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진리에 대한 세 가지 근원의 물음이 있다. 첫째, 진리는 있는가? 둘째,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있는가? 셋째, 인간이 진리를 언어로 나타낼 수 있는가? 정답을 말하면 진리는 있다. 인간은 진리를 파악할 수 있고 진리를 언어로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다. 진리를 믿어도 된다.
진리는 없고, 있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언어로 나타낼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으므로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회의주의자다. 틀렸다. 알 수 없거나 전달할 수 없는 것은 오염된 것이다. 오염된 것은 존재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다.
진리는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해도 변화의 자궁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의 메커니즘은 변하지 않는다. 불변에 의지하여 변화의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 문제는 환경의 간섭에 의해 발생하는 노이즈다. 중복과 혼잡을 일으켜 복잡성 문제를 만든다.
진리와 회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절대와 상대, 안과 밖, 연결과 단절, 공과 사, 머리와 꼬리는 에너지 경로를 보는 방식이다. 절대를 보고, 안을 보고, 연결을 보고, 공을 보고, 머리를 보면 믿을 수 있다. 의지할 수 있다. 반대쪽을 보면 혼란해진다. 내부의 구조를 봐야 한다.
변화
진리를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변화를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변화가 없다면 인간이 객체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식은 객체에 작용을 가하여 되돌아온 반작용을 해석하는 것이다. 작용의 부름에 반작용으로 응답하면 그것이 곧 변화다. 그러므로 진리는 의심할 수 없다.
변화는 공유에서 사유로 이행한다. 사유의 상대성은 의심할 수 있으나 공유의 절대성은 의심할 수 없다.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나를 의심할 수 있고 부모도 의심할 수 있으나 둘의 연결은 의심할 수 없다. 내가 있으면 부모도 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공유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의심하게 되는 이유는 플라톤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메타영역에 속하는 추상개념인데 구체적인 사실인 것처럼 말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다. 영화의 필름은 원본이고 스크린에 비쳐진 상은 복제본이다. 이데아는 원본을 가리킨다. 원본은 불변하나 복제본은 변한다.
복제본을 의심할 수 있으나 원본은 의심할 수 없다. 스크린은 사유하고 필름은 공유한다. 사유를 의심할 수 있으나 공유는 의심할 수 없다. 원본과 복제본, 공유와 사유, 절대성과 상대성을 헷갈리는 것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이지 진리의 잘못이 아니다. 플라톤이 잘못했다.
연결
진리는 만유의 연결되어 있음이다. 존재하는 것은 인식되고, 인식되는 것은 반응하고, 반응하는 것은 변화하고, 변화하는 것은 에너지가 전달되고, 에너지가 전달되면 연결된다. 단절되면 에너지를 전달할 수 없어 변화할 수 없고 변화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으므로 알 수도 없다.
연결과 단절은 안과 밖의 차이다. 변화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한 가지 형태로만 일어나므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 전에는 안이었다는 의미다. 안은 공유되므로 의심할 수 없다. 안은 직결되므로 의심할 수 없다. 물리적으로 직접 연결된 것은 즉각 반응하므로 의심할 수 없다.
모든 변화는 안을 밖으로 바꾼다. 밖은 단절되므로 의심되고 안은 직결되므로 의심되지 않는다.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연결과 단절 중에서 단절만 보고 연결까지 부정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진리는 도道다. 집은 사유되고 길은 공유된다. 사유는 의심되나 공유는 의심할 수 없다.
변화의 판단 기준이 중요하다. 변화는 안에서 일어난다.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 기준이다. 문제는 인간이 안을 보지 못할 때다. 자궁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것은 인간의 방법론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밖에서 떠들지 말고 안을 보면 된다. 안에는 구조가 있다.
언어
엄밀한 의미에서 진리와 딱 들어맞는 영어 어휘는 없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진리는 전제를 가리키는데 truth는 진술을 가리킨다. truth는 대개 어떤 둘의 일치 여부를 묻는 것이다. 둘은 모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므로 원본이 아니라 복제본이다.
1 미터의 길이를 가진 물체가 진짜 1 미터가 맞는가는 진리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진리는 1 미터의 개념을 인류가 어떻게 약속했는가다. 약속은 공유되며 공유되는 것이 원본이다. 계량하여 얻은 숫자는 복제본이다. 복제본의 오차는 진리의 오류가 아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잘못 해석하는 바람에 진리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 truth는 진리가 아니라 진짜에 가깝다. 이는 언어학의 잘못이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를 주는 메타영역과 에너지를 받는 사적영역을 가진다. 형이상학은 공유되는 메타영역을 보는 것이다.
집이 있으면 길이 있다. 길이 집에 앞선다. 동물은 집이 없지만 다니는 길은 있다. 형이상학은 만유가 공유하는 길을 보는 것이다. 길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이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에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주는 커다란 움직임이다.
구조
전부 연결되어 있다. 연결의 방법은 다섯가지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변화의 다음 단계를 내다볼 수 있다. 붙은 것은 떨어진다. 안에 있는 것은 밖으로 나간다. 에너지의 방향은 <- . ->의 확산방향이다. 쏜 화살은 날아간다. 그것이 존재의 본래 모습이다.
우리는 거꾸로 알고 있다. 떨어진 것이 붙는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진작에 우주는 다 들러붙어서 떡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밖의 것이 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가운데로 모인다고 생각한다. 그럴 리가 없다. 모아야 모이지 저절로 모이지 않는다.
존재는 변화다. 변화는 방향전환이다. 안은 연결이고 밖은 단절이다. 의사결정은 안에서 일어난다. 안은 중첩되고, 중첩되면 공유하고, 공유하면 효율적이고, 효율을 에너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밖은 단절되어 에너지가 전달되지 않으므로 방향전환을 못한다.
우주에서 변화의 방향은 안에서 밖으로 가는 하나 뿐이므로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 질에서 양까지, 원인에서 결과까지, 발단에서 결말까지, 4차원에서 0차원까지 사건의 기승전결 전체과정이 전부 한 줄에 꿰어진다.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