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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한때의 뜨거운 열기
김 진 삼 / 무역학부
온 천지가 초록의 물결이다. 연두의 계절인 3월이 지나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린다. 양지바른 돌담 위에 따스한 봄볕이 내린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촉촉한 봄의 윤기가 흐른다. 만물이 다시 움트는 생동의 계절이다.
매스컴은 4월 총선에 즈음하여 분위기를 띄우고 후보들의 인물평이 바람을 탄다. 선거철만 되면 ‘운동권 정치인 386세대’를 호출한다. 이제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고 비판의 목소리도 높인다. 386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1990년대 30대가 되는 세대를 의미한다. 1980년대는 국제사회에서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을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평가하던 시절이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이후, 대학 사회는 운동권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으로 크게 혼란스러웠다. 대학 정문에는 운동권 학생들과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학로 옆 청보리 물결은 파도처럼 출렁이고 노란 유채꽃은 철없이 시절을 알린다.
학생들은 무리 지어 구호를 외치며 신작로에 나가려고 한다. 이를 저지 하려는 경찰과의 대치 상황은 늘 평행선을 그었다. 급기야 경찰이 밀리면 최루탄을 쏘면서 학생들을 해산시킨다. 밀고 밀리는 격렬한 몸싸움 뒤에는 경찰에 연행되는 학생이 생긴다. 한차례 줄다리가 끝나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하루가 또 저문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이 생기면 대학 본부를 통하여 지도교수에게 전달된다. 대학에는 학과별 학년별 지도교수가 배정되어 있다. 지도교수는 맡고 있는 학생이 혹시 사고가 날까 봐 늘 가슴을 졸인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듯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뇌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이 잘못을 인정하면 바로 대학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운동권 학생은 끝까지 버티다 구치소로 옮겨간다. 지도교수는 구치소에 학생의 면회를 가야 했다. 이러한 행위는 나만이 겪은 일은 아니다. 대학에 있는 모든 교수님이 공통으로 겪은 아픔이다. 특별하기도 억울할 일도 아니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40여 년 전 1980년대 대학가의 회오리바람들이 뇌리를 스친다. 386세대 운동권 학생의 지도교수로서 유난히 A 군, B 군, C 군, D 군, 네 명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출퇴근길 오르내리던 ‘담티재’ 야산에는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달콤한 향기는 차창 가에 맴돈다. 산자락 아래 군락의 연분홍 진달래꽃은 지고, 연두에서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오월 어느 날, 내가 지도하는 삼 학년 A 군이 대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지도교수가 면회를 가야 한다고 학생처에서 연락이 왔다. “구치소에 면회를 가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직원 선생에게 물으니 동행한다고 한다.
직원 선생과 구치소로 가면서 학생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지 다시 물어보았다. 학생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쓰고 빨리 대학으로 돌아가자고 지도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도교수 입장에서 그런 권유가 운동권 학생에게 설득이 되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직원 선생은 그렇게 지도해야 한다고 한다. 생전 처음으로 대구구치소 정문으로 들어서니, 죄 없는 내가 공연히 주눅이 든다. 심란한 마음을 다독이며 걷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80년대 대구구치소는 교도소와 같은 울타리에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교도소 풍경을 마주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변호사 접견실에서 학생을 면회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직원 선생의 조언을 중심으로 설득한다. 학생이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견딜 만합니다.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면서 고개를 숙인다. 내 표정이 안쓰러웠는지 구치소에 있는 학생이 지도교수를 걱정한다. 패기 찬 운동권 학생의 모습과는 달리 핏기없는 A 군의 얼굴을 보니, 측은한 생각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운동권 학생들은 대개 지도교수에게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지도교수는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투쟁은 자기들 방식대로 했다. 구치소의 인도 옆 화단에는 노란 금계국꽃이 무리 지어 화사하게 피어있다. 심란한 마음을 위로해 주려는 듯 실려 온 바람에 방긋거린다. 이렇게 운동권 제자 덕분에 구치소를 처음 방문했던 기억이 새롭다.
A 군의 집은 울산이며 대학 부근에 하숙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울산에 있는 대기업의 근로자이다. A 군의 교내 생활에 대하여 한두 번 전화 상담을 하였다. 어느 날 A 군의 아버지가 대학을 방문하여 아들의 장래를 함께 걱정했다. “교수님, 우리 아들이 운동권 학생이 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가정형편도 중간 정도 됩니다. 여동생은 울산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를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이 휘몰아치는 폭풍으로 전해온다.
A 군 아버지는 아들이 친구를 잘못 만나 운동권 학생이 된 것 같다고도 한다. 대학을 원망하는 건지 자식을 원망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조기 석방을 위한 탄원서를 부탁하였다. 조기 석방되면 바로 군에 보내겠다고 덧붙인다. 아버지의 뒷모습은 힘들어 보였다. 탄원서는 담당 검사실로 보냈지만, A 군은 운동권 학생의 중간 간부로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해가 바뀌어도 대학로의 최루탄 연기는 그치지 않고 시간은 흘렀다. 들녘에 벼가 누렇게 익어 가면 B 군이 생각난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대학 정문 앞 큰길에는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다. 늘 있는 행사라고 생각된다. 그다음 날 학생처에 연락이 왔다. 내 지도 학생이 시위 도중 눈에 최루탄 파편으로 상처를 입었다. 병원 치료 중이며 중상은 아니라고 한다. B 군의 눈 치료가 잘 되길 기도하면서 가정방문을 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경북 어느 시골에 농사를 짓고 있다. 논밭 가운데 몇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다. 동네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가는 길 좌우에는 연분홍 코스모스와 흰 꽃 구절초가 인사를 건넨다. 가까이에서 멀리까지 벼 익는 소리가 들린다.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는 어느새 참새와 친구가 된 듯하다. 조그마한 선물을 들고 집에 들어서니, 마당 한 곳에 벌러덩 누워 있던 누렁이가 인기척에 짖으며 일어난다.
내가 도둑처럼 보이지 않았는지 턱을 괴고 앉으며 눈을 맞춘다. 빈집이고 담벼락 앞 키 큰 해바라기는 노란 둥근 꽃시계를 달고 웃고 있다. 마루에 걸터앉아 학부모가 오기를 기다린다. 멀리에서 들려오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뻐꾸기 소리는 어쩐지 구슬프게 들린다. 내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에서도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서로 박자를 맞춘 듯 뻐꾹뻐꾹 주고받는 소리는 슬프게 들렸던 기억이 어슴푸레하다.
학부모를 기다리는 마음을 아는지, 나무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고 지루함이 밀려온다. 혹시나 싶어서 옆집 대문에 들어서니 할머니가 누구냐고 묻는다. 옆집에 교수가 가정방문 왔다고 하니, 밭에 가서 연락해 주었다. 이런 한가로운 시골에 외로워서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도 잠시뿐, B 군 아버지가 대문에 들어섰다. 외아들을 둔 아버지가 밭일하다가 급히 집으로 왔다. B 군이 눈을 다쳤다는 설명은 하지 않고 운동권 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니, 많은 지도를 부탁드린다고 하였다.
학생 아버지는 아들 편을 들면서 세상을 원망하는 어조로 음성을 높였다. 학부모의 격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B 군의 아버지는 “아내는 몇 년 전에 다른 세상으로 갔고 소처럼 농사일하여도 가정형편이 나아지질 않는다. 밤이면 술을 먹어야 잠을 잘 수 있다.”고 한다. 외아들이 장학금을 한번 받았다고 자랑할 때는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학생 아버지로부터 긴 연설을 듣는다. 꽃시계를 매단 해바라기가 졸고 있는 듯하다. 한마디 변명도 못 한 내 모습이 서글펐다. 착잡한 심정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기만 느껴졌다. 아들 걱정은 하지 않고 정부 잘못만 탓하는 B 군 아버지는 ‘운동권 아버지’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현실이 얼마나 고달프기에 내 자식의 안녕보다 나라 걱정이 앞설까? 하는 자위도 해 본다. 다행히 눈 치료가 잘 되어 실명은 피했다. 20여 년이 흐른 후, B 군은 지역 농민단체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아나고, 대지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새로운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어느 해 이른 봄, C 군의 핼쑥한 모습이 떠오른다. 학생처에서 C 군이 위장 취업한 죄로 대구구치소에 수감 중이라고 한다. 학생의 학적 자료 등을 살펴보니, 학생은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한참 후배가 되는 셈이다. 대구구치소에 C 군의 면회를 하러 갔다. 변호사 접견실에서 마주한 C 군에게 통상적인 매뉴얼대로 지도한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농담조로 “너는 위장 취업했으니, 죄가 크겠다. 사실대로 고백하고 선처를 빌어라.”라고 했다. C 군은 “교수님, 근로 현장에 견습생으로 취업하여 열심히 일한 것도 위장 취업입니까.”라면서 눈을 부라린다. 내가 웃으면서 “C 군아, 눈은 아래로 깔고 다소곳이 항의해라. 지도교수가 놀란다.” 하면서 함께 웃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덧붙여 “너의 학적 자료를 보니 00 초등학교를 나왔더라. 나도 그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너는 내 한참 후배가 되네.” 하면서 초등학교의 주위 환경 등을 같이 나누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 헤어질 때 C 군의 애틋한 눈빛이 더 애처로워 보였다.
시간은 흘러 늦여름 무렵, 학생처에서 연락이 왔다. 대구지검 검사실에서 C 군의 지도교수 면회 신청이 있으니, 지도교수의 면담을 요청한다. “학생 지도로 검사실까지 들락거리게 되었네.” 하면서 중얼거린다.
담당 검사실에 도착하니, 담당 검사가 “교수님 고맙습니다. C 군이 교수님의 면회 요청이 있어서 오시게 했습니다. 옆방에서 편하게 말씀 나누십시오.”라면서 담배 한 개비를 주었다. “학생이 담배를 피우고 싶을 겁니다. 학생에게 피우게 해 주십시오.”라고 한다. 당황스러워서 담당 검사에게 “검사님, 학생이 버릇없이 교수 앞에서 담배를 피우게 하는 것은 안 됩니다.” 하며 웃었다. 검사도 “교수님, 이해해 주십시오.” 하며 웃는다.
옆방에 가니 호송인이 C 군의 포승줄을 풀어주면서 자리를 비켜 준다. C 군에게 “오늘 우리의 만남은 두 번째이구나. 지낼 만 하나. 고집부리지 말아라.” 하면서 담배 한 개비를 주었다. “이것은 담당 검사가 주는 거다. 피워도 괜찮다. 얼굴에 부스럼이 있네?” 했더니, “교도소 내에 옴이 퍼져서 지금 방역이 한창입니다.”라고 한다. 이어 “교수님,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교도소 생활이 좀 지겹기도 하고 교수님 생각도 나고, 바람을 쐴 겸 지도교수님의 면회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라면서 겸연쩍어한다.
담배는 피워도 좋다고 했으나 끝내 피우지 않았다. 지난번 구치소 면회 중에 대학에서 내가 너의 지도교수이지만 초등학교 선배라고 얘기했더니 조금 더 친근감이 있었나 보다. 랍비 힐렐은 자기만을 위하는 인간은 진정한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힘든 시절에는 함께 손잡고 걸어야 험한 세상을 건널 수 있다.”라고 하면서 C 군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C 군은, “중소기업인 섬유회사에 취업해 보니, 하루 24시간을 2교대로 12시간씩 작업하고 근로 환경이 열악합디다......” C 군으로부터 약식 특강을 듣고 우리는 헤어졌다. 불그스레한 저녁노을이 화단의 나뭇가지에 내려앉는다.
80년대 중반 운동권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이 한창일 때,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이부대학 학생담당 학장보’의 보직을 맡은 경험이 있다. 젊은 교수라는 이유로 추천되고 강의보다 운동권 학생의 뒷바라지가 주 임무였다.
87년 연말에 선배 교수님이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나와 함께 학생처 일을 해 보자면서 학생부처장의 보직을 권한다. ‘학생담당 학장보’을 역임했으니 제격이란 말도 덧붙인다. 급기야 88년은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하는 한해이다. 운동권 학생들은 교외로 나가 민주화 투쟁을 하고 교내에서는 대학 본부를 향한 불만이 높다. 대학 본부는 연일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혼란의 중심에서 학생 업무를 총괄하는 학생처의 학생부처장을 맡고 있었다.
얼떨결에 학생부처장의 보임을 받고 이 개월 후, 대학 본부는 총장을 포함한 모든 보직 교수가 보직 사임을 하였다. 나 역시 학생부처장의 ‘보직 사직원’을 몇 번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유는 학생운동이 격렬한 가운데 학생부처장만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순진한 건지 바보스러운 건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여건이라면 정면으로 돌파해 보자 하는 오기가 생겼다. 대학의 모든 에너지는 학생처로 집중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학생처 직원 선생님들이 학생 업무의 베테랑이다.
학생부처장을 맡은 88년의 가을 무렵, 학생과장이 급히 서울구치소에 학생을 면회하러 가야 한다고 한다. 운동권 학생들이 MBC 방송사를 점거하려다 경찰과 충돌하였다. 그 사건으로 경찰에 연행된 학생 한 명이 본 대학 D 군이다. 학생은 서울구치소에 있는데 면회를 가야 한다고 한다. 전국적인 핫뉴스가 되어 지도교수가 아닌 학생부처장이 학생 면회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직원 선생과 함께 서울행 열차를 탔다.
창밖 들녘에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물결로 일렁이고 있다. 머릿속에는 서울구치소에 있는 학생과 내 모습이 어른거리고 눈은 풍요로운 들녘을 달린다. 우리는 서울역에 내려 택시로 경기도에 있는 서울구치소로 향한다. 서울역에서 교외로 벗어나니 창밖 파란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한가로워 보였다.
처음 가는 낯선 길은 멀기만 느껴졌다. 대구구치소는 몇 번 들락거렸지만, 어쩌다 서울구치소까지 다녀야 하나 싶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서울구치소의 행정적인 절차를 거쳐 변호사 접견실에서 학생 면회를 할 수 있었다. 내가 D 군의 지도교수가 아니므로 학생 얼굴을 모른다. 단지 우리 대학 학생이라는 것이다.
접견실에서 D 군을 만났다. “힘들지, 고생이 많다.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문 쓰라고 하면 반성문 써라. 대학에 빨리 돌아와서 졸업해야지. 불편한 것은 없느냐.” 등이다. 학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D 군은 서울 말씨였다. 서울의 학생이 우리 대학에 입학할 수도 있다. 얘기를 더 나누다 보니 D 군은 우리 대학 학생이 아니고 서울의 타 대학 학생이다.
처음부터 인적 사항을 재확인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허탈한 마음으로 학생과 헤어지고 동행한 직원 선생을 원망한다. 헛발길질하고 돌아오는 길은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누군가에 희롱당한 기분에 괘씸한 생각도 불쑥 든다. 시절을 원망하며 창밖을 보니, 가을 저녁노을은 붉게 물들어가고 키 큰 코스모스가 실없이 하늘거린다.
후일 확인된 사실은 D 군이 고의로 지방에 있는 영남대학교 학생으로 진술했고 그 자료가 우리 대학으로 넘어와 동명이인인 D 군이 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 학생은 우리 구성원들이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하여 학생처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자위해 보았다.
담장에 붉게 핀 덩굴장미는 수줍은 듯 시절을 알린다. 4월의 총선은 끝나고 매스컴은 마무
리 작업을 한다. 운동권 정치인 386세대의 호출도 숨죽이는 듯하다. 한때 내가 지도교수이었던 많은 386 운동권 학생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도 이제 60대 전후의 초로가 되었겠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충족되지 않는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라고 했다. 젊은 한때 불타는 그들의 순수한 욕망은 휴화산으로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젊은 대학생 시절, 구치소를 들락거렸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려 다복하게 살고 있겠지. 때론 해 질 녘, 대학 시절의 최루탄 연기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겠지.
A 군은 운동권 학생 중 중간 간부였기에 다른 학생보다 고생은 더 했겠지만, 그의 지도력은 체화되어 있을 것이다. 소식은 알 길이 없으나 개성에 어울리는 사회 지도자가 되었으리라. B 군은 초로에도 싱글로 지역 농민단체의 간부로 활약하고 있다니, 농촌에서 소금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C 군은 교도소 생활이 지겨워 ‘지도교수의 면회 신청’을 했고 그로 인해 검사실에서 면회를 하기도 하였다.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관심이 많아 위장취업으로 고생했다. 근로자의 취약한 부분을 대변하고 해결해 주는 일을 하고 있으리라. D 군은 타 대학 학생이면서 나를 대구에서 서울 구치소까지 방문하게 만든 패기 넘치는 학생이었다. 큰 사업가가 되어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을 것이다.
영남대학교에서 뿌리내려 살아온 한 생을 되돌아보니, 행복했던 기억보다 가슴 아린 기억이 먼저 고개를 내민다. 나와 이런저런 인연으로 맺어온 모든 386 운동권 학생들은 시대적 아픔을 일찍 깨달았다. 조금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삶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열 손가락 중 아픈 손가락에 더 연민이 가듯이 마음 한쪽이 아린다. 이들 모두의 행운을 빈다.
젊은 한때의 뜨거운 열기는 모두 지나가는 바람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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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총장님, 공들인 '추억'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편집위원회가 사정으로 방학에 들어갔다가 이제 막 새로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 귀한 원고로 휴가에서 귀환을 며칠 앞당겼습니다. 편집부도 에너지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교수들이 얼마나 많이 함께 한 기억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과 학생은 숭실대학교에서 시위할 때 각목을 들고 서 있던 것이 사진에 찍혀서 서울구치소까지 면회를 가야했었습니다. 담당 검사 이름을 알아내어 법과대학 교수님들 중에 함께 공부한 분이 계신지 알아보고 동행을 요청해서 함께 갔던 기억이 납니다. 검사는 부재중이었습니다. 다른 학생은 구치소에 갇히자, 시골에 계시던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선생믿고 학교 보냈는데, 아이를 감옥에 갇히게 하면 어떻하냐고 하셔서 많이 야단(?) 맞았던 일도 있었습니다. 대책없이 우시던 그 부모님을 보면서, 차라리 야단맞던 순간이 더 쉬웠구나 싶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 교수님 모두 그러시겠지요? 386 운동권이 있었다면 그 운동원 학생들 지도교수들도 있었네요. 때 맞추어, 그리고 진지하게 뽑아주신 기억에 감사드립니다. 그 제자들이 이 원고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여름 땡볕을 뚫고 우는 매미소리는 여름의 끝자락을 알린다. 저믄 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저 멀리에서 자박자박 닥아 온다.
김정숙 편집위원장님이 기술적으로 원고 청탁을 하였습니다. “원고마감은 임박했지만, 특별히 마감 시간을 늘여주겠다.”는 말씀에 눈에 불을 쓰고 작성했습니다. 덕분에 사재 간에 얽힌 한 토막을 정리하였다. 위원장님 고맙습니다.
“사제동행”의 넒은 주제에 소재 잡는 방법 등을 예시한 세심함에 고마웠습니다. 명예교수 카페에 1) “사제동행”에 대한 원고 청탁 2)원고에 대한 단상 잡으실 때 등이다.
김정숙 편집위원장님의 빈틈없는 노력과 열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명예교수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