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가 만난 문인들-29
우당 김지향 시인
김 송 배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에서 안동으로 문학기행을 가는 길에 동참하고 버스에 올랐더니 우당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이 옆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오래간만의 만남이다. 우리는 안동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담론을 교환했다.
그를 처음만난 것은 1980년대 초 국제펜 서울대회(회장 전숙희)에서 박현령, 함혜련 시인들(나는 그후에 이들이 ‘여류시’동인들이라는 것을 알았다)과 함께한 어떤 자리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그 후에는 예총회관으로 문협을 방문하면서 나의 사무실에 들려서 차 한 잔 나누면서 문단의 흐름에 대한 정보를 들려주곤 했다.
그는 문협과 한국시협 그리고 펜 행사에서 자주 뵙게 되었는데 어느 날은 시집『위험한 꿈놀이』를 들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내가 편집하는『예술세계』에 서평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돌아갔다. 나는 서평을 잘 쓸줄 모르니 유명한 평론가에게서 글을 받아오면 게재는 하겠다고 했지만 직접 내가 써달라는 것이었다.
실제이거나 연상이거나 간에 ‘지~구~종~말’이라는 다급하고 매우 긴박한 위기상황은 ‘피도 말라붙은 진짜 ㄲ . ㅜ . ㅁ이었다’라고 상황을 해제하는 결론에 이르면서 참으로 현실에서는 ‘위험한 꿈놀이’였음을 실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에 우롱당한」이란 시편에서 더욱 절실하게 전개되는데 ‘하늘 전체가 불바다인 바로 그때, 불덩이가 내 어깨에 뚝, 떨어졌다. 아, 불! 이러지마, 사람 살 려...., 반쯤 타버린 내 육체가 팔다리를 저으며 허우적일 그때, 나는 꿈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제발 꿈이길!)’이라고 절규의 어조로 시적상황을 전개하고 해제하는 반복적인 내면의식은 바로 ‘꿈’이 내포하는 어떤 사회현상에서 발현될 수 있는 우리들의 고뇌이며 갈등이다.
이와 같이 그의 시집에 대한 둑후감을 ‘절재절망과 창조적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1996년 10월호『예술세계』에 서평으로 게재했다. 그의 시창작 40년에 19권째의 시집에서는 대체로 절망과 사랑에 대한 승화의식이 간절하면서도 담담한 철학과 신앙이 숙성되어 있었다.
그는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하고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서 정착하여 성장하여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그리고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57년에 세계일보에 「별」로 정식 문단에 데뷔를 했으나 훨씬 그전인 1954년 태극신문에「시인 R에게」「조락의 계절」을 발표한 바 있으며 1957년에는 예술시보에 「산장에서」를 발표한 바가 있다. 그가 박남수 시인이 편집인으로 있던『문학예술』에 응모를 하고 당선작으로 조판까지 했으나 학교 선배가 가져간 원고뭉치가 몇 년후에 『병실』이라 이름한 시집(김용호 시인이 서문을 씀)을 들고 나타났으나 이미 『예술세계』에 추천작으로 조판된 작품 3편은 취소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을 두고 불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첫 시집 출판기념회에는 송지영, 양주동, 공초 오상순, 김용호, 양명문, 이영순, 정태용, 서정주, 조병화, 전봉건, 김관식, 박남수, 김요섭 등 장안의 대시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축하를 해주었고 서평도 써서 인간지에 실어 주었으니 당연히 시집은 잘 팔리고 있었다.
그는 김송희 시인이 근무하는 『여상』사무실에 강계순, 김송희, 김지향, 김하림, 박덕매, 박명성, 박정숙, 박정희, 박현령, 신동춘, 최선령, 함혜련 등이 모여서 <여류시(女流詩 )> 동인이 탄생하고 이어서 ‘한국여류문학인회’가 결성되어 그 실행위원으로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창작활동에도 여념이 없이 몰두하여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대역시집「A HUR IN A GROVE」,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그리고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낸 바 있다.
시간은 부르지 않아도 달려온다//달려와서 낡은 잡기장 한 페이지 부욱, 찢어낸다/흘린 부스러기들은 열린 서랍 속에 밀어 넣는다//여름 시체를 담은 서랍들이/화장터에 쌓인다//푸르렀던 시절을 가슴에 넣은/가을은 시체들을 화장한다//세상 납골당엔 빨간 불꽃들이 앉아있다/화약 냄새를 안고//시간은 또 어디로 가고 있다(「가을, 화약 냄새」 전문)-[김송배]
시간을 긍정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성찰에서 명징해진다. '푸르렀던 시절'과 '빨간 불꽃'의 대칭은 삶의 궤적을 통한 과거, 현재의 시간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름 시체를' '가을'이 '화장'하는 '세상 납골당'은 김지향 시인이 탐색하는 시간의 의미를 더욱 내밀화하고 있어서 공감의 영역은 확산된다. 어쩌면 시간의 오고감을 존재의 허무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낡은 잡기장 한 페이지' 찢어내는 자연 섭리의 순응이며 시간과 인간의 화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김지향 시인이 지향하는 지순의 관조 미학이며 그의 시적 진실이다.
나는 그의 등단50년 기념문집「우당 김지향의 시세계」에 위와 같이 시 한 편의 소감을 보내서 축하하고 그의 시업(詩業)을 기린 바 있다. 그는 일찍이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로서 후학의 양성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문협과 펜클럽 이사(현재 자문위원), 한국신시학회 상임위원, 현대시인협회 부회장(현재 지도위원), 한국크리스찬문학가협회 회장, 한국여성문학회 회장(현재 고문),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현재 자문위원),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원, 대한민국기독교예술대상 심사위원장 등 많은 문단활동을 했으며 『시인정신』『창조문예』『조선문학』『창조문학』『크리스천문학』등에 편집위원이나 편집인을 맡아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기독교문학상, 백남학술상, 홍익문학상, 자유시인상, 세계시인상, 한국장로문학상, 빛과 구원의 문학상, 한국크리스천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여 문학적 업적이 빛나고 있다.
한편 그의 시경향은 ‘꿈’에 관한 실험적 형상화가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로 승화하고 있음을 관찰하게 되는데 대체로 살펴보면 시집『위험한 꿈놀이』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집 전체를 차지하고도 / 배가 고픈 비가 / 사방으로 갈기를 뻗어 / 떠내려 오는 비명을 걷어 / 삼키고도 배가 고픈 비가 / 등줄기를 타고 / 바람이 되어 달린다(「봄꿈.1호」에서)’거나 ‘다시는 꿈속으로 가고 싶지 않아(「사람은 왜 꿈을 사랑하는지」에서)’ 혹은 ‘사뿐거리는 / 내 꿈속까지 들리는 / 별의 발자국 소리를 / 듣지 않으려고(「꿈속까지 들리는」에서)’라는 등 ‘꿈’과의 소통을 위한 언어의 마력을 이해하게 된다.
이 밖에도「봄꿈」연작과 「꿈은 너무 힘이 없어」「물이 되는 꿈」「꿈 혹은 풀밭」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미의 도출을 위한 그의 집념을 읽게 한다. 나는 이를 두고 ‘꿈을 통한 진실의 추구나 진정한 자아의 인식 내지 성찰의 도구로서의 형상화’라고 어느 글에서 적시하고 시창작 강의에서 그의 ‘꿈’을 담론으로 교감한 적이 있다.
그는 요즘 근황을 묻는 나에게 신광감리교회 원로 장로로서 교회에 충실하면서 손자와 함께 지낸다고 했다. 항상 인자한 모습으로 후배나 후학들에게 큰 누님같이 클로즈업 되고 있다.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