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븐스는 츠빙글리를 영성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영성주의적이라고도 기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츠빙글리는 영(성령)에 우선권을 두었는데, ‘말씀과 성령’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이사야서 59장 21절(“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나의 말”)에 나와 있는 대로 ‘성령과 말씀’의 순서를 따르는 데서 나타난다. 츠빙글리는 성서의 저자가 성령이시며, 성령은 말씀이나 성례, 혹은 누구의 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분으로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면 말씀을 깨달을 수 없으며 복음으로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성령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의 인성보다는 신성에 대한 강조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구분선 아래에서 츠빙글리의 견해를 자세히 살펴보자.
(전략) 영의 중심적 역할은 츠빙글리 신학을 영성주의적 혹은 성령론적이라고 기술하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츠빙글리의 신학을 영성주의자의 신학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이 보기에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령은 말씀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말씀에 대해 독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츠빙글리의 신학에서 영이 성서적으로 이해되고 있고 삼위일체의 맥락 안에 놓여 있다고 보고, 그의 신학을 성령론적이라고 이해한다. 두 견해 모두 설득력을 지닌다.
츠빙글리가 사용한 영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그가 그 용어를 하나님이란 용어의 동의어로 모호하게 사용한 것이 아니며, 영은 곧 성령으로서, 신약성서에서 성령이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연관지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츠빙글리의 신학은 성령론적이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신학은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성주의적이라고 기술될 수도 있다. 영예 우선권을 부여하기 때문에, 자연히 츠빙글리는 말씀과 성령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성령과 말씀이라고 말하였다. 더욱이 츠빙글리에게는 영과 외적인 수단 사이에는 분명한 대립이 있었다. 이것은 플라톤주의자들이 육체와 영을 대조시키는 것과 연관된다. 하지만 츠빙글리를 영성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영성주의자라는 용어는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프랑크(Sebastian Franck: 로마 가톨릭교에서 루터교로 개종했으나, 결국에는 루터의 견해에서 벗어나 교리적인 신앙 대신에 신비주의적인 태도를 강조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이다.-역자 주)도 영성주의자라고 불리지만, 프랑크와 츠빙글리의 차이는 츠빙글리와 투터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
프랑크는 성령과 말씀 혹은 내적인 말씀과 외적인 말씀 사이에 대립이 있다고 보았으나 츠빙글리에게서는 이런 사상을 발견할 수 없다. 프랑크의 이러한 사상은 그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1531년 캄파누스(John Campanus)에게 보낸 편지에 분명히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는 성서의 기록된 말씀과 대비하여 성령을 강조하였다.
나는 당신이 성서의 문자에 빠져서 성령의 가르침에 당신의 마음을 닫아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중략) (LCC xxv. 159)
츠빙글리는 바로 이와 같이 성령과 성서를 분리하는 데 대해 재세례파를 공격하였다.
프랑크는 또한 성령을 성례들(혹은 가시적 말씀들)과 대립시켰다. 그는 성례들을 하나님이 의도하셨고 신약시대가 시행하였던 참된 영적 예배에 대한 곡해라고 간주했다.
이와 함께 저는 묻고 싶습니다. 무슨 이유로 혹은 왜 하나님께서는 케케묵은 성례들을 회복시키려 하고 그것들을 적그리스도에게서 도로 찾으려 해야 합니까? 게다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적이고 내적인) 본성에 반(反)하여 약한 물질적 요소들에 굴복해야만 합니까? 하나님은 1400년 동안 스스로 우리의 영(spirit)을 세례주고 가르치고 양육하시기 위하여 교사이자 세례자이자 만찬의 주재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 영 안에 계셨습니다.(중략)(LCC xxv. 154)
이것은 츠빙글리와는 거리가 먼 세계이다. 츠빙글리는 성령과 성례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영은 때로는 성례와 함께, 또 때로는 성례 없이 역사하기도 한다.
츠빙글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과 관련을 시키지 않고서 성령을 언급하는 경우들이 있다. 적어도 몇 가지 측면에서 이것은 성경의 사용법 혹은 성경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을 반영하고 있다. 성령을(창세기 1장에서처럼) 창조의 영으로 언급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때 성령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의 계속적인 역사도 팔레스타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Z IX 458.25-459.10) 로마서 2:14-15(“율법 없이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에서처럼, 성령을 비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율법을 새겨 놓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언급하는 때도 있다. 츠빙글리는 자연법을 성령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랐다. (Z II 634.10-34, 327.3-7)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성령의 역사도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세상이 생기기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말씀, 즉 성육신하신 말씀, 기록된 말씀, 그리고 들리고 보이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성령은 특히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과 관련된다. 보다 엄밀하게는 오순절 성령강림절 때에 성령이 그리스도 대신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았고 이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임재하고 일하신다.(Z II 80.15-16)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본문은 "승천 후에는 내가 나의 영으로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츠빙글리는 요한복음 14:26을 해설하면서 성령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을 생각나도록 하는 분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본문을 넘어서고 있다.(S Ⅵ i, 751.41, 752.41-2) 이러한 구절들은 츠빙글리의 초기와 후기 작품들에서 성령이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령과 성서의 기록된 말씀의 연결은 확고하다. 성령은 성서의 저자이다. 물론 복음서 저자들의 개성을 부정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말이다. 츠빙글리는 복음서들의 차이점과 모순점들까지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그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런 것들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S VI ⅱ. 70.37-38)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in re)에서 오류는 결코 없으며 단지 사람들과 시간들에 관한 문제들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Z XIII 41.31-2) 일반적으로 차이점들은 단지 외견적인 것일 뿐이라고 여겨졌고, 그것들은 스스로 모순될 수 없는 성령께서 성서의 진정한 저자라는 가정 위에서 조정되었다.(Z V 735.21-23)
(중략) 츠빙글리는 성령을 성서에 제한하지는 않았다. 『논박』(A Refutation)에서 재세례파에 반대하여 글을 쓰면서, 하나님은 "이방인들 중의 여자 점쟁이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와 그분의 선택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Z VI ⅰ. 162.8-11; Selected Works 226-7) 하지만 비성서적 작가들에 특별히 의존하는 『주석』 (A Commentary)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서로 관심을 돌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아들과 성령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들을 거룩한 성서로부터 찾을 것이며, 결코 인간의 지혜로 교만해져서 결국 자신들이 받은 순수한 것을 더럽혀 버린 그런 자들에게서 구하지 않을 것이다."(Z III 643.24-7; Works iii, 62)
츠빙글리가 가장 자주 영성주의자로 간주되었던 부분은 말씀과 성례에 대한 성령의 관계에서였는데, 그가 말씀으로부터 성령을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이 일에 츠빙글리 사상의 두 가지 뚜렷한 요소가 결합되었다. 첫째는 성령의 자유와 주권이고, 둘째는 인간이해에서 영과 육에 대한 플라톤적 대립이다.
성령의 자유는 “성령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바람처럼 분다"(요 3:8)는 구절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데서 확인된다. 성령은 말씀이나 성례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말씀과 성례를 통해 활동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과 별개로 활동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성령이 말씀과 성례에 얽매인다고 말하는 것은 구원을 인간의 재량에 맡기는 격이다. 그것은 구원이 단지 말씀을 듣거나 세례를 받거나 성만찬에 참예함으로써 보장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말씀 설교나 성례 거행의 실패로 인해 구원이 거절될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대로 츠빙글리는 듣는 자가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는 한 교사의 말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사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당신을 가르치고 이끌지 않는 한 복음을 좇아 행할 수가 없다." (Z I 366.30-3; LCC xxiv. 79) 설교자의 말, 실로 인간 예수의 말도 아버지께서 듣는 자를 인도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중략)
말씀과 성례는 성령이 없으면 효력이 없지만, 성령은 그것들 없이도 효력을 지닌다. 그것들은 성령을 필요로 하지만, 성령은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더욱이 성령에게는 어떤 경로나 매개물이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성령 자신은 스스로 존재하면서,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며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성서는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이 성례들처럼 반드시 성령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이 일찍이 성령에게서 난 것이라면, 그것들을 낳은 것은 지각 가능한 사물이 아니라 성령이었다.… 간단히 말해, 성령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분다.(Z VI ⅱ. 803.10-22; Jackson 466-7; Works ⅱ, 46)
츠빙글리 사상의 또 다른 요소는 얼마간 플라톤적인 인간론이다. 이것은 인문주의 유산의 한 측면이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날카로운 대조 혹은 대립을 전제하여, 결국 내적인 것(마음이나 정신)은 외적인 것(말씀, 물, 빵과 포도주)의 영향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외적인 것은 외적인 것에 의거하거나 영향을 준다. 이 점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성령의 주권적 자유보다는 덜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주권적 자유는 츠빙글리의 신중심적인 그리스도교신학의 심장이고, 또한 피조물보다는 창조자에 대한 신앙을 수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그의 사상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만약 성령이 말씀과 성례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들의 결합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강조를 두어, 자연스러운 순서는 성령과 말씀이다. 일부 사람들이 루터의 영향을 강하게 지적하는 『하나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The Clarity and Cenainty of the Word of God)에서 츠빙글리는 말씀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확실하고 강력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가 말씀하시는 순간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라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조차도 말씀의 능력은 하나님 의지의 주권 안에 놓이고 있다. 그리고 츠빙글리가 말씀의 명료성을 논할 때에는 마치 말씀이 인간의 지혜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조명하고 영감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빛과 영” 때문에 이해되는 것인 양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Z Ⅰ 353.8-13, 365.14-21; LCC xxiv. 68, 78)
성령과 말씀이라는 순서를 따르고 있는 이사야 59: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을 주해하면서 츠빙글리는 성령이 첫 자리에 놓여짐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성령이 없으면 육체는 말씀도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과 자신의 뜻대로 조명하시는 성령 둘 다를 가지고 있다.(Z XIV 391.1-7) 츠빙글리가 성령과 말씀을 대조시키는 곳에서 그의 관심은 종종 말씀의 지위를 부인하기보다는 성령을 확언하는 데 있다. 성령이 내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외적인 말씀은 헛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적인 말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S VI i. 752.44-8) 우리가 단순히 성령에게만 의지하면 되고 말씀은 팽개쳐 버려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츠빙글리는 주석(A Commentary)에서 "우리는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적으로는 성령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Z III 900.6-7)
루터가 작성한 외적인 말씀에 대한 마르부르크 조항이 성령을 믿음의 근원으로 강조하는 츠빙글리주의적인 색채를 지닌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이 조항은 일반적으로 성령은 말씀 없이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다는 마르부르크의 주장과, 성령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킨다는 마르부르크의 결론과 더불어, 츠빙글리가 기록했을 법한 진술이다.(Z VI ⅱ. 522.12-17)
<약어표>
LCC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London, 1953-70).
S M. Schuler and J. Schulthess, Huldreich Zwingli's Werke (Aurich, 1828-42).
Works ii W. j. Hinke, The Latin Works of Huldreich Zwingli, ii (Philadelphia, 1922; repr as Zwingli on Prividence and Other Essays, Durham, NC, 1983).
Works ⅲ C. N. Heller, The Latin Works of Huldreich Zwingli, ⅲ (Philadelphia, 1929; repr. as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 Durham, NC, 1981).
Z Huldreich Zwinglis Sämtliche Werke (Berlin, Leipzig, Zurich, 1905- ).
W. P. 스티븐스 지음, 박경수 옮김,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pp. 107-115.
첫댓글 츠빙글리의 성령론을 알 수 있는 좋은 포스팅입니다. 잘 읽고 참고합니다.
신비주의자가 성령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자의 성령에 대한 설명이기에 읽고 배울 가치가 많아 보입니다. 좋은 내용울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영에 우선권을 부여하기 때문에, 자연히 츠빙글리는 말씀과 성령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성령과 말씀이라고 말하였다." --> 츠빙글리가 성령 중심 또는 우위의 신학을 전개한 것으로 추정하게 합니다.
한편, 루터는 성령이 성경을 수레 삼고 오신다고 하였다는데요. 이는 성경 중심 또는 우위의 신학을 전개한 것으로 추정하게 합니다.
네. 맞습니다. 추가 설명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츠빙글리는 바로 이와 같이 성령과 성서를 분리하는 데 대해 재세례파를 공격하였다." --> 성령과 성경을 분리하고 성령을 강조하면 신영주의나 열광주의로 변질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오류를 매우 경계하고 반대한 분이 츠빙글리입니다. 재세례파와 함께 하는 듯 했지만 맹렬히 대립하게 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네. 성령과 자기 내면의 소리를 구별해야 하는데 재세례파가 츠빙글리에게 비판 받았던 부분이 이 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츠빙글리는 재세례파가 사실상 성령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에게 호소한다고 보았습니다. 츠빙글리는 성서의 신적 권위가 성령의 영감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코람데오 좋은 분별과 설명에 공감합니다.
직접 연관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래 말씀을 간접적으로 참고하면 영과 말씀의 순서도 맞는 것 같습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멘!
아멘22
좋습니다!
루터와 결이 다르지만 훌륭한 종교개혁을 수행한 츠빙글리에게 친숙함을 느낄 수 있도록 연재를 올려 주셔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