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난 후 고3 교실.
해방감과 불안함이 공존하며 어수선하게 떠들던 아이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브라운관 앞으로 모여든다.
영화의 도입부..심각한 분위기의 배경음악,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겠다는 주인공의 나래이션.
극 속의 분위기는 여타의 스릴러 영화와 다를 바 없이 비장함 속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라기엔 너무도 평범하게 생긴 주인공과, 그런 그에게 감명받고 눈물을 쏟아버리는 여배우의 과장된 연기는 진지한 분위기와 맞물려 아이러니면서도 황당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영화의 종반부..인물 간의 갈등관계는 극으로 치닫고 영화를 보던 아이들도 진중하게 극의 전개에 집중하고 있다. 서서히 드러나는 사건의 전말,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
아이들은 한동안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화면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워 한다. 마치 미지의 존재를 눈앞에 마주한 것처럼..
이것이 저와 '지구를 지켜라'라는 영화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죠.
그 당시엔 단순히 영화의 분위기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결말에 압도되기도 했고, 영화 소재 활용과 개그코드의 신선함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후에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면 볼 수록 '이 영화는 참 진국이구나'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우선, 극의 몰입도가 굉장합니다. 보통 여러 장르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영화는 자칫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영화가 되기 쉬운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여러가지 영화적 실험을 하는 B급 영화에서라면 이러한 단점이 더 쉽게 노출되기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는 B급 영화의 정서를 잘 살리면서도 스릴러, SF, 블랙코미디 등의 장르가 서로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내용에 잘 녹아 들어있습니다.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적절한 긴장감이 형성되며 끝까지 관객들이 극에 빠져들 수 있게 합니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이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입니다. 저만의 기준일 수 있겠지만 '지구를 지켜라'에 나타나는 연기는 크게 두 분류로 나뉩니다.
영화 연기에 맞는 편안한 톤으로 대사를 소화하는 주변 역할과 과장된 연극 톤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나 배우 백윤식씨의 연기는 영화를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가 연기한 인물인 강사장의 감정선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백윤식씨(극 중 강사장 역)가 신하균씨(극 중 병구 역)의 비참했던 과거 기록을 보며 비애감, 좌절감, 분노 등을 한꺼번에 표현한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필요 이상의 감정 과잉이다 라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 또한 영화를 보는 묘미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주변 역할을 맡은 영화의 조연들은 비교적 담담한 연기를 선보입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감정과잉을 중화시켜주는 장치이며 중심 인물들이 극에서 더욱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상반된 연출이 자칫 어둡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시켜 주기도 하며, 관객들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극대화 시켜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지구를 지켜라'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모든 부분에서 강자와 약자로 구분되고 서로 대립합니다. 사장과 노동자, 상사와 부하직원, 선생님과 학생, 힘 센 친구와 약한 친구, 불량 깡패와 피해입는 소시민 등.
힘의 논리에 의한 상하 관계는 주인공을 억압하고 옥죄어 옵니다. 주인공이 반기를 들면 사회는 그를 미친 사람, 범죄자로 만들어 버리죠.
영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이 미친 것인지, 강자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이 미친 것인지, 그냥 세상이 미친 것인지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념적으로는 평등한 사회라고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불평등이 만연한, 야생과 같은 약육강식의 사회. 잔인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이 영화에서 묻어 나옵니다.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내려온 인간 본성의 잔인함과 승자 독식의 고리가 미래에도 이어질 것인지 영화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어찌보면 성선설과 성악설, 인간의 본질에 관한 깊은 고찰 등이 이 영화의 큰 맥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감독은 이러한 고민에 대한 답을 관객에게 던져주고 영화를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그 답안지마저 관객에게는 질문으로 되돌아 옵니다. "난 이렇게 끝맺음 했어. 그런데 너희들의 생각은 어때?" 이런 식으로 말이죠.
재밌는건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제가 생각한 답이 감독의 의견과 비슷하게 변해 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나 보실 분들이라면 감독이 던진 질문에 시간을 두고 각자의 답을 찾아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구를 지켜라'는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실패 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 때문인지 장준환 감독은 한동안 작품연출을 하지 못했죠ㅜ)
단순한 코미디 영화로 홍보해버린 제작사의 잘못도 있겠지만 당시엔 비일반적인 B급 코드란 것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겐 익숙치 않았기에 관객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는 뒤늦게 작품성을 인정 받았고 빛을 보지 못한 비운의 명작, 저주받은 걸작이란 수식어를 갖게 되었죠.
지금 생각하면 고3 당시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구를 지켜라'는 제가 꼽은 한국 최고 영화 중에 하나로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죠.
제 멋대로 식의 영화 소개였지만, 루시아님께서 잘 읽어 주셨겠죠?ㅎㅎ 긴 글 읽어주시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청곡은 '지구를 지켜라' OST였던 Linda Eder의 Over the rainbow 신청합니다.
첫댓글 이영화 굉장히 명작이라고 들었어요 ㅠㅠ 홍보가 잘안되서 너무 안타까운 영화라구, 저도 꼭 챙겨보겠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