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계절 5월 어느 봄날 경춘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 없는 여행
이다. 발길 닿는 곳이 나의 목적지이다. 경로석 맞은편 팔십 대로 보이는
선배 어르신이 계셨다. 인생 선배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
았다. 선배 어르신 옆자리가 비어 있길"기다리다 자리를 옮겨 앉았다. 먼
저 다가가는 성격을 가진 나는 옆자리에 앉으며, 어르신! 어디 좋은 데 다
녀오시는 길이신가요? 하며 내 얘기를 풀어 놓았다. 저는 주말이면 기차
여행을 하죠. 무작정 발길 닿는 곳이 저의 목적지이면서 여행지죠. 웃으면
서 어르신께 인사드렸다. 어르신 피부가 너무 고우시네요.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신가요. 의상이 너무 멋져요. 어르신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니,
그때 어르신 말문이 열렸다.
나도 심심하던 중 말동무하게 됐구먼. 친구 만나고 오는 중이라네. 아 그
러셨군요. 선배님 어떤 꽃을 좋아하시나요. 계절 따라 피는 꽃은 다 좋아
한다네. 꽃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을까.
네, 맞아요. 꽃은 다 좋아하죠. 어르신이 젊었을 때는 아주 예뻤겠어요? 젊
었을 때 누구나 다 예쁘지. 젊음 그 자체가 예쁜거지. 네 맞아요. 먹고살기
에 바빠서 나를 돌아 볼 시간도 없이 세월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지. 네.
세월이 너무 야속 해. 네, 그러셨군요. 이제 나이 들고 갈 때가 가까워져 그
런지 모든 것이 다 예쁘고 아름답다네. 어르신, 소망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건강하게 살다 2~3일 아프다 가는 것이 소망이지. 젊은이 소
망은 뭔가. 저도 아프지 않고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 가는 것이 소망
이지요.
어르신 마음이 녹아내리듯 살아오신 인생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씩 꺼내
놓으셨다. 예전엔 나도 꽃다운 젊은 시절이 있었는데, 꽃다운 청춘은 온
데간데없고 늙은 노인이 되었네. 나이가 많아지니 병원에 다니는 일 밖에
없어. 그리고 기억도 흐려져서 병원에 다녀와서 약봉지를 손에 들고 약을
찾는다네. 그뿐만 아니라 약을 먹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서 약봉지
를 꺼내 확인도 한다네. 그게 걱정이지. 어르신,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누
구나 깜빡할 때가 있지요. 어르신 마음을 안정시켜 드렸다. 빙그레 웃으시
는 어르신 얼굴엔 살아오신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르신, 지금 보고 싶은 분 있으신가요. 친정엄마가 보고 싶다네. 늙었어
도 엄마는 내 엄마니까. 마음 한켠에 그리움으로 간직한 채 남아 있다네.
저도 그래요. 오월이면 무척 그리움으로 사무칩니다. 어머니는 영원한 어
머님이시죠. 어르신, 어머님 많이 그리우신가 봐요. 누구를 탓하겠어. 자
신을 탓할 수밖에 없지. 효도 한번 못했는데. 한숨만 내쉰다.
어르신께서 얼마 전 오랜만에 동창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몸이 많이 쇠
약해져 있더라구. 젊었을 때 예뻤던 얼굴엔 주름으로 채워져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어.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맞죠. 저도 70대 후반까지
살게 되리라는 생각 못 했어요. 저도 살다 보니 이렇게 입 언저리 주변에
주름살이 깊어지고 있어요. 어르신, 남은 삶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이 소
원이시겠네요! 물론이지. 체력도 약해지고 치매까지 겹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두렵다네.
어르신 정신 줄 꽉 쥐고 사세요.
기차 내릴 때까지 인생 선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대화하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살지는 모르겠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리라 다짐해 보았다. 누구도 아닌 온전히 나로 살아가
는 인생,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인생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