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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는 애증이 엇갈리는 음식이다.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그리움과 어려웠던 시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동시에 담겨 있다. 수제비에는 어머니의 손맛과 고향에 대한 기억,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된장찌개가 언제든지 다시 돌아가 안기고 싶은 그리움을 자아낸다면 수제비는 마음 시리고 그립지만 되돌리고 싶지는 않은 추억에 잠기게 한다.
중장년층에게는 특히 그렇다. 수제비에는 밀반죽을 손으로 뚝뚝 떼어내 끓는 국물에 넣어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우리들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짜장면이 싫다”고 말씀하시던 분이다. 자식한테는 싫다는 짜장면을 먹이고 당신께서는 수제비를 드셨다.
한국인이 수제비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의 뿌리는 가난이다. 힘들었던 시절의 상징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먹을 것이 없었을 때 끼니를 잇게해준 음식이 수제비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원조 물자로 들어온 밀가루를 반죽해 끓인 수제비로 힘든 시기를 넘겼다. 그래서 배고픈 시절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에게도 수제비는 마음 찡한 추억이 서린 음식이다.
한 시절, 민족과 고난을 함께 겪었지만 사실 수제비는 역사가 무척 오래된 전통 음식이다. 기원을 따져보면 국수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뿌리가 깊다. 뿐만 아니라 일반 상식을 깨는 음식이다.
옛날 수제비는 형편 어려운 사람들이 끼니를 때우려고 대충 만들어 먹던 음식이 아니었다. 양반들의 잔칫상에도 올랐던 고급 요리였다.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양반집에서는 별식으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밀가루가 흔치 않던 지역에서는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잔칫상에도 올렸다. 지금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노인들이 생존해 계시니 아득히 먼 옛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쌀 수제비라고 하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추수가 끝났으니 쌀은 넉넉한데 밀가루는 없고, 그렇다고 밀가루를 살 만한 현금도 없으니 굳이 쌀을 팔아 밀가루로 바꾸는 대신 쌀가루를 반죽해 수제비를 끓였다. 쌀 수제비는 농촌에서 추수 무렵, 한철에만 먹을 수 있었던 별미 중의 별미였던 것이다.
근대 요리책인 《조선요리학》의 저자인 홍선표가 1938년 신문에 발표한 글에서도 수제비를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음식이 아니라 특별한 날 먹는 별식으로 그리고 있다.
“여름 중에도 삼복에 먹는 음식으로 증편과 밀전병, 수제비라는 떡국이 있는데 여름철 더위를 물리치는 데 필요한 음식”이라면서 “수제비는 닭국이나 곰국에다 만들어 먹을 때도 있지만 미역국에 많이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름철 삼복의 복놀이 잔치에 수제비가 없으면 복놀이 음식이 아니 되는 줄로 알고 누구나 다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다”고도 했다.
사실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곳곳에서 수제비에 대한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영롱발어(玲瓏撥魚), 또는 산약발어(山藥撥魚)라는 전통 음식이 일종의 수제비다. 다소 어려운 한자지만 발어(撥魚)란 물고기가 뒤섞이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다. 숟가락으로 떼어 넣은 밀가루 반죽이 끓는 물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마치 물고기가 어우러져 헤엄치는 것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산림경제》에 영롱발어라는 음식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온다. 메밀가루를 풀같이 쑨 후에 잘게 썬 쇠고기나 양고기와 함께 수저로 팔팔 끓는 물에 펴 넣으면 메밀수제비는 뜨고 고기는 가라앉는데 그 모습이 영롱하다고 했다. 여기에다 표고버섯, 석이버섯을 넣고 소금, 장, 후추, 식초로 간을 맞추어 먹는다고 했으니 지금 기준으로 봐도 고급 메밀수제비다.
산약발어는 메밀가루에 콩가루와 마를 섞어서 수저로 떼어 끓는 물에 넣은 후 익기를 기다렸다가 먹는다고 했다. 지금이라면 참살이 식품으로 각광받을 마수제비였으니 역사 속에 보이는 수제비는 양반과 부잣집에서 별미로 먹던 음식이었다.
지금 우리는 수제비를 별식으로 먹으며, 흘려보낸 것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먹는다. 한때 원조받은 밀가루를 반죽해 주린 배를 채웠던 수제비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당장의 몸과 마음은 고달파도 여유롭던 시절의 고급 수제비를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삼지 않았을까 싶다. 따지고 보면 한국인에게 수제비는 영혼을 자극하는 솔(soul) 푸드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