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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동에 뿌린 씨앗
1945년 10월 18일부터 약 열흘 간에 걸쳐 각 지방의 교인들이 서울에 모여 신도 대회를 개최하였다. 교회 실태를 파악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146명이 모여 집회는 성황을 이루었고, 집회를 통해 대표자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
억눌림과 핍박 가운데 숨어서 해방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교우들이 모여서 해방된 조국의 복음 사업을 토의하게 되었으니 실로 감격적인 집회였다.
특히 가평 산중에 은거하던 신자들은 오춘수 씨가 작사한 “가평가”(加平歌)를 총회 앞에서 합창함으로써 저들 스스로와 청중에게 큰 감명을 끼쳐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연합회 행정위원 중 하나로 내가 선정되었다. 아는 것도 없고 무식한 나를 환난 날에 주께서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숨기셨다가 사람들 앞에서 높이셨다 생각하니 하나님께 감사했다.
신도 대회로 모였을 때에는 곧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듯 사기가 충천했으나 제각기 고향으로 돌아가 흩어져 있으니 교회는 다시 이전처럼 조용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신도 대회를 마친 후에 나는 서울에서 전도할 궁리를 모색하였으나 산중에 두고 온 가족들을 하산시켜 안주시켜야겠다고 생각되어 다시 가평으로 갔다. 압박에 쫓기어 들어간 산골을 해방이 되어 나올 때 우리 마음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되었다. 한많은 피난살이를 마치고 내려오는 산길에는 이미 나뭇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과 눈이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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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끝없는 순례길이라지만 가평에서의 몇 년은 처절한 역사였다. 굶주림과 추위와 언제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꽉 둘러싼 어둠의 벽, 오직 우리에겐 하늘, 하늘만이 열린 공간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하늘을 바라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다.
이제 해방이 되었다. 일본 군대의 행렬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더 이상 신앙의 자유를 유린하는 어둠의 세력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시련이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께서 그 가운데서도 인도하고 계신다고 하는 확증이었다. 비록 캄캄한 밤이라도 주님은 빛을 주신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하여 터득하였던 것이다.
나는 가족들을 면목리 삼육중학교 빈 기숙사 방에 이주시켰다. 그 동안 여기저기 왕래하고 가족들 이사 등 비용으로 묵호에서 얻은 현금은 몽땅 써 버렸고, 가평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란 소금 몇 말에 지나지 않았다. 이 때 마침 삼육중학교 농장의 벼를 떠는 일을 2일간 도와 주었더니 벼 두 말을 사례로 주었다. 나는 이것을 아내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전도하러 나갈 터이니 나를 믿지 마시오. 내가 일본 징용 가서 북해도 탄광에서 죽은 셈치고 식구들을 잘 보살펴 주기 바라오.” 이 같이 아내에게 부탁하고 나는 서울 시내를 향하여 방향 없이 떠났다. 나의 이 당시 신앙관은 2차대전 종식 후의 평화를 마지막 평화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온 정신은 오로지 하나, 전도뿐이었다. 천재 일우의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해방이 되었다고 기뻐하는 도심지의 인파 속을 뚫고 걸어가면서 나는 이 백성에게 새로운 해방, 최고의 해방을 알려 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던지 남대문을 지나서 서울역에 도착하여 주위를 돌고 있는데 뒤에서 “반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지대성 씨가 서 있었다. 그는 전에 서울에서 구세군에 다니고 있었는데, 최은애 씨의 소개로 내가 그와 접촉을 갖기 시작하여 우리 교회 진리를 소개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우리 교회 신자가 되었으나 몇 해 동안 헤어져 있다가 이날 우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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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게 된 거싱었다. 지대성 씨는 교회 해산 성명서를 받고 이를 읽자 곧 믿음에서 떠나 버렸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에게 새롭게 시작할 것을 호소하며 그의 살고 있는 곳을 물으니, 가족들은 고향에 두고 현재 봉래동 어느 집에서 몇 사람과 같이 하숙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반 선생님,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해도 저물었는데 제 숙소로 갑시다.”라고 지대성 씨가 친절하게 말을 걸어 왔다. 사실 나는 지금 갈 데가 없어 서울 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으므로 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지대성 씨를 따라 나섰다.
지대성 씨를 따라가 보니 자기 말대로 하숙집이었다. 해방이 되니, 시골에 있던 사람들이 여섯 평짜리 방에 젊은 사람들이 10여 명이나 어울려 있었다.
나는 이들을 보고 ‘옳다! 여기가 내 일터구나!’ 생각하고 그날 밤부터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하숙집 주인의 부인은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인데, 신심(信心)이 깊은 불교 신자였다. 그는 집안에다 신당을 만들어 놓고 신당 앞에서 매일 기도했다. 그런데 이 부인이 흥미를 갖기 시작하더니 내가 매일 찬송을 하고 설교를 하면 함께 찬송을 부르고 설교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하루는 그 아주머니가 집안에 세운 신당을 내게 맡기면서, 그 외의 신(神)그릇들을 도끼로 부수고 섬기던 모든 기물들을 다 빻아서 불에 태워 버렸다.
그 부인은 다른 사람 아닌 민오현 씨이다. 그의 슬하에서 자란 조근호 씨가 후에 우리 교회의 안수받은 목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신자들이 차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성경 공부는 성황을 이루어 수십 명의 새 신자를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 달이 얼른 지나갔다. 집에서 나올 때 품삯으로 받았던 벼 두 말만을 놔 두고 왔는데 식구들이 어떻게 지낼까 그저 마음으로만 기도하고 염려하였을 뿐 아무에게도 내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였는데, 한 안식일에는 봉래동 형제들이 “반 선생님, 오늘은 집에 가보셔요” 하지 않겠는가. 내가 “왜 나보고 갑자기 집에 가라고들 그러지요?”라고 되물으니, 지대성 씨가 옆에서 또 말하기를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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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오늘 꼭 가 보셔요” 하고 강권하였다.
나는 마지못해 집으로 갔다. 그런데 가 보니, 먹을 양식과 반찬과 이불 한 채가 들어와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들이 지대성 씨에게 내 사정을 물어서 내 가정의 형편을 알고 그들이 푼푼이 모은 돈으로 그와같이 희사한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하나님을 위해 뜻을 세우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나는 깨달았다. 하나님에게 가장 기쁜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영혼 구원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과 가족의 부양을 돌볼 시간이 없는 종들과 가족을 대신 염려하사 알맞은 때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 후 면목동 뒷산에서 벌목하는 인부들이 우리 기숙사에 머물게 되어 이들 10여 명의 식사를 우리가 해주게 되었다. 이들을 위한 봉사로 그해 겨울을 무사히 보내게 되었다. 이 봉래동교회는 후일 마포교회의 전신(前身)으로서, 끊임없이 씨를 뿌리는 복음의 대목(大木)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봉래동교회 설립 당시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 어떤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식일 예배가 끝난 후 3시쯤 면목리를 향하였다. 나는 먼저 어머님께 가서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웬 사람이 그 모양이냐? 집에서는 굶주리고 아이들은 아파 죽으려고 하는데 어디 가서 소식도 없었느냐?”고 하셨다.
나는 즉시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두 아이가 모두 홍역에 걸려 폐렴까지 겹쳐 있었다. 생명이 경각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나는 신태식 씨 등 몇몇 아는 사람을 불러 기도를 청하였다.
한참 기도 드리는데 갑자기 신태식 씨가 “아이들이 살아난다!”라고 탄성을 질렀다. 눈을 떠 보았더니, 과연 두 아이가 다 눈에 생기가 돌고 살아나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이윽고 의사를 부르러 갔던 청년들이 실망한 얼굴로 들어왔다. 의사들이 마침 다들 출타 중이거나 왕진 가서 없더라는 것이었다.
의사의 발걸음보다 하나님의 응답이 한 발자국 앞장 서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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