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1. 21
반기업 정서 해소 위해서는 재벌家 오너 리스크 관리 시급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관심사다. 3월에 열릴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조원태 회장의 이사 재선임 안건을 처리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남매들의 지분이 엇비슷하고, 어머니인 이명희씨도 5% 이상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2대 주주인 KCGI, 3대 주주 반도건설까지 얽혀 있다. 지분 구조는 복잡하지만, 드라마의 본질은 단순하다. TV에서 흔히 보던 가족 치정극이다.
돌아보면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각종 논란은 끝이 없다. ‘땅콩 회항’에 ‘물컵 갑질’ ‘사택 갑질’에 ‘폭행 연루’까지 모두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한진만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그건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들만 그런 건 아니다. 운전기사 상습 폭행은 사실 일도 아니다.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 정일선 현대 BNG스틸 사장, 몽고간장 김만식 전 명예회장이 모두 그랬다. 곰곰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갑질 정도는 대단한 것도 아니다.
▲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으로 3월에 열릴 한진칼 주주총회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 ⓒ 뉴스뱅크
재벌, 달라진 기업 환경 인식해야
현재 우리나라 재벌그룹을 이끄는 총수들은 대부분이 전과자들이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받은 유죄 판결은 예외로 치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계열사의 자금을 개인적으로 빼돌린 혐의로 2년6개월 동안 복역해야 했고,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조세포탈 및 횡령·배임 혐의로 3년여 동안 교도소와 병원을 오갔다. 횡령·배임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해외 원정도박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도 있다. 조금 오래된 일이지만 병상에 누워 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비자금 때문에 두 번이나 실형 선고를 받았고,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역시 횡령과 배임 혐의로 3년의 실형 선고를 받았다. 특히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조폭을 동원해 보복폭력을 지시했다가 1년6개월, 계열사의 손해를 다른 계열사에 떠넘겨 3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반기업 정서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기업활동과 투자가 위축되고 종국에는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한다. 물론 반기업 정서의 중심에는 이른바 ‘재벌’로 불리는 대기업 집단들이 있다. 하지만 “부자 되세요”가 버젓하게 텔레비전 광고에 쓰이는 덕담이자 지극히 정상적인 인사가 되는 나라에서 부에 대한 적대감이 어떻게 가능할까? 문제는 부의 획득과 분배가 공정한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의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불신은 재벌의 불법행위와 일탈로 증폭된다.
총수 한 사람의 독단적인 경영이나 부적절한 처신으로 기업에 피해를 주는 것을 흔히 ‘오너 리스크(owner risk)’라고 한다.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오판과 무능으로 인한 경영 실패고, 두 번째가 총수의 불법행위나 일탈이 기업에 피해를 주는 경우다.
오너 리스크는 우선 취약한 재벌의 지배구조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 역사가 짧아 소유와 경영이 제대로 분리되지 못한 데다, 기업이 정부의 특혜를 받으면서 고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순환출자 등을 통해 확장을 거듭한 결과 지금의 불투명한 지배구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비록 지분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도 총수 일가는 경영권을 내놓거나 견제받을 생각이 없다. 당연히 무리가 따른다. 그동안의 재계 역사를 봐도 특히 후계 갈등은 필연적이다. 삼성을 비롯해 현대, SK, 롯데그룹 등은 창업자가 일선에서 후퇴하고 후계 구도를 정해야 할 즈음, 거의 예외 없이 갈등을 겪었다. 총수 일가의 골육상쟁이 낯설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경영권 편법 승계,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배임과 횡령 등의 잘못으로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한층 강화된다. 국민 사이에 반기업 정서가 있다면 그건 할 일이 없는 누군가가 미리 만들어놓은 게 아니다. 오너 리스크는 정권 탓도, 그렇다고 여론 탓도 아니다. 이런 상황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과도 상관이 없다. 그룹 총수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갔던 것은 지금 정부보다는 오히려 박근혜 정부 때였다.
물론 재벌의 오너 경영체제가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창업자들은 뛰어난 기업가 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특히 오너 경영의 힘이 빛나는 것은 장기적인 시각에서 전문경영인들이 엄두도 내기 어려운 대규모 투자를 통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을 때다. 정주영 회장이 세계적인 조선소를 일궈낸 것이나,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승부를 걸었던 것이 모두 그렇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우월하다는 법은 없다. 흔히 말하는 이해관계 상충에 따른 대리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 환경이 달라졌다. 능력이 부족한 오너 자녀가 오로지 혈연이라는 이유로 경영을 맡게 되는 것은 오너 일가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나마 오너도 아니다. 상법상 기업의 주인은 주주고, 오너라고 불리는 재벌 총수는 그저 대주주의 한 사람일 뿐이다.
선진 기업에서 소유 구조의 핵심은 주주이고, 경영 구조의 핵심은 전문경영인이며, 지배구조의 정점에는 이사회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주주들이 의사결정에 적절한 역할을 하고, 전문경영인이 전권을 갖고 있으며, 이사회가 충분히 견제하는 선진 기업은 없다. 삼성전자도 현대자동차도 그런 기업은 아니다. 그냥 적은 지분으로 순환출자 구조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1인 총수 경영에 불법, 탈법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그런 지배력을 대물림하려는 기업일 뿐이다.
▲ 정우현 MP그룹 회장 갑질 사태로 회사뿐 아니라 가맹점마저 큰 피해를 입었다. / ⓒ 연합뉴스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 확정
외환위기 이후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나 재벌 개혁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나,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순환출자 고리는 줄었으나 총수의 황제경영 방식은 여전히 건재하다. 대통령은 임기가 5년에 불과하지만, 오너는 임기도 없고 대를 이어간다. 총수를 견제하라고 도입한 제도지만, 이사회는 의미가 없다. 부결시킨 안건이 단 하나도 없는 이사회가 대부분이다.
오너 리스크의 관리는 이 같은 기업 지배구조의 개선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너 리스크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반기업 정서도, 반기업 정서에 따른 특혜 시비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근 국민연금은 경영 참여 목적의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확정했다. 재계는 위험한 경영 개입이라며 비판적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은 불법과 일탈을 거듭한 재벌기업들이 자초한 일이다.
오래전, 당시 사업하기 힘들다고 알려진 어느 신흥국에서 삼성전자의 한 임원을 만났다. 그는 나라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거두면서 나름대로는 때로 자부심도 느끼지만,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너무 부끄럽고 힘이 빠진다고 했다. 그때, 서울에서는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과 배정을 통한 최대 주주 변경이 논란이 되고 있었다.
김상철 / 경제 칼럼니스트(MBC 논설위원)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