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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시인(四家詩人)의 사색담론(四色談論)
이경철
시조를 귀히 여기며 신작 시조와 시조 평도 실어오고 있는 최장수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학》이 4월호에서 시조단은 물론 문단 전체와 독자들에게 귀히 읽힐 기획을 했다. 주간인 정진규 시인과 시조시인 정수자 씨의 기획과 구성으로 많은 지면을 내어 ‘현대시조 사가시인 사색담론’ 특집을 꾸몄다.
이 기획특집에는 윤금초, 박시교, 이우걸, 유재영 시인의 자선 대표시와 신작시 그리고 이 네 시인의 시조에 대한 담론을 방담 형식으로 실었다. 우리 시조단을 대표하는 4인4색의 작품들을 보며 오늘의 우리 시조 수준을 경제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 40여 년을 오로지 시조창작에만 몰두하며 얻어낸 체험적 시조관을 진솔하게 개진하고 있어 정형시로서 시조의 특장과 문제점, 정형 확장의 한계와 고수의 애로점 등 현재 시조단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속 시원히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지면이다.
올 초 시조 사화집으로 《네 사람의 노래》(문학과지성사)를 펴낸 네 시인은 1970년 전후로 등단해 40여 년을 시조의 현대화와 저변확대를 위한 창작과 운동에 힘을 같이해 온 ‘시조단의 사총사’. 1970년대 후반부터 ‘오늘의 시조학회’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기성 시조단의 판에 박힌 정형의 구각(舊殼), 음풍농월과 안빈낙도의 나태에 반성을 가하며 시조가 오늘의 시로 떳떳이 서게 한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1983년 같은 출판사에서 사화집 《네 사람의 얼굴》을 펴내며 시조단의 ‘야당’으로 떠올라 기성 시조단의 박해도 참 많이 받아왔다. 그러나 30년 후 《네 사람의 노래》를 펴낸 오늘의 시점에서는 명실공히 시조단의 여당, 주류이고 각각 많은 후배, 제자들이 모여드는 일가를 이루고 있다.
해방을 전후해 태어난 이 네 사람은 또 한글 1세대 시조시인으로 꼽힐 수 있다. 시, 소설 등 다른 장르 한글 1세대 작가들은 구한말이나 일제하에서 교육받은 선배 작가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정식으로 한글교육을 받아 우리 언어와 문체를 가꿨다는 명분으로 선배 세대들을 밀어낸 감도 없지 않다. 서양 문학이론 수입에 급급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언어와 문체가 순 우리 것이 아니라 서양 번역투의 그것이란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이에 비해 위 네 시인은 시조가 민족 전통의 정형시임을 십분 살리기 위해 우리말의 보법과 운율, 우리 언어의 소리와 의미의 무늬를 갈고 다듬는 데 힘써온, 순정한 한글 1세대 시인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한글 1세대 시인으로 민족 전통의 정형시인 시조를 오늘의 시로 다시 태어나게 해 이제는 되레 자유시단에 현대시의 모범을 보여주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사색담론’이란 특집 제목처럼 네 명의 시조관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정형 확장이냐, 정형 고수냐로 한껏 달아오르고 있는 현 시조단에 이 ‘사가시인(四家詩人)’의 시조관은 그야말로 ‘담론(discourse)’이 되어 논란의 가지를 치며 일파만파 번져나갈 것이기에 주요한 부분을 되짚어본다.
전통 정형시로서 현대시의 모범을 위한 관건은?
민족 정형시로서 그 정형의 룰은 어느 정도 지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 윤금초 시인은 현대시조의 지평 확대를 위해 끝없는 형식의 실험을 강조했다. “우리 시조가 외형률의 제약을 받는 닫혀 있는 문학 양식이 아닌, 내재율을 중시하는 열린 시가(詩歌), 열린 문학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정형률이기 이전에 인간율이기에 그것을 부리는 이의 성정에 따라 얼마든지 개성적인 형식을 재창조할 수 있다”며 윤 시인은 ‘옴니버스시조’ 등 새로운 형식의 시조를 선보여 오고 있다. 이에 대해 박시교 시인은 “시조의 본령인 단시조 창작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며 형식 실험이니 지평 확장이니 하는 말을 일축해버렸다. 시조와 자유시를 뚜렷이 변별하는 “정제된 광채의 압운이나 활시위 같은 긴장미 등 시조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 분명 있다”며 시조의 룰, 본연을 의연히 지킬 것을 주장했다.
이우걸 시인은 이 어지러운 시대에 정형시를 쓴다는 자체가 실험이고 도전이라며 “그 형식의 준수가 가져다주는 운율감과 긴장감을 포기한다면 굳이 이 시대에 시조를 쓸 이유가 없다”고 했다. 사각의 링 안에서 글러브를 끼고 룰을 지키며 싸우는 복싱에 빗대, 시조도 최소한의 형식인 “3장 6구 12음보, 종장 앞 구 첫 음보 3자, 그다음의 대음보, 이 정도 룰은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재영 시인은 시조의 정형을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공식이 아니라 천 년의 세월을 두고 만들어진 우리 언어의 운명적 형식”으로 봤다. “다소의 파격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면서도 “정형을 안 지키면 자유시가 될지 몰라도 시조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윤금초 시인이 정형의 확산을 적극 주장하며 그런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반면 다른 세 시인은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라며 정형을 벗어날 때 시조는 현대시의 한 장르로 존립할 수 없다는 쪽이다. 그렇다면 지난 과거의 장르가 아니라 현대시의 한 장르로 떳떳이 살아남게 하려는 현대시조의 전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윤금초 시인은 시조라는 명칭에 ‘시’ 자가 글 ‘詩’ 자가 아닌 때 ‘時’ 자를 쓴 것에 유의하며 “시조는 당대의 정서, 당대의 시대상황을 담아내는 문학양식”임을 환기시켰다. 때문에 시조는 그 명칭 자체에 당대성, 현대성을 담보하는 장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현대시로 시조가 살아남는 최선의 방법으로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해 박시교 시인은 “굳이 시가 외형상으로 길어지고 내용이 난삽하거나 줄글 형태가 되어야 할 이유는 절대 없다”고 했다. 현대사회가 복잡다기할수록 “형식은 더 간명하고 내용 또한 더 구체성을 띨 때 그 효용성과 위의가 더 돋보이는 것이 아닐는지 묻고 싶다”며 현대화를 명분으로 한 시조의 새로운 형식 실험을 경계했다.
이우걸 시인은 “이 어지러운 시대에 시조가 지닌 고전미학의 현대적 변용은 충분히 새로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시조 장르의 전통인 단정한 형식, 절제된 언어, 율격적 언어 등을 활용하여 현대세계를 시적으로 치열하게 형상화한다면 전통서정에 대한 갈망을 무의식중에 적지 않게 품고 있는 이 시대 한국의 독자들에게 충분한 미적 보상으로 다가설 수 있다”고 했다.
유재영 시인은 “시조가 현대성을 담보해낼 형식상 장애는 그리 크지 않다”고 봤다. 그러면서 유 시인은 자유시와 비교하며 “시조의 운율적 규율이 ‘현재성’을 표현하는 데는 다소 장애가 될 수 있지만 반면 자유시에는 없는 생태적으로 ‘노래’라는 육체를 지니고 있다”며 운율의 현대화를 강조했다. “시조가 지닌 고도의 압축과 긴장, 절제된 언어의 미학은 한국시의 새로운 반성적 토대로 존재할 것”이란 유 시인의 시조에 대한 전망이 장르의 본령에 충실한 것이 곧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시조의 현대화임을 일깨우고 있다.
이렇듯 4인4색의 시조관을 피력하고 있는 우리 시대 4대가 시인들의 시조작품 현황은 어떠한가. 같은 지면에 실린 신작시들을 그들이 피력한 시조관을 참조하며 감상하고 들여다본다.
윤금초, 입신지경의 정형율과 형식실험의 아방가르드
발묵 스릇 번져나는 해질 무렵 평사낙안
시계 밖을 가로지른 큰기러기 어린진이
빈 강에 제 몸피만큼 갈필 긋고 날아간다.
허공은 아무래도 쥐수염 붓 관념산수다.
색 바랜 햇무리는 선염법을 기다리고
어머나! 뉘 오목가슴 마냥 젖네, 농담으로.
곡필 아닌 직필로나 허허벌판 헤매 돌다
홀연 머문 자리에도 깃털 뽑아 먹물 적시고
서늘한 붓끝 세운다, 죽지 펼친 저 골법(骨法).
―윤금초 〈큰기러기 필법(筆法)〉 전문
시 밑에 딸린 각주에 따르면 큰기러기 떼는 공중을 날 때 우두머리가 앞장서서 사람 인(人) 자 모양의 어린진을 친다. 잠시 머물다 간 자리에는 깃털을 뽑아 떨어뜨려 두는 습성이 있다며 윤 시인은 그것을 제 다녀간 흔적을 남겨 두는 유묵(遺墨) 같다고 했다.
이런 각주와 함께 다시 보니 위 시 자체가 안행(雁行)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유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조의 정형에 충실하면서도 능수능란하게 율격을 가다듬으며 펼치는 “죽지 펼친 저 골법”의 허허 장쾌함이 우리 시조단의 리더임을 십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시이다.
세 수로 이뤄진 이 연시조는 우선 장 나눔이나 수 나눔에서 시조의 정통적 형태에 충실하다. 자수율이나 음보율도 어긋남이 없다. 그러면서도 둘째 수 종장 “어머나! 뉘 오목가슴 마냥 젖네, 농담으로”에서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우리말의 어감과 운율이 ‘뉘 오목가슴’은 물론 삼라만상 가슴 다 적시니, 가위 ‘신율(神律)’이다.
무엇보다 중언부언하며 까닭이나 구성 없이 길이만 늘이고 있는 잘못된 연시조에 비해 이 시조 세 수는 각각 정격에 맞춰 잘 짜인 단수의 초장, 중장, 종장에 맞먹는 구성력을 갖추고 있다. 첫 수는 기러기가 나는 풍경을 펼치고 있으며 가운데 수는 그런 풍경에서 우러난 시인의 정(情)과 의(意)를 펼치고 있다. 그러다 마지막 수에서는 그런 경(景)과 정과 의를 통째로 싸안아 버리는 ‘저 골법’의 서늘한 붓끝을 보시라. 대가다운 솜씨와 기상 아닌가.
윤금초 시인은 담론에서 후배 시인들에게 이렇게 먼저 율격의 엄격한 준수를 당부했다. 시조의 정형을 단단히 다진 연후에라야 ‘개성적인 형식의 재창조’가 가능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런 정형을 지키며 입신의 지경에 이른 이 시와 함께 개성적 형식 재창조의 모범으로 보라는 양 다른 한 편도 발표했다.
“뭔놈의 눈이 이리 징상스런지 모르것다.// 아따 올해도 징하게도 춥고 맨날 매칠 송신나게도 눈이 온다야. 그래도 아그들이 집안 단도리를 잘해주어서 따땃하게 지내고 있다. (중략) 안직은 몸이 갠찬응께 내 꺽정일랑 죄 내려 놓아라. 으짜든 몸 성해라. 몸 성해.// 아 금매, 낼 모래가 설인디 떡국이나 끌여먹을지 모르것다.”
‘정찬열의 〈어머니의 편지〉 패러디’라고 각주에 밝힌 시 〈고맙고 아심찬하다〉 부분이다. 중장이 빼곡한 한 페이지 정도로 늘어난 사설시조이다. 향리의 어머니가 이국에 나가 사는 아들에게 주저리주저리 구어투로 써 보낸 편지를 그대로 베낀 것 같이 지은 이 시에서는 우리 향토말의 운율과 맛깔스러움, 그리고 사투리 자체의 활력과 해학을 느낄 수 있다. 그밖에 시의 미학이나 깊이, 풍격 등은 어찌 논해볼 여지가 없는 듯하다.
윤 시인은 담론을 통해 평시조, 엇시조, 양장시조, 사설시조와 함께 혼합연행인 ‘옴니버스시조’라는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청준, 이문구 등 다른 문인의 작품을 두루 읽으며 영감을 얻어 패러디한 작품도 발표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자신의 시 작업을 윤 시인은 “영감이 고갈되었다고 팔짱만 끼고 있는 문인들, 감각에 의탁해 당의정 같은 시조문학을 경영하려 드는 일부 시인들과 달리 시조의 양식적 개방성을 이끌어 내고 현대시의 주요 인자인 구체성이나 일상성을 추구하기 위해 새로운 글감을 찾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우물파기 작업”이라 자평했다.
그래, 외롭고 고통스러운 작업일 것이다. 윤 시인의 옴니버스 시조나 패러디 시조에 대해 ‘이제 그 짓 좀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후배나 제자 시인들의 푸념을 나 또한 심심찮게 듣고 있으니.
박시교 시인도 이번 담론에서 시조의 ‘반미학(反美學)의 미학화’ 시작품에 대해 “연구 대상의 소재를 위한 난해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시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윤 시인의 시 작업을 딱히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시도 우리 삶의 분명한 소산일진대 그 가슴 저린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팽개치고 있으니.
이렇듯 윤 시인이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창출하고 있는 옴니버스나 패러디 시조는 많은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그러나 현역 시인이 2천 명을 헤아릴 정도로 저변이 확대되고 풍성해진 시조단이기에 이러한 실험도 가능하고 필요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 작업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전위(前衛)를 맡고 있는 것일 게다. 미천한 우리 자유시의 현대화를 위해 김춘수 시인이 무의미시까지 실험을 밀어붙이며 스스로 소통 불능의 무의미 지옥에 그 좋던 자신의 시와 온몸을 내던지고 갔듯이.
박시교, 현대시 절창을 압도하는 시조의 진경
쓸쓸한 공복처럼 지금 막 헤어진 사람 돌아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뒷모습처럼
날마다 느끼는 이 참담이 성에 낀 고름이다
대답이 없을 줄 알면서도 버릇처럼 묻고 무작정 누군가를 기다리는 해질녘 공허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유서처럼 서늘하다
그냥 스쳐가는 바람이거니 하면서도 옷깃을 여미는 날이 부쩍 더 잦아지고
넋 놓고 건너는 하루 그 세월이 끝없다
―박시교 〈일상의 공복〉 전문
이 지면을 아끼려 각 행 사이 한 행의 공백을 없애고 베꼈다가, 아니다 싶어 원문처럼 다시 공백을 줬다. 자유시에 비해 비교적 짧은 시조의 길이를 보기 좋게 편집하기 위해, 혹은 일부 덜떨어진 시인들이 까닭도 없이 멋 부리기 위해 시조 행간을 연 나누듯이 하는 버릇이 있어 옮길 때는 한 행의 공백을 무시해왔다. 하지만 위 시에서 공백은 충분한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
이 시도 세 수로 이뤄진 연시조이다. 각 수에서 공히 초장, 중장이 한 행 한 연을 이루고 종장이 독립돼 또 한 행 한 연을 이루고 있다. 초장, 중장에서는 시조의 시상 전개에 맞게 정경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한 행 공백을 둬 그리움이나 인생의 의미를 한참 생각게 한 후에 종장에서 그 정경의 정과 의미를 온몸으로 싸안는다. 연으로 독립된 종장에서는 종장 특유의 정형과 구성을 엄격히 지키면서도 초장, 중장에서는 음보율에는 충실하되 음수율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해 한 행으로 자연스레 엮이게 했다. 형태상으로는 초장, 중장의 긴 행과 운율로 산문시처럼 읽히게도 하고 여백과 장단이 있는 6행 6연의 모던한 형태의 자유시처럼 보이게도 한다.
실제 이 시조는 각 행과 행간에 내포된 서정 또한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이나 박용래 시인의 〈고향〉 같은 자유시 절창처럼 모던하면서도 시리고 아프고 가슴 미어지게 한다. 시조의 정형률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이 시는 또 산문시의 운율에 통달해 음과 양을 자유자재로 교접시키며 우주의 운율을 낳고 있는 정진규 시인의 〈율려시집〉 운율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렇듯 이 시조는 자유시나 산문시 절창들과 비교해도 형태, 현대성, 내밀한 서정성은 물론 시조 특장인 운율과 긴장감과 종결감 있는 구성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는 현대시조의 진경(珍景)을 보여주고 있다.
박 시인은 담론에서 “단순한 형식의 시조시인으로서 복합성, 복합미학의 시대에 대응하는 방식”을 묻는 말을 우문(愚問)으로 치부해버렸다. 시조가 왜 단순한 형식이냐며. 또 복합미학 수용이란 점에서도 “자유시에서는 가능한데 시조는 어려울 것이란 발상도 위험천만한 잘못된 선입견”이라고 지적했다. 온갖 형상이며 넓고 깊고 복잡다단한 심사 다 담아 펴낼 수 있는 시조에 믿음을 갖고 정형을 고수하며 현대시로서 시조의 자긍을 작품으로 대변하고 있는 시인이 박 시인이다.
이우걸, 틀을 고수하며 구각을 깨는 다층적 울림
내 하루의 징검돌 같은
밥 한 그릇 여기 있다
내 하루의 노둣돌 같은 밥 한 그릇 여기 있다
내 한의 얼레줄 같은 밥 한 그릇 여기 있다.
네가 주인이라서 섬기며 살아왔다
네가 목숨이라서 가꾸며 살아왔다
그 세월 지난 듯도 한데 왜 아직도 배가 고프니?
―이우걸 〈밥〉 전문
두 수로 이뤄진 연시조이면서 형태나 운율 면에서 시조의 고답적인 틀을 깨뜨려 자유시처럼 읽히게 한 점이 돋보인다. 두 수, 총 여섯 장 중 다섯 장을 한 행으로 처리하면서 맨 앞 첫 수 초장만 두 음보씩 나눠 두 행으로 처리해 형태에 변형을 준 시이다.
“밥 한 그릇 여기 있다”는 첫 수 초장 후반부를 별행으로 처리한 것은 우선 형태 면에서 각 장을 공히 한 행으로 처리한다면 고답적인 형태 답습을 저어해 새롭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동시에 지금 이곳에 놓인 밥 한 그릇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보라, 첫 수에서 이 구절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생에서 밥의 의미를 점점 심화시켜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시 전체가 반복에 의해 전개되며 그 반복에서 나오는 운율은 시조 정형에서 울려나오는 답답함을 깨뜨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지 않은가.
이 시인은 앞서 담론에서 밝힌 시조의 룰을 지키면서 이 시에서와 같이 반복에 의한 운율과 시상 전개, 그리고 행 나눔의 형태로 정형의 답답함을 깨고 있는 것이다. 일부 덜 익은 시인들이 까닭도 없이 과감한 행과 연 나눔으로 형태상 자유시로 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시에서는 운율과 의미와 시상 전개의 필연에 의해, 각 층위가 서로서로 협동하며 자연스레 형태에 변형을 주고 있다.
“시조의 오랜 전통의 룰이 지나치게 주형화(鑄型化)되면 창의성 함양에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이 시인은 “최소한의 룰 안에서 새롭게 구성하고 개인적인 체험이 극적으로 담겨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노력이 이 시같이 시의 전 층위가 서로 협동하며 새로운 운율과 이미지를 얻으며 지금 이곳의 밥 한 그릇의 의미를 구체성을 띠게 하고 또 가없이 확산, 심화되게 하고 있다.
목숨 같은 밥이어서 그걸 얻기 위해 하인 같이 섬기며 살아온 한 생애를 현실적이면서 서정적으로 읊으며 다층적인 울림을 주고 있다. 이제 배고픈 시절, 게걸스런 젊음은 지난 듯한데도 “내 한의 얼레줄 같은 밥 한 그릇”이 아직도 내 앞에 있기에 배가 고프다는 시인. 시조에 대한 이런 게걸스런 열정이 자유시에 손색이 없는, 아니 자유시를 능가하는 현대시조의 위의를 드러내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지난 2월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에 당선돼 시조단을 이끌게 한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유재영, 정형과 율격 자체가 민족 정한의 미학
아버지 모시면서 그해 봄도 함께 묻어
해마다 이맘때면 뻐꾸기로 우는 봉분
옆자리 우리 어머니 함께 듣고 계실까
저승도 보인다는 오동꽃 환한 날엔
눈에 익은 행서체로 나직이 휘어지는
그 말씀 무릎을 꿇고 잔처럼 받습니다
―유재영 〈뻐꾸기로 우는 봉분〉 전문
두 수로 이뤄진 이 연시조는 앞뒤 수는 연 갈음으로 나누고 각 장은 행 갈음으로 나눠 누가 보더라도 시조의 정통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음보율은 물론이고 글자 수 또한 시조 정형에 맞춰 또박또박 시조 짓기를 하는 학생처럼 정확하다.
정형의 이런 안정된 틀 안에는 또 우리 민족에게 익숙한 언어와 소재와 정한이 담겨 있다. 앞 수의 의문형 종결과 뒤 수의 경어체 종결로 정형의 구각을 깨뜨리며 오늘의 일상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무겁지 않고 환하고 밝게 민족의 정한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우주 삼라만상이 함께 어우러지게 하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봄’ ‘뻐꾸기’ ‘봉분’ ‘오동꽃’ 등이 ‘환한 날’에 시인의 온몸과 혼의 공감각으로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이승 저승의 시공간까지 차별 없이 어우러지는 우리 전통 서정의 진경을 자연스레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우리 시가 상징과 이미지의 혼돈과 난삽한 표현이 도식화되고 있을 때 시조는 정형 율격을 묵수(墨守)하면서 우리말의 운문적 미학에 말없이 노력해왔다”고 유 시인은 밝혔다. 해서 “시조의 섬세한 정형의 율격은 최근 우리 시단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극서정시의 논리와 더불어 완성도 높은 미학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시조에서 우리 시가 찾아가야 할 미래와 자유시에서 찾지 못한 언어의 진경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위 담론의 결론에 맞춤한 말을 했다.
나 또한 시조 장르 자체에 대한 그런 믿음과 전망을 확신한다. 우리 시조단을 이끌고 있는 이 4대가의 신작시 수준이 이런 확신을 확실히 담보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도 변함없는 우정과 젊음을 지키며 4인4색의 다채로운 작품과 목소리로 우리 시조단을 더 깊고 풍성하게 이끄시길 빈다.
-발췌: 격월간《유심》2012년 5,6월호
이경철 | 문학평론가·시인. 동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 《문예중앙》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과 산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 등과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 등다수가 있다.
현재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