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외출에 대한 묵상 “흔들리는 도쿄”(봉준호 감독, 2008)
필자가 좋아하고 또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 가운데 “가시나무”란 제목의 노래가 있다. 젊은 세대에게는 미소년 같은 이미지를 가진 조성모의 노래가 더 친숙하게 느껴지고 또 사실 그의 노래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하덕규의 신앙 고백이 담긴 노래이다. 겉보기에는 어느 남녀가 이별 후에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과 외로움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려도, 신앙고백이라는 맥락에서 가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깊은 의미를 읽어볼 수 있다.
가시나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사실 필자가 이 노래를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몇 년 전에 강원도 어느 군부대 교회에서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성경을 묵상하고 있었다. 성경의 핵심을 가장 잘 요약했다고 여겨지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2일간의 오전집회 본문으로 택한 필자는 본문이 워낙 잘 알려진 것이라 성도들이 설교를 식상하게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색다른 설명 방식을 찾아 고심하던 중이었다. 집에 있는 여러 책들을 뒤적거리는 가운데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조성모의 목소리에 실린 ‘가시나무’였다. 마지막 여운을 길게 남기며 사라지는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가사에 이르면서 필자의 마음속으로 과거의 이미지 한 장이 파고들었다. 청년시절 ‘기독인의 삶’, 곧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를 놓고 몸부림쳤던 모습을 담은 것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 필자는 내 안에 있는 나의 욕망, 나의 가치관, 나의 이념과 바람 등에 이끌려 하나님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관심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풍성하게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의 진면목을 음악을 듣는 가운데 불현 듯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성령의 조명이었다. 하나님은 나와 소통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지만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또 심지어는 거부하며 내 안에 갇혀 지내면서 오히려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내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독일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자기 밖의 존재에 의존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폐쇄시키는 모습에서 원죄의 본질을 보았는데, 말하자면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원죄의 흔적에 묻혀 지냈던 것이었다. 대중가요를 통해 필자는 그동안 숙지하고 있었던 말씀의 의미와 생명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다. 대중가요를 통해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영성이 깨워진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의 기쁨이었다. 그 후에 필자는 나로 하여금 폐쇄적인 모습을 벗어버리고 진리와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은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 귀한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 덕분에 필자는 부흥회에서 ‘가시나무’를 매개로 나의 삶을 반성해보게 되었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주어진 많은 은혜들을 성도들과 나눌 수 있었다.
비록 똑같은 정도의 감동은 아니었지만 봉준호 감독이 만든 ‘흔들리는 도쿄’를 통해서 필자는 잠시 동안이나마 다시 한 번 당시의 감격을 곱씹어볼 수 있었다. 마치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영상으로 해석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흔들리는 도쿄’는 세 명의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가운데 하나다. 일본인이 아닌 프랑스와 한국의 감독에 의해 도쿄를 이미지화한 것이라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특히 봉준호 감독의 작품은 도쿄시 전체를 히키코모리로 비유하고 있어서 무엇보다 도쿄 시민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히키코모리란 ‘김씨 표류기’에서 정려원 씨가 분한 역할에서도 등장하는데, 대개 ‘은둔형 외톨리’라고 번역된다. 6개월에서 심하면 10년까지 집안에 틀어박혀 살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흔히 ‘사회부적응자’로 인식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부적응자란 표현은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만 본 것이고,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 볼 때 히키코모리는 인격적인 소통을 단절하고 사는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와 나’라는 인격적인 소통을 피하는 것일 뿐, 전화 혹은 휴대폰이나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 나름대로 사회와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통의 방식 속에서도 그들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 단지 소통의 다름에 있을 뿐이지 사회부적응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
한편, 봉준호 감독이 ‘흔들리는 도쿄’에서 추구했던 것은 사실 히키코모리 자체가 아니었다. 히키코모리를 정의하고 또 그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키코모리들의 여러 특징들을 그 어느 것보다 잘 표현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그 특징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외부, 심지어 가족과도 단절하며 산다. 둘째, 생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소통은 오직 미디어를 통해서만 이뤄진다. 배달문화가 보편화된 일본사회에서 충분히 가능한 삶의 방식이다. 셋째,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 방식은 독서나 TV 혹은 인터넷을 통해서 이뤄진다. 넷째,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지만 그것을 자기 안에 들여놓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며 산다. 이것은 영화 속 10년 동안 집 안에서만 살아가는 한 남자(가가와 데루유키 분)가 보여준 모습들이다. 그는 자신이 결코 밖으로 나가지 않는 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어느 토요일, 여느 때와 같이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 날이다. 배달된 피자를 넘겨받는 순간에 그는 자신이 10년 동안 지켜왔던 규칙을 깨고 배달원과 눈을 마주치게 된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변화의 순간에 지진으로 세상이 흔들린다. 자신이 집안에 쌓아놓은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는 순간이다. 피자 배달원(아오이 유우 분)은 지진의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쓰러진 그녀를 두고 남자는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10년 동안 그에게 익숙해진 소통방식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쓰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자신에게 전혀 생소한 방식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서 접촉을 시도하는데, 자신의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몸에 새겨진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그녀를 깨우게 된다. 정신이 돌아온 후 완벽하게 정리된 남자의 방을 보고 완벽하다고 감탄하는 그녀,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여운을 남기지 않고 그렇게 그 남자 곁을 떠나고 만다. 그녀와의 마주침과 접촉은 그 남자로 하여금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든 사건이다. 고민가운데 무의미한 시간들을 보내던 남자는 다시금 흔들리는 세상을 느낀다. 아직 토요일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규칙을 깨고 피자를 배달시키기 위해 전화를 건다. 그러나 정작 피자를 가지고 온 사람은 그녀가 아닌 피자집 사장이었다. 그 남자는 사장을 통해 그녀 역시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삶을 결정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피자를 배달시키면서 그녀를 만나고자 했던 그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그녀를 다시 만날 기회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용기를 내어 그녀의 주소를 알아낸다. 그것으로 그의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다시 말해서 히키코모리인 자신이 히키코모리인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먼저 나설 수밖에 없는 일이다. 10년 동안의 삶의 방식에 일순간에 변화를 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하는 변화인가! 그래서 그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가운데 하루 밤낮을 꼬박 문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외출하기 위해 꺼낸 운동화에서 곰팡이를 보아야 했지만, 집밖에 나선 그는 숲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집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다. 속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겉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용기를 내어 집밖을 나섰지만 10년만의 외출이라 당황스럽다. 교통수단을 고민해야 했고, 또 방향을 고민해야 했다. 결국 무작정 달리기로 결심하고 그녀가 사는 곳을 향해 달려가면서 그는 도쿄시 전체가 텅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놀라게 된다. 그녀의 집에 도착한 그는 그녀에게 지금 나오지 않으면 평생 나오지 못한다고 외친다. 지진의 순간에 잠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려는 그녀를 만류하면서 그는 그녀의 팔뚝에 새겨져 있는 love 버튼을 누르게 된다.
비록 30분 분량의 단편영화이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무엇보다 히키코모리가 자신의 10년 동안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하는 힘든 결정이었는지를 감독은 10년 동안의 폐쇄적인 삶을 먼저 보여주고, 또한 외출을 결심한 이후에 꼬박 하루 밤낮을 주저하는 그의 모습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집 밖으로 외출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그녀가 자신과 같은 폐쇄적인 삶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녀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접촉이라는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자신이 폐쇄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과 또한 그녀가 히키코모리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인격적인 소통에 기반을 둔 사랑이었다.
바로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서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천국의 삶을 포기하고 이 세상으로 오셨다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새롭게 성찰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가 오신 것을 단순히 ‘성탄’ 혹은 ‘성육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또 큰 고통을 수반하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하는 것 같다. 단순히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헌신적인 순종으로 인한 결과요 우리에게는 큰 은혜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탄생과 더불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단지 십자가의 고통에만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흔들리는 도쿄’에서 히키코모리가 히키코모리를 만나기 위해 10년 동안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천국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성육신 과정에서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아픔과 고통을 마음으로 느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마지막 일주일이 아니라 이미 성육신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기독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이 일을 위해 비록 성육신까지는 아니라 해도 어느 정도 삶의 방식에서 변화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각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반드시 변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바울은 복음의 소통을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삶, 소위 카멜레온적인 실존을 주저하지 않았다(고전9:22-23). 또한 그의 서신서, 특히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교회의 문제들을 대함에 있어서 자신의 확신을 관철시키려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의 확신을 희생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복음의 능력을 믿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생각해보기
아내는 남편과의 소통을 위해, 남편은 아내와의 소통을 위해 각자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겠는가? 형제자매와의 소통,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의 소통을 위해 우리가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nota bene: 소통을 위한 변화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목적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
출처: 기초신학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최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