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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아버지 “가슴시린 편지”
<<그 바위 곁의 난초>>
나의 선친께서는 계사년(1893년 , 고종 30년)9월 8일에 출생하시어 병오년(1966년 )2월22일에 별세하심으로써 지상에서 73년의 향수를 하시다가 이승을 뜨시었다.
생각해 보니 선친을 여읜 지 벌써 24년이 되었다, 이 원고의 청탁이 묵은 그리움을 일깨워 주니 새삼 아버지를 여읜 슬픔이 가슴에 사무친다.
육친의 정! 부모, 형제, 처자식 해서 핏줄이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거의 절대적인 친분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진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우리는 서슴없이 ‘피“라고 대답 할 것이다, 이 피의 진지함과 간절함과 사무침과 절대적임,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깊은 사랑 중의 사랑이라 강조하여 마땅할 것이다, 오늘이 육친 중에서도 으뜸인 아버지를 되새기며 반성과 그리움의 간곡한 심정으로 명복을 빈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었나? 나의 선친의 호적 이름은 “클 태”자. “심을 식”자이다. 자는 형삼 아호는 외암이었다. 종가의 대를 이으려고 손이 없는 큰 댁에 양자로 들어 가셨던 “제자. 윤자” 어른이 생부이셨다.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원동을 근거지로 하여 한 마을을 이룬 삼계공의 종통을 이은 구대 종손인 그분, 곧 나의 조부님은 향리 역사 삼백년의 선산 마을을 지키며 문중사와 가업을 소중히 여기셨다,
나는 선친의 삼남 이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나 서른 몇 해 동안 그분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삼남 이녀 중의 누님과 맏형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작은 누님과 중 형은 나와 같이 동기간의 정을 나누며 이승에 머물러 있다.
대동보에 나온 공식 기록을 살펴보면 , 우리 성씨의 최고 조상은 함자가 “많을 다”자, “살필 성”자이며, 중흥 시조는 고려 때에 이름을 빛낸“더할 익”자 “차차 점”자 어른이다, 그분으로부터 선친은 22대 , 나는 23대 자손이다, 우리 성씨는 전성기가 고려조였다“익” 자, “점”자 중흥 시조가 조선조에 협력하지 않아서 그 시대에는 희미해졌다, 그러나 근자에 와서는 다시 여러 방면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니 과거에 속하는 성씨라기보다는 미래에 속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 성씨라고 자긍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이름난 유학자인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문화생인 운제 최영조 선생 아래에서 수학하였다. 대동보에는 아버지께서 기상과 자태가 청수하고 품성이 총명하였고 문장을 일찍이 성취하여 그 시부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 가지, 문장이나 시부 말고도 선친께서는 한의서를 공부하시어 몸소 한의사 시험에 합격하시기도 했는데 침술에 능할뿐더러 불임증 치료까지 해내는 매우 용한 의원으로도 명성을 날리고 계셨다.
내가 어려서부터 동요를 지어 칭찬을 받고 하여 선친의 “문재”를 이어 받았다고 했는데 , 그와는 달리 선친의 손자요 나의 유일한 아들인 문찬기는 할아버지의 의술과 침술을 이어받겠다고 하여 경희대학교 한의과에 들어가 본과를 마치고 현재 한의원을 경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글재주를 이어받은 아들과 할아버지의 의술을 이어받으려는 손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아둔한 우리 부자가 선친의 두 가지 재능인 문재와 의술을 나누어 “청출어람” 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버지보다 이름이 낫고 아들보다 손주가 낫기를 기원해 보는 것이다.
이렇듯이 아버지는 몰락해서 가빈한 종가의 대를 이은 종손이요, 황혼기를 맞은 구한밀 갑오난리 직전의 해에 출생하여 , 사라져가는 구학문에 매달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유림의 시부로 긍지를 삼고 ,스스로 터득한 의술로 가난한 민중의 병을 다스린 ,마지막 선비의 대열에 서신 분이었다.
우리 집은 명색이 자작농에 속했지만 그 농토는 해를 거듭하면서 건실치 못한 맏형의 방탕과 겹쳐서 줄어들었고 일제말기에는 절량 농가에 해당되기까지 했다. 그래서 춘궁기 곧 보리누름의 사월과 오월을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그런 형편에 놓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친께서는 명색이 글 읽는 선비라고 일체 농사일을 하시지 못했으며, 머슴을 둘 만큼 가계가 넉넉하거나 농토를 갖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선친께서는 농촌에서 반드시 감당해야할 논일과 밭일 , 산에서 나무하는 일 ,새끼 꼬고 신 삼고 가마니 짜는 일 , 지게 지고 등짐 하는 일, 꼴 베고 풀 베는 일들을 거의 못하시었다. 생활에 능하지 못한 이른바 백면서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오히려 어머니(풍산 홍씨로서 선친보다 두 살 위였으며 육년이나 더 우리와 이승에 계시다가 72년에 작고하셨다)께서 들 일 , 산에서 나무하는 일까지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친께서는 영산포에 한약방을 세우기도 했으나 큰 물난리로 날려 버리고 고향에 돌아오신 뒤로는 한약방을 전문업으로 하시지 않았으며 대개 침통만 가지고 유림들을 방문하시면서 (이른바 바깥출입 이라고 한다) 반 취미삼아 노자 벌어 쓰는 정도의 의술로 일관 하셨다, 각 고을의 향교와 시부에 능한 유림계 후예들을 만나 운자도 겨루고 통음도 하는 , 여러 아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병 치료도 하는 생활 이였다. 한 주일이 나 두 주일 때로는 한
달씩 온 나라를 돌다가 큰 지병을 가진 사람을 고쳐 주게 되면 상당한 액수를 보수로 받아 가계에 도움을 주고 또 출타를 거듭하시었다.
자연히 가계는 어머님께서 맡아야 했고 장성한 맏형은 농사를 지어야 했으나 오히려 건실치 못한 생활태도 (주색잡기 같은 것.)로 가게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근원이 되었으니, 집안은 설상가상으로 극빈한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태어난 해는 일제 말기 34년이었는데 이미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가계가 어려워지고 거기에다 우리민족 누구나 겪는 시대의 아픔과 생활의 어려움이 아울러 우리나라 농촌을 뒤덮고 있었던 때였다.
그 뒤로 1945(을유년)에 이른바 해방이 왔다. 실로 36년에 맞이한 민족 해방이었던 것이다. 천수답 얼마와 산전에 매여 사는 산골 농민들에게 해방은 새로운 기적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희망과 기대에 부풀게 했다, 그런 해방 뒤로 선친께서는 둘째형(초등학교 교사 맏형 대신에 가업을 지키며 부모를 모셨고 또 나의 학비를 대준 실제로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한 분으로서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위요, 함자는 병석이다)과 나에게 신식공부 곧 대처공부를 시키신다고 가계의 일부를 광주로 분가시켰다. 어머님께서 고향과 광주를 오가시며 농사철에는 시골에서 농사일을 , 농한기에는 우리 형제의 학업 뒷바라지를 했다.
향리 국민학교에서 3학년을 마치고 46년엔가 광주서석국민학교로 전학하자, 극성스런 대처 애들이 촌놈이라고 놀려댔었다. 그러나 수업 시간에 뛰어난 실력(?)발휘를 했고, 4학년 때에 벌써 “가을의 산길” 이니 “고향 계신 어머니”니 하는 그럴 듯한 동요를 지어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자 놀려대던 애들이 너도나도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곧 부급장에 이어 어린이회장(전체회장)이 되기도 하여 상당한 인기를 얻었었다.
그때에 서석초등학교 는 광주의 상류층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군제가 엄하지 않던 때라 국민학교에도 명문을 가려서 보내던 시절에 전학이 되었다. 친척 가운데에 형님뻘 되는 선생이 있어서 알선으로 전학했던 터였다, 입성이나 도시락 . 살고 있는 집 보호자의 사회적인 지위들이 나와 비교가 되지 않는 동무들이 있는데, 공부로 만회하고도 내 마음 그 어느 한구석에는 가난한 가정이 주는 그늘 같은 것이 어렴풋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나는 촌놈이었다,
그래서 반친구들이 초대를 하면 따라가기는 했지만 , 그 애들이 내 집 (나의 집은 그때에 피난민 수용소가 있던 하천부지 -지금의 학동- 에 지은 초가삼간 이었다)에 오고자 하면 한사코 거절하곤 했다. 부엌방까지 합하여 방이 세 칸 인데 , 하나는 형님과 내가 공부방으로 쓰고, 윗방은 아버지의 한약 도구로 장식돼 있었다, 그런데 친한 동무 하나가 따라와서 그것을 보고는 이튿날 학교에 가서 나의 아버지가 약방을 한다는 소문을 내고 나더러 “약방의 감초”라고 놀려대었다.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고 특히 아버지를 모독한다고 생각하여 그 아이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일체 말을 걸지 않기로 작정해버렸다. 그것은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최고의 존재가 된다, 인격적으로나 또 다른 이유로 모독이 주어졌을 때에 자식들은 본능적으로 또 다른 이유로 모독이 주어졌을 때에 자식들은 본능적으로 복수를 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불우한 아버지에 대한 굉장한 자격지심이 있었던 듯하다.
모든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글재주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다정다감한 것, 술 좋아하는 것, 역마성 방랑벽이 있는 것 (나는 실제로 “방랑”하지는 않으나 직장을 자주 옮겼고 제도권 교단을 떠나서 십 오년 동안이나 “거리의 교사”로 자처하며 방황했다, 또 재야 운동권에 소속돼 온 나라 방방곡곡으로 강연 여행을 다니는 것으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며 용모도 형제 중에서 내가 가장 아버지에 가깝다고 한다.
가계가 어렵던 일제 말기와 육이오 전후 피난살이 시절엔 늘 밥그릇이 덜 찼고 숟가락 놓기가 아쉽기만 해서 출타하신 아버지 몫으로 아랫목에 묻어놓은 밥그릇에 관심이 쏠리곤 했다. 아버지께서 저녁을 드시고 오실 것이냐 집에 오셔서 드실 것이냐에 대한 관심이었다.
바깥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밥그릇을 죄다 비워 버리시면 나의
실망은 대단했던 듯하다. 이에 눈치를 챈 아버지께서는 일부러 먹고 왔다가 우리에게 양보하거나 어떤 때는 절반만 잡수시고 남겨주었다.
아, 얼마나 철이 없고 배고픔을 이기고 참아내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던가, 이제는 밥숟가락을 아쉬워하지는 않는데 그 어질고 자상했던 아버지께서는 이미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도 그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그래서 고인도 풍수지탄이라 했을 것이다, 나의 선친께서 42살이시고 선비께서 44살 이실 때에 단산 5 년 만에 다시 얻은 막내였으니 조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핀잔 감 이었을 것이다, 44에 낳은 아들이라니, 뼈가 굳어가시던 어머님의 골반을 얼마나 괴롭히며 태어났을까? 그것도 갑술년 8.15일 이른바 큰 명절인 추석에 태어났으니 쾌 말썽
많은 출생이었다, 그러나 어머님께 종가 맏며느리임을 생각하시고 얼마나 모질게 참고 참았는지 차례를 다 올리고 손님을 다 치른 뒤에 , 밤중이 거의 다 된 해시에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의 출생으로 그날 종가의 명절이 차질이 생긴 건 아니나 일종의 ‘사건“ 이었던 듯하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장가들어 독립하기 전까지는 내내 나의 생일상을 오후에 따로 차려 주셨다. 종가의 풍습으로 조상에 드리는 차례가 먼저여서 생일상을 못 차려주는 게 마음이 아파서 해거름에 꼭 다시 다른 음식으로 차려 주셨던 듯하다. 이제 와서 그 어버이의 마음을 헤아림에 어찌 목이 매이지 않으랴.
국민하교 4학년 대에 쓴 “고향 계신 어머니”라는 동시는 농사를 지으려고 고향으로 가신 부모님을 생각해서 나온 것이었다. 그 시로 문예 담당 지도 선생님께 크게 칭찬을 받은 것 말고도 교지 특별 란에 실렸으며 작곡도 된 비 있었다. 그 소박한 동시 속에는 육친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가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간절한 생각은 고향 계신 어머니
눈물을 흘리면서 남쪽 하늘을
홀로 앉아 외로이 바라볼 때
해남도 서산 넘어 고향 갑니다.
그칠 줄을 모르는 어머님 생각
돌아서면 바라 뵈는 먼 하늘을
홀로 서서 우러러 하염이 없고
어머님 얼굴 실은 달이 뜹니다.
‘고향 계신 어머니’
회향편 수필이나 습작 편력기에 이 동요를 실은 바 있는데 여기에 다시 옮겨 그날의 그리움을 되새겨 본다.
우수의 소년이었던 나는 성장하여 더 세상의 아픔을 배웠고 이제는 민족의 고통 , 민중의 아픔을 노래하는 시인 대접을 받지만 이 모든 문학과 삶의 태반이 육친에 대한 그리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면 내가 간직한 선친의 하시 중에서 한편을 골라 실음으로써 못 다한 육친의 그리움을 대신 하고자 한다. 이 한시 “봄날”은 내가 그 뜻을 대강 헤아려 의역한 것으로 나의 수필집 ‘저 미치게 푸른 하늘‘ 에도 실린 바 있다.
한가로운 구름 그림자 속에
조는 듯 청산이 머얼고 .
좋은 새 소리 속에
긴 봄날이 더디 가도다.
말고 조찰한 이 한 맛
진실로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
이윽고 오동나무 가지 끝에
둥실 뜨는 달...
봄날의 한 부분
시의 제재 , 착상, 정서적 분위기를 들을 생각해 보면 선조의 기념각 삼계정사의 봄날에 붙여 그 흥을 읊은 시인 듯하다, 아마 이 시는 어는 봄날 제각 마루에 앉아 시와 조상을 생각하며 한잔 술 없어도 자연에 취한 시정을 읊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 이미 고향을 떠난 지 오래건만 이 시를 의역해서 음미해 보면 잃어버린 고향의 봄날까지 되 느껴지는 듯해 향수를 가지게 된다.
당신의 아호는 외암인데, 아들의 이름을 병란이라 지으심은 무슨 뜻이 있었던가 헤아려 본다. 외암은 글자 모양이나 뜻이 모두 크고 억세다 . 고향의 주봉 종괘산 상봉에는 “쌍괘암”또는 “장군암”. “고동바위”라 하는 큰 병풍형 암괴가 솟아 있고 그 위에 묘 하나 쓸 만 한 평지가 있어 거기다 오대 조부의 묘를 쓰기도 했는데 그런저런 연유로 아호를 외암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렿다면 그 큰 바위에 어울리는 운치로는 난초가 단연 으뜸이 아니겠나, 그리해서 “외암 곁의 난초”로 생각해 보면 그 고운 글자를 쓰신 연유를 속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선친과 선비 ! 두 분 다 차례로 여읜 지 어느덧 25해가 되었다.
막내의 어리광을 벗지 못한 응석받이인 채로 교단과 문단에 발을
디뎌 사회의 유명인사 노릇도 하고 가르치는 일과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으니 그 책임과 사명 또한 수월한 처지가 아니다.
이제 나도 그 옛날 어버이들이 서계시던 그 위치 곧 몇 년 뒤에 회갑이 되는 “지천명”을 넘어보고 있다. 역사는 아버지보다는 나은 역사를 만들 자신이 있나? 아버지가 걸어온 길이나마 헝클지 않고 올바르게 살피며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외암 곁의 난초로서 , 우아한 향기를 머금을 수 있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가 버린 세월은 되돌릴 수 없거니와 남은 날들은 나의 후예들과 이 땅의 민중들에게 작은 소리 나마 맑게 스미는 한 시대의 참 가인이 되기를 이런 시로써 스스로 다짐한다.
큰 바위 곁에
작은 한 그루 난초
잡풀과 섞이지 않고
가려 딛은 한 뼘의 땅 위에
맹물 마시고 피운 꽃
청하늘 우러러
날로 향기 높아 가리라
큰 바위를 닮아
청태 낀 그 연륜 헤아리며
주름살 하나마다
깡기로 다진 양심 간직하고
천년 바위의 뜻을 배우리라
맹물을 마시며 날로 푸르러 가리라.
열두 편의 가슴 시린 편지 중 행복공작소 출판
2005년 5월 2일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