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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특강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말씀 / 디모데후서 3:1-17
요절 / 디모데후서 3:14,15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후서는 감옥에서 순교 직전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제자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거짓 선생들의 이단 사상에 미혹된 성도들로 인해 분열과 다툼이 생겨 혼란스러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마저도 세상의 타락의 물결에 편승해 믿음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로마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핍박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런 때에 디모데를 위해 기도하며 이 편지를 씁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이 시대의 타락상을 짚어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1-9)
1a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것을 알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본문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알아야 하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1b~5a절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여기서 말세는 넓은 의미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를 가리킵니다. 말세에 고통당하는 때가 이르는데 그 때의 사람들의 특징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때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철저한 자기중심주의를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자기만 좋으면 남이야 어떠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을 지혜롭다 하며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일 때 자기를 자랑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나름 잘났는데 자기만 잘난 척 자랑하며 교만을 떱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 남을 깎아내리며 비방합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낳고 길러준 부모까지도 거역하고 나 몰라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나 이웃과 같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중심적이기에 감사할 대상이 없고 감사함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정합니다. 다른 사람과 원통한 문제가 있을 때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는데도 원통함을 풀지 않습니다. 도리어 모함하며 배신하며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난폭하게 대합니다. 당연히 선한 일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이기에 자기를 위해서는 절제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빨리 하려고 조급해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만족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살 때 개인은 비교의식과 열등감, 시기심으로 뼈가 쇠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만족할 수 없고 자기생각대로만 하려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분쟁을 일으키고 파괴시킵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돈입니다. 이 세상은 돈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돈이 있으면 염라대왕 문서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돈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편리하게 해줍니다. 돈이 풍족하면 라면을 먹는 대신 맛있는 뷔페집을 찾아갑니다. 돈이 풍족하면 값비싼 명품 옷을 사 입을 수 있고 아이폰이나 갤럭시탭도 하나 장만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해외여행도 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어디를 가든 떵떵거릴 수 있고 권력이나 명예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저축은행 구명 로비 청탁 대가로 7,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은진수 전 감사원 감사위원을 볼 때 돈이면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요? 사람들은 물질 만능주의에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구정물을 퍼주어도 먹는 개돼지처럼 양심도 팔고 순결도 팝니다. 돈을 위해 부모, 남편, 아내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돈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필요 이상의 돈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9).” 또 돈을 사랑하는 자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사람이 돈을 필요 이상으로 가지게 되면 그것으로 무엇을 할까요? 쾌락을 추구하고 죄를 짓습니다. 결국 돈이 그 사람의 영혼을 더럽히며 그에게서 참된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 쾌락을 사랑한다는 것은 금지된 쾌락에 빠지고 무절제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란 동영상을 보는 것을 비롯하여 혼외정사, 스와핑, 동성연애 등 깊은 정욕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고 기도에 헌신하며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섬길 때 영혼에 빛이 비취고 참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멀리하고 기도하기를 싫어하고 자기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영적인 의욕이 시들어집니다. 안일해집니다. 이 때 마치 단골손님처럼 쾌락이 찾아옵니다. 쾌락은 사람의 영혼을 더 깊은 쾌락의 수렁으로 빠뜨리며 더 깊은 목마름으로 고통하게 합니다. 쾌락은 도덕적, 신앙적 양심을 파괴시키며 영혼의 죽음을 가져옵니다.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6).”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말세에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이들은 그 시대를 더욱 끔찍하게 고통당하는 때로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5a절을 보십시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여기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 내면은 변화되지 않는 자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신앙 고백하지만 내면은 쾌락을 찾는 자입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기도에 헌신하며 영혼들을 섬기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세상 잔재미와 오락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입니다. 이것은 당시 거짓 선생,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6,7절은 이러한 예로 당시 대표적인 이단사상을 전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들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쾌락에 빠졌습니다. 또 자신들의 사상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들은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리는 가엾은 여자들을 은밀히 유인하여 자기 생각대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항상 배우지만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이는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짓 선생들에게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중한 죄짐에서 자유롭게 하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리는 삶에서 구원받게 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복음의 능력을 믿지 않았고 그들 나름의 사상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그들에게서 항상 배운다 할지라도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런 거짓 선생들의 내면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8,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을 얀네와 얌브레에 비유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기 위해 바로 왕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적을 행했습니다. 이때 얀네와 얌브레는 마술과 속임수로 이적을 행하며 모세를 대적하고 훼방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세가 행한 열 가지 이적 중 세 번째까지는 속임수로 간신히 흉내 냈으나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거짓 선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요 마음이 부패한 자들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형식적으로 시늉만 내는 위선자들입니다. 결국 얀네와 얌브레의 거짓된 모습이 드러난 것처럼 그들의 어리석음도 만천하에 밝히 드러나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같은 자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권면합니까? 5b절을 보십시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동조하지 말고 그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또 영지주의자들을 비롯한 거짓 선생들과 동조하지 말고 그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당시 거짓 선생들의 겉모양은 굉장히 화려해 보였습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타이틀과 학벌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언변이 좋았습니다. 많은 대중들을 몰고 다니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디모데는 복음의 일군으로 헌신하다가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하는 회의에 사로잡혔습니다. 자기 몸도 챙기고 싶었습니다. 고난 없는 목자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돈이 있어야 목자 생활도 하지하며 돈 욕심도 생겼습니다. 젊은 나이에 당시 종교지도자들, 거짓 선생들처럼 적당히 쾌락도 즐기고 싶었을 법도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지켜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이제는 서서히 그들이 부러웠고 그들과 가까이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감지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 선생들의 실상과 정체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화려하지만 내적으로는 타락하여 말세에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그들의 모습을 직시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한 자들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는 어떤가요?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 이런 시대 물결이 교회 안에도 밀려들어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사탄의 역사로 세상의 죄악에 감염된 우리는 점점 진리에 대한 믿음과 경건의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말씀대로 살자고 말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교회에도 세상의 풍조와 생활방식이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부딪치고 있는 큰 위기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살아간다 해도 우리만큼은 분명히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10-17)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 선생들이 가득 찬 세상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본받고 따라가야 할 모범을 제시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만 원어에 보면 10절 첫머리에 '너는 그러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시대가 아무리 죄악되더라도 '너는 그러나'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악된 시대 속에서 어떻게 목자 생활을 했는가 말합니다. 바울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알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바울은 거짓 선생들과는 달리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세 차례 전도여행을 하며 이방 양들에게 이 복음을 줄기차게 가르쳤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으로 양들이 회개하고 주의 제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황무지와 같은 이방 땅에는 아름다운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바울의 행실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었고 의향 즉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양들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오래 참음으로 감당하고 섬겼습니다. 그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그의 삶을 헌신하며 살도록 돕는 영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목자 생활에 따르는 아픔과 고난을 인내했으며 주와 복음을 위해 많은 핍박을 받았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떻게 핍박받았는지는 디모데도 다 보고 아는 바였습니다. 특히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유대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거적때기로 둘둘 말아 성 밖으로 내던지기까지 했습니다(행14:19). 바울은 말할 수 없는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 제명대로 못살고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바울을 건져주셨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살다보면 핍박도 받고 고난도 당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이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어떤 진리를 깨우쳐줍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살려고 한다면 고난과 핍박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환영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복음신앙으로 살며 핍박과 고난을 받을 때 성도의 신앙과 내면은 더욱 굳세어지고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신앙을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은 점점 더 악해지고 타락해 갑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여기서 거하라는 말은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머무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을 보면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서 떠날 위기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바울에게서 배운 복음의 진리, 그가 기쁨과 감격 가운데 영접하고 믿었던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이 복음신앙 속에서 성장해왔고 바울을 본받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무릎 위에 앉아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디모데는 그 신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배우고 확신했던 복음신앙, 성경신앙에서 떠날 위험 속에 놓여 있습니다. 실제로 아시아에 환난과 핍박이 불어 닥쳤을 때 많은 동역자들이 이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으로 떠나거나 거짓 선생들처럼 인본적인 신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지 못하고 떠나갔을 때 그들은 더욱 악해지고 서로를 속고 속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세상으로 떠난 동역자들이나 거짓 선생들을 본받지 말고 배우고 확신한 복음신앙, 성경신앙에 거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디모데는 그동안 배운바 성경 진리를 확신했습니다. 그 배우고 확신한 성경 진리 위에 굳게 서서 교회와 양들을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세상은 죄악의 물결로 넘치고 그 물결은 교회에까지 밀려들어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신앙을 지키며 양들을 섬기고 제자양성을 한다는 것이 점점 힘들게만 느껴졌습니다. 디모데는 한계적인 생각과 회의 속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디모데에게 바울의 처방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배우고 확신했던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배운 성경에는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15b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사람들은 중한 죄짐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문제와 고통에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과연 어디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찾을 수 있습니까? 심오한 철학과 사상에 있나요? 아니면 세상의 화려한 타이틀과 명예, 권력에 있나요? 그것도 아니면 깊은 산 속에서 고행을 한다고 해서 구원이 주어집니까?
디모데는 복음의 일군으로서 핍박과 고난을 겪으면서 소심해졌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주님과 주님을 위해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시대의 죄악의 세력 앞에 영혼은 날마다 짓눌렸고 깊은 무력감과 한계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내적으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청년의 정욕으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 모든 문제로부터 건져지고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성경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가 어떤 인생문제, 신앙문제에 직면하든지 성경은 능히 그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디모데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는 그 시대의 죄악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연소하기 때문도 아니요 타이틀이 없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 한 가지, 성경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단순하게 믿고 성경을 굳게 붙잡는다면 어떤 인생문제와 신앙의 모든 문제로부터 능히 구원받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왜 이렇게 놀라운 지혜가 있는 것입니까? 16a절을 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God breathed'로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 66권의 저자는 서로 각기 다른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흐름과 주제는 일치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죄인들을 향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성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가르쳐줍니다. 한번 범죄한 인간은 영원한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이런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방법뿐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서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일관된 주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모든 성경의 저자가 한 분이시며 그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 사람들은 부모의 권위로, 선배의 권위로 가르치려하면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부모의 권위, 선배의 권위는 거스르고 반발할지라도 하나님의 감동이 임하면 회개하고 변화됩니다. 아무리 매를 때리고 교정시키려고 해도 듣지 않던 사람에게 오직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말씀이 임하면 바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교만한 인간을 가르치고 바르게 하고 교육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감동 외에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죄인의 심령에 하나님의 감동을 일으키게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역사할 때 평범한 사람이 온전해지고 위대해집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역사할 때 한 가지 선한 일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이 모든 위대하고도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역사할 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심령들이 물같이 녹아지고 변화되어 위대한 새역사 창조의 주역들이 됩니다.
죄악된 이 시대의 희망은 진정으로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감동에 붙잡히고 하나님의 감동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감동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감동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들어 쓰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감동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감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동안 수없이 배우고 익히고 확신해 온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온 마음을 바쳐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의 소중한 그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바쳐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대로 행해야 합니다. 성경이야말로 이 시대의 유일한 빛이요 희망입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드려 성경을 사랑하므로 늘 하나님의 감동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감동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성경말씀의 감동이 임하면 충분히...능히...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