력은 장애와 질병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장애와 질병이 가진 차이를 없앰으로써 발휘될 수도 있다. 치유는 당위성이 강조될수록 개인이 아니라 가족·사회·국가 공동체를 위한 것이 된다. 이때 개인은 얻게 될 보상과 치러야 할 대가를 고려해 협상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공동체를 위해 죽음의 가능성을 감수하기도 한다(10쪽).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