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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7. 08
1971년 닉슨쇼크 이후 달러 가치가 떨어지자 그 영향이 산유국에까지 미쳐 원유가격을 대폭 끌어올리는 빌미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아랍권의 패배로 끝난 이후, 석유수출국기구(OPEC)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로 쓰려던 참이었다. 산유국들은 석유 수출을 줄여 원유가격을 인상했다. 1973년 10월 1배럴당 3.01달러였던 원유가격은 3개월 만에 11.65달러로 387%나 뛰어올랐다. 세계경제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석유파동으로 1974년 주요 선진국들은 두 자릿수 물가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그 무렵 미국의 천재 외교관 키신저 국무장관은 놀라운 외교성과를 연속적으로 이루어냈다. 이 유대인의 머리에는 놀라운 꾀로 가득했다. 그는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체결하여 군비경쟁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죽의 장막 중국의 문을 핑퐁외교로 열어제쳤다. 이어 골칫거리였던 베트남전쟁을 끝냈다. 그리고 1975년에 OPEC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왕과 비밀협상에 성공했다. 곧 미국이 왕권을 보호해주는 대신 세계 최대 유통 상품인 석유 거래를 달러로만 하도록 하는 묘수를 찾아낸 것이다. 그 뒤 달러에 대한 수요가 커진 덕분에 달러가 계속 기축통화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금과의 고리가 끊어진 달러는 이후 근원인플레이션(core inflation) 한도 내에서 무제한 발행되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게다가 다른 나라들도 달러의 평가절하를 견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화폐발행량을 늘려 나갔다. 그 결과 금본위제하에서는 상품과 서비스의 유통에 비해 화폐의 유통량이 적은 게 문제였는데 이제는 너무 많은 게 문제가 되었다.
세계 총생산액 증가율이 연 3~4%임에도 금융자산 증가속도는 그 3~5배에 달하는 15% 내외로 늘어났다. 과도한 증가율이었다. 금환본위제였던 1970년에는 ‘세계총생산액(GDP) 대비 세계 금융자산의 비중’, 곧 ‘자본집적도’가 50%에 불과했다. 그런데 1971년 금과의 고리가 떨어져 나간 이후 자본집적도는 1980년에 109%로 9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후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증가세는 더 가팔라져 1990년에 263%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뒤에도 증가세는 멈추지 않아 2000년 310%,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선진국은 400%를 넘어섰다.
/ ⓒ 셔터스톡
금융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
세계총생산액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비해 금융자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문제가 발생했다. 곧 땀 흘려 일해서 버는 근로소득은 연 3~4% 증가하는 데 반해 돈이 돈을 불리는 금융소득은 연 15% 내외로 상승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금융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로, 심각한 소득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점점 자본주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25%, 전체 부의 40%를 점유하고 있고, 이마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미국 국민 90%의 소득 점유율은 50% 아래로, 부의 점유율은 25% 아래로 곤두박질하고 있다. 상위 1%의 독식 시대가 된 것이다.
특히 미국 국민 하위 50%는 전체 부의 1.4%밖에는 점유하지 못해 코로나 19 같은 상황에서는 총체적 붕괴 위기에 직면하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 초만 해도 중산층 비중이 70%대였으나 지금은 40%로 줄어들었다. 이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미국은 지금 하부구조의 붕괴를 막대한 재정부양책, 곧 적자재정으로 막아내고 있다.
달러는 구조상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와 연계되어 발행되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미국은 국가부채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재정적자 문제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일본 등 모든 선진국들의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미래 후손들은 천문학적인 빚더미에 앉게 될 것이다. 국가부채가 늘면 이자와 원금 감당이 어려워지면서 많은 나라가 자국 화폐의 가치절하를 위해 인플레이션과 인위적 평가절하로 짐을 덜려고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게다가 각국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서는 약간의 인플레이션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근원인플레이션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끊임없이 화폐발행량을 늘리는 인플레이션의 유혹에 빠져 시중 유동성이 계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정부의 선의에 의한 통화정책, 곧 경기를 살리기 위한 통화팽창정책 또는 과열을 식히기 위한 긴축정책들이 때로는 시차를 두고 통화교란으로 작용해 과도한 호황이나 공황을 불러온다. 또 한편으로는 금융세력들이 이를 인위적으로 조장하고 악용해 기업들을 헐값에 인수하고 서민들의 현금자산을 거덜내기도 한다.
미국의 내과의사가 만든 e골드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강대국이 망하는 근본원인은 대부분 재정적자로 인한 과도한 부채증가와 통화팽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통화붕괴였다. 이는 시장붕괴로 이어져 거대한 제국을 쓰러트렸다. 강대국이 쇠퇴의 절정으로 치달을 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리스가 그랬고 로마제국이 그랬으며 동양에서는 원나라가 그랬다. 스페인제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경을 초월하는 인터넷의 속성을 활용해 디지털화폐를 만들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우연한 인물의 깨달음이 시작이었다. 미국의 내과의사 더글러스 잭슨(Douglas Jackson)은 미국의 신용화폐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돈과 중앙은행의 역사에 대해 독학으로 지식을 쌓은 그는 금본위제를 포기하는 것이 끔찍하고 위험한 결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패권을 위해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정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다시 말해 그는 자본주의를 고쳐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다. 잭슨은 낮에는 암 환자를 치료하고 밤에는 독학으로 코딩을 공부했다.
그는 금에 기초한 디지털통화를 만들면 여러 가지로 유용할 것으로 보았다. 첫째 환전과 송금수수료를 절약할 수 있고, 둘째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위협을 덜 받는 가치 저장에 유리하고, 셋째 금 구입 최소 단위보다 작은 단위로 거래를 하게 되면 인터넷 소액결제까지 가능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구상을 현실로 옮기고자 의사를 그만두고 개발자들을 고용했다. 이윽고 1996년 회사 ‘e골드’를 만들었다. 페이팔보다 2년 전에 설립된 이 회사는 전적으로 금으로 뒷받침되어 작동하는 온라인 지불시스템을 설계했다.
1996년 출시된 ‘e골드’의 발상은 간단했다. 고객이 실물 금이나 은을 ‘골드앤드실버리저브(Gold & Silver Reserve)’에 맡기면 이에 상당하는 e골드를 계좌에 넣어준다. 고객이 회사에 돈을 부치면 회사는 그에 상응하는 실물 금은을 사서 보관하고 e골드를 고객계좌에 충전해주었다. 금은양본위제의 가상화폐를 발행한 셈이다. e골드 충전액을 거래하면 실물 금은을 거래하는 것과 같아 무역에서 환차손으로 어려움을 겪던 고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어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신용카드가 보통 2~5%의 수수료를 부과하는 데 비해 e골드의 수수료는 0.5%에 불과했다.
더구나 2000년 들어 마침 인터넷쇼핑 붐이 확산 중이었고, 각국의 통화가치 절하 경쟁으로 금 가격이 치솟던 시기였다. 2000년대 초 165개국에서 350만개 이상의 e골드 계정이 생겨났다. 절정에 달했을 때 e골드는 3.8t이 넘는 금을 보유하기도 했다. 2006년에는 연간 20억달러 이상의 거래를 처리해 당시 온라인 결제업계에서 페이팔 다음 두 번째 규모였다.
미국 정부 e골드에 철퇴를 내리다
하지만 일반회사가 금은본위 화폐를 만든다는 발상은 화폐발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미국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웠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 정부가 만든 애국법은 테러자금 추적을 명분으로 송금업체가 반드시 허가를 받도록 못 박았다. 미 재무부는 애국법 제정 5년 전부터 사업을 시작한 e골드 역시 송금업체로 규정하고 법무부와 공조해 e골드를 수사했다. 이즈음 가상화폐를 화폐 정의에 포함하는 광범위한 규제개혁도 잇달았다. e골드가 화폐가 아니라 실물자산을 거래하는 곳이라고 발뺌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였다.
설상가상으로 e골드로 아동음란물을 구매한 사용자가 덜미를 잡혔다. 2007년 연방정부는 골드앤드실버리저브를 기소했다. e골드 사용자들의 경우 신상정보를 공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돈세탁과 아동음란물 등에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회사 소유주들은 인가 없이 송금업무를 취급한 데 대해 유죄판결을 받았고 CEO는 수개월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2008년 7월 미국 정부는 e골드 서비스를 폐쇄했다.
▲ ‘e골드’ 창시자인 더글러스 잭슨, ‘자유달러’ 창시자인 버너드 본 놋하우스, ‘페이팔’ 창시자인 피터 틸(왼쪽부터).
실물로 존재한 민간화폐 ‘자유달러’
e골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도는 잇달았다. 1998년 버너드 본 놋하우스(Bernard von NotHaus)는 인플레이션이 존재하지 않는 화폐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금화와 은화를 주조해 ‘자유달러’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이 암호화폐와 다른 이유는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가상화폐가 아니라 실물로 존재하는 민간화폐라는 점이다. 이후 자유달러는 10년간 민간인과 민간 기업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버너드와 함께 자유달러를 만든 한 개발자는 200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일본인과 접촉한다. 당시 온라인으로 접촉해온 사토시는 “자유달러가 자신이 만들고 있는 비트코인에 영감을 주었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 뒤 2007년에 미 연방수사국(FBI)과 첩보부가 자유달러 사무실을 급습해 금, 은, 백금 등 귀금속과 자유달러 2t어치를 압수했다. 민간인이 화폐를 발행하는 것은 미국 연방법에 위배되며 돈세탁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버너드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되어 22년형을 선고받았다. 개인이 미국의 공식적인 화폐와 경쟁할 목적으로 사적으로 화폐를 만드는 것은 연방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비트코인을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가 익명을 쓰고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신용카드가 출현한 것은 1950년대로, 이때부터 지폐 대신 플라스틱 카드가 결제 수단이 되었다. 그 뒤 1960년대 들어 은행 자동입출금기가 등장했다. 이후 1970년대 컴퓨터 용량의 증가로 인터넷 증권거래가 이루어지고, 1980년대에는 은행거래도 전산화되었다. 1990년대는 세계적으로 금융자율화와 금융시장 개방이 확대되었던 시기였다.
이 무렵 일단의 유대인 청년들이 이메일로 정보만 주고받을 게 아니라 가치의 전달, 곧 돈 거래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들은 이를 토대로 돈 거래에 있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새로운 지불방법을 고안했다. 이어 맥스 레프친과 피터 틸이 1998년 12월 이메일 결제 서비스회사 ‘콘피니티’를 설립했다. 이듬해 이 회사는 경쟁사인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X.com’과 합병되어 ‘페이팔’이 되었다. 피터 틸과 일론 머스크가 페이팔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페이팔은 쉽게 말해 구매자와 판매자의 중간에서 중계를 해주는 일종의 에스크로(escrow) 서비스로, 구매자가 페이팔에 돈을 지불하고 상품을 받으면 페이팔이 그 돈을 판매자에게 지불하는 형식이다. 에스크로는 상거래 시 판매자와 구매자의 사이에 신뢰할 수 있는 중립적인 제3자가 중개하여 사기 거래를 방지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페이팔 마피아’의 등장
페이팔은 신용카드번호나 계좌번호를 거래 상대방에게 알리지 않고 이메일로 거래할 수 있기 때문에 보안상 각광을 받았다. 일단 한 번 페이팔에 내 정보와 주소를 저장해놓으면 클릭 한두 번이면 결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매번 카드번호를 입력하고 공인인증서에 보안카드 번호까지 두드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뿐만 아니라 전자상거래에서 구매자는 수수료 없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점이 어필하여 세계적으로 이용되었다. 게다가 서로 다른 나라의 화폐도 페이팔에서 환전해 거래해주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끼리도 자유롭게 결제할 수 있다. 페이팔은 2002년 전자상거래 회사 이베이에 15억달러에 팔렸다.
그 뒤 페이팔에 참여했던 청년들이 이를 종잣돈으로 해 각 분야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자그마치 7개의 유니콘이 탄생했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와 ‘스페이스X’, 피터 틸의 ‘팰런티어 테크놀러지’, 채드 헐리와 스티브 첸 등 4명이 어울려 만든 ‘유튜브’, 맥스 레브친의 ‘슬라이드’와 ‘엘프’, 리드 호프만의 ‘링크드인’ 등이다. 이들은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고 밀어주며 놀라운 단결력을 과시했다. 오죽했으면 그들의 서로 돕는 단결력이 너무 끈끈하고 놀라워 언론에서 이들을 ‘페이팔 마피아’라 부를 정도였다.
페이팔은 핀테크(FinTech) 시대의 막을 열었다. 핀테크는 금융(financial)과 기술(technique)의 합성어로 금융과 IT기술을 접목시킨 것이다. 모바일결제와 송금, 개인자산관리, 크라우드펀딩 등 기존 금융과 미래지향적 금융을 IT로 묶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페이팔의 등장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본 나라는 중국이다. 신용카드조차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중국이 발전 단계를 뛰어넘어 핀테크 결제로 직행한 것은 페이팔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마윈 덕분이다. 그는 알리바바 쇼핑몰에 페이팔을 본떠 만든 에스크로 서비스를 처음 선보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관시(關係)를 중시하는 중국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과 온라인에서 거래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2003년 마윈이 만든 에스크로 서비스 ‘알리페이’가 중국을 ‘불신사회’에서 ‘신뢰사회’로 전환시켰다.
이후 관련 앱과 전자지갑 그리고 QR코드가 발전하면서 현재 중국 결제시장에서 모바일페이 점유율은 90%를 상회하고 있다. 이 시장을 알리바바의 알리페이와 텐센트의 위챗페이가 각각 56%, 40% 정도로 양분하고 있고, 최근 화웨이페이가 도전하고 있는 모양새다.
홍익희 /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