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만난 소중한 불법인연.
송파 20구 본자운
언제나 내게 계절의 변화를 제일 먼저 알려주는 아파트 정문 경비실과 놀이터 사이에 가지 많은 느티나무는 어느새 봄을 훌쩍 넘어 여름으로 달려가며 잎을 무성하게 키워내었다.
겨우내 썰렁하던 나뭇가지마다 봄이 되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앞 다투어 점을 찍듯 연녹색의 새순을 품어 올리는 모습이라니, 새 생명의 탄생이야말로 너무도 신선하여 아름다운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크기가 제법 거대하여 중앙 도로 건너 7층 내 집 베란다 눈높이에 펼쳐지니 이 즈음이면 푸르름 가득한 영락없는 내 집 뜨락이 된다. 그 덕에 아파트 거주하며 더없는 호사를 누리고 산다 싶어 늘 고마울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느티나무 그늘이 십 리를 가면, 생면부지 나그네도 한 여름 더위에 편히 쉬어 갈 수 있는 법이다.‘ 남이 잘되는 것에 시기하는 마음 낼까를 경계하여 이르시던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이렇게 일상에서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주셨던 수많은 말씀들, 지금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지만, 내가 살아오는 동안 어긋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어디 부모뿐일까? 살아낸 날들을 돌아보면 모두가 스승이다.
특히, 신앙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나 본인의 뜻과 선택에 의한 것이고, 간혹, 종교를 가지거나 그렇지 않은 것이 살아가는데 딱히 상관있는 일은 아니라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불자(佛子)로 살아온 시간을 되돌려보면, 내 육신 생명 주신 부모 인연만큼이나 어쩌다 만난 불교는 이번 생에 내가 만난 가장 소중한 인연이었다.
내가 종교를 처음 접한 때는, 채플 시간이 따로 있던 미션 스쿨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따로 교회를 나가진 않았지만 학교에서 배운 대로, 신께 기도 올리고, 주기도문을 외우고, 시험을 위한 성경공부를 하며 성실한 학생으로서의 기독교인이 되어가고 있었을 때
어느 날 과제로 주어졌던 ’나‘란 무엇인가? 당시 나는 ‘나’를 따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에 지금도 그 과제는, 생각조차 매우 어려웠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나‘란 무엇인가?를 항상 머릿속에 담고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왜, 어떻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일까?
성경 말씀을 따르고 행하고 기도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언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많던 나는, 어느 날, 그 궁금증을 용기 내어 목사님께 여쭈어보았다.
“모판의 모가 농부의 손길로 논에 옮겨 심어지는 것처럼, 오직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구원에 이룰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던 그 말씀은, 해답을 얻었다기보다 내 종교와 그 믿음에 대한 혼돈으로 더 큰 어려움만 가지게 되었다.
과연 ‘나의 존재는 무엇일까?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아프니까 청춘이라 했던가? 그땐, 그랬다. 쥐뿔도 모르면서 내게 맞는 사상이나 종교를 찾겠다고 이곳저곳을 헤매며 방황하던 그런 시기였다. 우리 주변에 그렇게나 다양한 종교와 믿음의 대상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물질에 대해서는 외계의 것까지도 샅샅이 알려고 하면서도 본질적인 인간 존재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런저런 책을 읽던 중에 법정 스님 글이 가슴에 짜릿하게 와 닿았다.
그로 인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싶어서 불법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골몰하다가 우선적으로 책으로 발행된 수행승들의 전기를 읽기 시작했고, 어느 때는 도를 이루셨던 스님들의 발자취를 따라 사찰 순례를 떠나기도 했으나 불교 또한 현실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종교라는 생각만 커지게 했다.
내 내면 깊숙하게 ‘불교는 기복 신앙’이라는 무지한 나의 고정관념도 내가 불법을 만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흐르게 했으니 그 또한 나의 시절 인연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아파하던 청춘도 보내고 많은 시행착오도 겪으며 복잡했던 생각들도 희석되고 ‘나’라는 존재도 현실에 동화되어 살아갈 즈음, 그야말로 어쩌다가 불법을 만났다.
지금의 잠실 랜드마크가 된 제2롯데는 물론이고, 맞은편 백화점 건물도 지어지기도 전이었으니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때, 당시 신도시였던 잠실 5단지 사거리를 지나면 높은 건물이 별로 없던 송파대로에서 한 눈에 담겨오던 기와지붕의 생소하던 그 건물이 불교사찰이라 했다.
언젠가 “우리 같이 불교 공부해 보지 않을래?” 그에 따른 방법도 모르면서 친구에게 함께하길 권했을 때, 요즈음엔 도심에서도 부처님 말씀을 가르치는 포교법당이 있다고 말했던 바로 그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는 선에서는 포교당이 흔치않던 시절 이었으니 도심에서 불광사를 처음 보았을 때, 절이라고 생각하기엔 얼마나 낯설던지, 더구나 불교 지식이라곤 하나도 없던 내게 ‘마하반야바라밀’은 너무도 생소하여 또 다른 신흥 종교가 아닐까를 의심하기도 했다.
“우리는 부처님의 지혜와 덕성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는 완전무결한 존재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보신 바 사실대로의 말씀이다.” 법당에서 스님의 법문을 처음 들었을 때, 원죄설을 배워 믿고 있던 나로서는 지금까지의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신세계였다.
가장 근본적인 인간 존재에 대해 너무나 상반된 말씀이라 깜짝 놀라서, 처음에는 의구심에 가득 차 법회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법문 들으러 법당을 찾았었다.
“온갖 의심이나 공포심,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망하는 마음을 말끔히 버리고 한결같이 자신의 진실생명인 진리를 따라 마음을 맑혀야 한다. 눈앞에 현상의 구름이 가렸더라도 원만한 공덕의 태양은 언제나 빛나고 있다. 현상이 어떠하더라도 이미 완전하고 원만한 자신인 것을 믿자.”
한 번, 두 번, 수차례 법문 들을 때 마다 반복되는 말씀에 ‘정말 그런 것일까?‘ 하며 처음에 가졌던 의구심이 조금씩 믿음으로 느껴지기 시작하자 나는 당시 교육과정인 바라밀 교육, 명교사 교육을 차근차근 수강하며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하고 싶은 열정은 있었으나, 결국 들을 땐 끄덕끄덕 아는 듯, 돌아서면 모르는 것이 되어버린 불교공부였지만, “나의 존재는 원만 구족한 생명이며, 내 삶의 창조자인 것이다”라고 너무도 강렬하고 또렷하던 큰스님의 그 말씀은 나를 불자로 살아가게 한 최상의 가르침이었다.
불광은 ‘밝은 마음’이다. ‘어두움은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밝음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 말씀 받아지니며 밝은 마음 간직하고 살고자 발원하였건만, 세상 사노라면 어찌 좋은 날만 있었겠는가? 때로는 뜻대로 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아니하는 것도 있으니, 어두움의 근원인 성냄이나, 슬픔, 미움, 불평불만을 없애고 ‘밝은 마음’ 지니기 또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듯, 스님의 법문을 이해하고 행(行)하기엔 한없이 역부족인 나였지만, 어느 날 듣던 법문 중에 “우리의 본원력은 ‘생각의 힘’을 활용하는데 있다. 생각인 ‘상념(想念)’은 하나의 ’힘‘이라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그 가르침은 내가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게 된 것 같아 나를 가슴 뛰게 했다.
’나의 긍정적 사고(思考)로 무한 능력을 이루는 창조자가 된다?’
요즈음엔 학술적으로도 「1만 시간의 법칙」이라 하여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훈련시간을 말하고 있지만, 당시 나는, 그런 것도, 저런 것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로서 당장엔 못 미치더라도 흔들림 없이 항상 힘이 있고 확신에 찬 큰스님의 그 당당한 모습과 그 말씀을 따르며 조금씩이라도 닮아보기로 다짐했다.
일과정진은 물론이요, 큰스님께서 재가신도에 맞는 집중기도 기간으로 정해주셨던 여름철, 겨울철 50일 기도 기간이면 눈이 오거나, 비가 내려도 아랑곳없이 신심으로 다닌 새벽 예불, 찬불하는 음성공양, 구 법회 가족 상가(喪家)엔 목탁 들고 우선하여 달려갔던 영가기도, 전법으로 도닥도닥 일구어 분구(分區), 분등(分燈)하던 구 법회 및 군 법당 활동, 불광의 뜻이 담긴 초록치마, 흰 저고리 법복 차림에 연등 들고 여의도에서 종로 거리로 행하던 제등행진, 어느 해인가는 무슨 일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으나 행진 때 최루탄 가스 때문에 숨이 막혀 대피하던 일, 초파일 전날 대량으로 만들던 대중공양 도시락, 겨울철 김장봉사, 법회가 있는 날엔 각 구 법회가 번갈아 국수나 비빔밥을 수 백 그릇씩 담아내던 대중공양, 옹시미 만들어 밤새 동지 팥죽 쑤어내던 일들.
환희심으로 행(行)하던 불광의 모든 일들이 멈춰진 지난 수년 동안, 왜 그토록 뼈 속까지 아팠을까? 생각해보니 내게 불광법회는 진심(眞心)이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다 불법만나 지금에 이르러 낡은 필름 돌리듯 지난날을 회상하니, 내게도 알게 모르게 부처님의 법우(法雨)가 스며들었던 걸까? 그토록 ‘나’의 존재를 찾고자 했던 그 헤맴은 내 의지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온 것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세상엔 여전히 내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고, 몇 십 년을 불자로 살아왔지만 명확하게 불교에 대해 논할 능력도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을 확신하며 내 아픈 청춘에 가졌던, 알 수 없던 내 삶에 대한 걱정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는 멀어졌다.
같은 공간에서 동일한 것들을 공유한 사람들마저도 생각과 견해와 관점이 다르니 세간적 시각은 알 수 없으나, 타인의 생각을 넘어선 나의 삶은, 행복하고 윤택하고 자유로워졌다. 그것은 어쩌다 맺은 불법 인연과 이생에 공업(共業)으로 살고 있지만, 많은 것이 각기 다른 수많은 인연들이 나를 깨우치는 스승으로 함께 함이었으리라
내 집 앞 느티나무가 소리 없이 사계절을 반복하며 살아가듯이, 나 또한 진리에 의지하여 오직, 지금을 살아갈 뿐이다. 설사, 지금이 나에게 마지막 순간이 된다 하더라도 걸림 없이.
「성불하는 그날까지 이내 서원 다하여 천진스런 본래면목 마음 빛 찾아보세」 부처님께 올리던 찬불가 한 구절에 나의 서원 담아 발원하며.
2023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