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흔적을 새긴 몸의 언어 ㅡ시집,『안개부족』 2008 박미라 『애지』
이경수(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흔적과 기억
시인은 지난 시간을 기억하는 자이다. 그/녀들은 과거의 시간에 누구보다도 오래 머물러 있고 몸이 떠난 후에도 오래도록 과거의 기억에 매여 있다. 세상은 앞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지만, 시인들은 세상의 속도와 거리를 둔 채 과거를 향해 있다. 시를 쓰도록 자신을 몰아간 과거의 상처를 그/녀는 오래 응시하고, 골똘히 만져보며, 애써 기억하고자 한다. 지난 시간이 남긴 흔적을 들여다보고 그로부터 잊고 있던 지난 시간을 기억해내는 것. 그것은 오래 전부터 서정시의 몫이었다. 박미라의 이번 시집도 확연히 과거의 기억을 향하고 있다. 그녀의 시 곳곳에는 천년 세월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다. “뱃속을 뒤지면 수세기 전의 물건들이 나오곤”(「혀」) 하는 격포처럼 박미라의 시는 무궁무진한 과거의 흔적을 품고 있다. 그 속엔 “공룡 발자국 화석”(「백악기를 읽다」)이 숨어 있고, “우레 같은 숨소리를 다스리”고 “눈과 귀를 버”(「고인돌」)린 채 천년 세월을 품은 고인돌이 있고, “소리가 지워진 노모의 세계”(「슬픔」)가 있고, “씻은 배추줄기처럼 희멀건 풍채로 사랑방 창가에서 퉁소를 불던 아버지”(「아빠하고 나하고」)가 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그녀가 펼쳐놓는 풍경은 아픈 현재를 환기한다. 혼자서는 좋아하는 냉면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쩔쩔 매는 아버지나 한때 아름답게 꽃 피웠던 어머니는 이제 여기에 없다. 이미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와 병든 노모만이 그녀의 현재를 더욱 외롭게 확인시켜줄 뿐이다. 수많은 상처의 세월을 지났기 때문에 “이제 사랑도 겨울도 더 이상 치명적이지 않다”(「억새꽃 내 언니」). 상처에 무덤덤해지게 만든 것은 저 세월의 힘이다. 시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의 시는 오랜 시간과 그 시간을 함께 한 오래된 존재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을 향한 각별한 애정의 시선이야말로 박미라 시에서 눈여겨볼 대목이다. 오래된 물건들은 그녀의 시에서 종종 오랜 세월이나 오래된 사람과 병치되곤 하는데, 이들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을 통해 결국 그녀는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을 기억하고 지지하고자 한다. 아마도 그녀가 생각하는 시인의 몫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천 년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는 존재들을 각별히 응시하며 박미라의 시는 오랜 시간을 지나온 것들만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분위기를 관심 있게 그려낸다. 어차피 생명을 지닌 것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는 것임을 그녀 역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육신이 소멸한 후에도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무언가가 남아 있음을 또한 깨달은 것이다. 소멸을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영원의 시간에 대한 추구로 그녀의 시를 이끈 것일 수도 있다.
2. 조금씩 지워지는 안개 부족
박미라의 시적 원천은 어머니이다. 그녀의 이번 시집 곳곳에는 앓고 있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소리를 잃고 시력을 잃고 점점 더 많은 것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젖어가는 시인의 시선이 시집 전반에 흐르고 있다. 그것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대하는 딸의 시선에는 연민과 연대의 감정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모계로 이어지는 동성끼리의 연대가 특별한 것은 아직 그녀들이 억압받는 소수자의 처지에 가까워서이기도 할 것이다. 연대는 소수자의 언어이다.
백내장을 앓는 어머니 모시고 병원에 간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안개의 부족이었다 눈동자에 찍힌 안개의 紋章 아니어도 증거는 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쉬지 않고 돌아다니지만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안개 위를 떠다니는 것이 틀림없다 마른 논바닥처럼 먼지 풀썩이는 상심 따위도 그녀에게 기대면 금방 촉촉하게 젖어든다 사물의 경계가 지워진 짙은 안개 속에서도 매일 똑같은 자리에 밥상을 차리고 반듯하게 신발 벗어놓고 가족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그녀를 다른 부족이라고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몸속 어딘가에 안개의 늪을 품은 채 날마다 조금씩 지워지는 그녀 지워진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닌 줄 알지만 세상의 모든 모서리를 지우고 싶은 그녀 누군가가 재빨리 끼워 넣은 눈물쯤은 모른 척 넘기면서 흐린 수채화처럼 점점 더 아득해지는 그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서 젖은 발자국 위에 엎드리고 싶은 아침 손때 묻은 햇살 한 줌 수줍게 꺼내 보이며 배시시 웃는 그녀 ―「안개 부족」 전문
백내장을 앓는 어머니를 안개의 부족에 비유하고 있는 아름답고 슬픈 시이다. 백내장을 앓는 어머니의 눈이 안개 낀 듯 희뿌열 것이라는 생각에 착안해서 이 시의 상상력은 전개된다. 그러고 보니 눈동자에 찍힌 안개의 문장이 아니어도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안개의 부족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물을 긷고 새벽밥을 짓고 불을 갈고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느 집이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쉬지 않고 돌아다니지만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머니의 움직임을 가리켜 시인은 안개 위를 떠다니는 것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안개와 닮은 것은 그뿐이 아니다. “마른 논바닥처럼 먼지 풀썩이는 상심 따위도/ 그녀에게 기대면 금방 촉촉하게 젖어든다”. 가족의 마음 하나하나를 살피는 어머니의 마음은 물기 많은 안개처럼 촉촉해서 웬만한 상심 따위는 그 물기로 감싸 안는다. 게다가 백내장으로 눈이 흐려진 뒤에도 매일 똑같은 자리에 밥상을 차리고 반듯하게 신발 벗어놓고 가족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어머니는 안개의 부족이 아닐 리 없다. 안개에 관한 상상을 아름답고 공포스럽게 그려낸 문학작품들의 목록이 선연하지만, 박미라의 시는 어머니를 안개에 비유하는 상상력으로 안개에 대한 새로운 상상의 경지를 열어주고 있다. “몸속 어딘가에 안개의 늪을 품은 채/ 날마다 조금씩 지워지는 그녀”는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나이 들어가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아름답고 처연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흐린 수채화처럼 점점 더 아득해지며 그렇게 우리들의 어머니는 늙어가고 계신다. “손때 묻은 햇살 한 줌 수줍게 꺼내 보이며/ 배시시 웃는 그녀”의 모습에선 소녀적 어머니의 모습이 어리비친다. 뒤늦게 깨달은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박미라의 시는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다.
(신의 제단에 닿기 위하여 기어서 계단을 오른 적이 있다)
다세대 연립의 맨 윗층에 자리 잡은 신전 예고 없는 방문을 허락지 않는다 잠긴 문 앞에서 구원을 바라는 몸뚱이가 뜨겁다 헛간 귀퉁이에 세워 둔 빗자루처럼 헛헛한 한 시간 신전의 문이 열리고 말갛게 웃으며 나투시는 나의 유일 신.
불현듯 달려와 생각하면, 드릴 것이 없어 빈 손바닥을 낡은 부채처럼 펼치는데 땀내 나는 먼 길을 받아 안으시는 목욕 뒤의 머리칼에서 보리쌀 삶는 냄새가 난다
소리가 지워진 노모의 세계는 새벽 창문처럼 고요하여 천둥도 사랑도 다만 무늬일 뿐인데 자글자글한 주름살 고랑마다 말씀의 무늬가 마른 오이꽃처럼 흔들린다
머무르지 않는 것들은 모두 야속하다 ―「슬픔」 전문
제목에 ‘슬픔’이라는 말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는 시이다. 비유와 같은 장치를 통해 걸러 내거나 다른 수식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슬픔의 정도가 깊고 순일했다는 뜻일 게다. 오히려 아무런 수식을 더하지 않음으로써 슬픔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소리가 지워진 노모의 세계를 신전 드나들듯 하는 시인의 마음은 때늦은 안타까움 같은 것이겠다. 다세대 연립의 맨 위층에 자리 잡은 노모의 집을 신전에 비유하는 까닭은 대략 두 가지이다. 예고 없는 방문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며, 신전에 들어갈 때와 같이 절박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곳에 찾아가기 때문이다. “목욕 뒤의 머리칼에서 보리쌀 삶는 냄새가” 나는 노모의 세계는 소리가 지워진 세계다. 예고 없이 방문했을 때 잠긴 문 앞에서 “헛간 귀퉁이에 세워 둔 빗자루처럼 헛헛한 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것도 노모가 청력을 상실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소리가 지워져 “새벽 창문처럼 고요”한 노모의 세계에서 말씀의 무늬는 오히려 “자글자글한 주름살 고랑마다” “마른 오이꽃처럼 흔들린다”. 그곳엔 언어 이전의 언어가 있다. 소리가 살아 있던 시절 시인은 소리에 기대느라 몸의 말씀을 듣지 못했지만, 이제 비로소 어머니의 몸이 건네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살 고랑마다 패여 있던 말씀의 무늬가 그제야 시인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것이다. 머무르지 않는 것들은 야속하다. 더구나 그것이 기다려주지 않는 어머니라면 그 야속함은 두고두고 시인을 아프게 할 것이다. 소리를 잃고 시야를 잃은 채 점점 노쇠해져 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그녀 역시 우리 시에서 오랫동안 불려온 풍수지탄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슬픔을 아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영원이라는 불가능을 꿈꾸게 된 것도,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알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소멸의 힘 때문이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안개 부족의 일원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 안타까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 시간을 기록하는 자의 시선
박미라의 이번 시집에는 시간에 대한 사유가 유독 돋보인다. 과거를 향하는 많은 시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노래해 왔지만, 박미라의 시는 천년의 시간을 품고 영원의 시간을 꿈꾸면서도 현실과의 관련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박미라는 시인 자신을 시간을 기록하는 자로 인식하고 있다. 지워져가는 흔적을 기록하여 기억하게 하는 일이 시인의 몫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녀에게도 망설임과 등 돌림의 시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눈을 뜨면,/ 웅크린 역사 하나 응달쪽에 보일 것 같아서/ 잠결인 듯 눈 감고/ 아까부터 따라오는 냉이꽃”만 바라보는 외면의 시간이 그녀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무작정 뛰어내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의 주소를 수소문하게 될까봐”(「상처의 배후를 기록하다」) 애써 눈감고 지나가 봤지만, 결국 그녀는 상처의 배후를 기록하는 시인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썰물 뒤에 드러난 공룡 발자국 화석을 본다 금방 진창을 밟고 지나간 듯 물기 남아 있다 바다를 통째로 밀고 당기는 손으로도 지우지 못하는 당당한 흔적이다 눈앞에 선명한 물증을 보면서도 바다로부터 왔는지 바다로 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저 발자국은 또 다른 발자국을 찾아가기 위한 하나의 기호는 아닐런지
2 한 걸음 한 걸음 바위가 될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이 지나갔다 발바닥을 타고 번지는 습기에 뼛속까지 젖으며 그대로 주저앉아 흙이되자흙이되자 흐느낄 때마다 급하게 달려와 곁을 지키는 산맥과 누대의 자손을 보내어 안부를 묻는 풀과 나무, 새와 바람, 무심히 스쳤거나 존재조차 몰랐던 온갖 냄새들. 나는 그것들의 이름을 적어두기 위하여 백악기의 책력을 만든다 스스로의 살점을 천천히 저민다 누군가 강제로 수습해 간 나의 유골은 사실은 책력을 묶었던 질긴 끈이다
3 오늘 그대가 나의 책력을 펼쳐서 행간 속에 끼워둔 늙은 달빛과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한 이름들을 알아본다면 나는 발자국을 벗고 맨 처음 밟았던 젖은 흙으로 홀연히 돌아갈 것이다 끊임없이 별자리를 외우며 걸어온 방향을 바라본다 ―「백악기를 읽다」 전문
썰물 뒤에 드러난 공룡 발자국 화석을 보며 시인은 “바다를 통째로 밀고 당기는 손으로도 지우지 못하는 당당한 흔적”의 존재감에 새삼 놀란다. 눈앞에 선명한 물증을 보면서도 그것이 바다로부터 왔는지 바다로 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시인은 저 발자국이 “또 다른 발자국을 찾아가기 위한/ 하나의 기호”라고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억 3천5백만 년 전부터 약 6천5백만 년 전까지의 시기인 중생대 백악기에는 암모나이트, 공룡 등이 번성했다. 썰물 뒤에 드러난 공룡 발자국 화석을 보며 시인의 상상력은 백악기를 읽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바위가 될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이 지나”가도록 공룡의 발자국은 화석이 되어 남아 백악기를 증명한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흔적이 오래 전 이 땅에 공룡들이 살았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맥과 풀과 나무, 새와 바람, 무심히 스쳤거나 존재조차 몰랐던 온갖 냄새들도 이 땅에 생겨나 그 존재를 현시했다. 그것들의 이름을 적어두기 위하여 백악기의 책력을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시인이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살점을 천천히 저며 백악기의 책력을 만드는 데 시인은 온몸을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늘, 오래 전 시인이 남긴 책력을 펼쳐서 “행간 속에 끼워둔 늙은 달빛과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한 이름들을 알아”보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시인은 “발자국을 벗고 맨 처음 밟았던 젖은 흙으로 홀연히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그 누군가는 시인의 비밀스런 기록을 알아보는 독자일 것이다. 박미라 시인은 이렇게 후대의 독자와의 행복한 지음을 꿈꾸며 시를 쓰고 있다. 그녀가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한 책력의 행간까지 읽는 독자를 만났을 때 아마도 “또 다른 발자국을 찾아가기 위한/ 하나의 기호”는 완성될 것이다.
항아리를 닦다가 툭 쳤는데 터-엉, 쉰 목소리가 난다 누구지, 고개를 디밀고 아-아 부르니 동굴 밑바닥을 타고 천천히 돌아오는 아--아.
무엇인가를 담았던 기억은 아득하고 그 사이 몇 마리 거미가 다녀갔다 그 중에 몇몇은 잠깐씩 머물거나 눌러 살고 싶었던 듯 그물을 치던 흔적이 있다
바람도 돌팔매도 닿지 못할 장소를 찾아낸 거미의 황홀이 햇살처럼 묻어 있는 빈 항아리. 잠들 때조차 부릴 곳 없던 제 몸의 무게를 견고한 동굴 속에 던져두고 하늘을 등진 채 혹, 자살을 꿈꾸기도 했던 죽음의 문턱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허기에 나갈까 나가 버릴까 그물을 치다가 말다가 잘못 날아든 나방을 향해 깔깔 웃기도 했던 뱉어 낼 수 있는 건 오직 먹이를 위한 그물뿐인 생애를 저 혼자 이리저리 짚어보기도 했을 빈 항아리에 등을 기대고 지금은 없는 거미의 날들을 생각한다
아-아-아, 아-아-아, 등짝을 두드리다가 머리를 쓰다듬다가 까치발을 딛고 가듯 잦아드는 목소리. 숲은 숲대로 까무룩 잠들고 새는 제 부리를 허공에 문지르고 거미의 종적은 묘연하고 ―「거미가 다녀갔다」 전문
이제 시인의 상상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찾아 나선다. 아주 작은 기미 하나에서도 그녀는 누군가 살다 간 흔적을 찾고자 한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 때 그 존재는 의미 없이 사라지고 말지만,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그가 살다 갔음을 기억해 준다면 그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존재에 대해 시인이 느끼는 안타까움이 그 존재의 흔적을 더듬어 기록하는 역할을 기꺼이 맡게 했는지도 모른다. 항아리를 닦다가 툭 쳤는데 터엉, 소리가 난다.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 시인은 그 소리로부터 자신을 부르는 기미를 느낀다. 그래서 고개를 디밀고 아-아 불러 본다. 천천히 ‘아-아’라는 울림이 되돌아온다. 그 순간 항아리는 동굴이 된다. 텅 비어 있는 항아리에 무엇인가를 담았던 기억은 아득하고, 심지어 그 사이 거미도 몇 마리 다녀갔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그 기미 속에서 시인은 거미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물을 치던 흔적을 보며 거미의 행적을 뒤쫓는 시인의 상상력은 절정에 이른다. 처음 이 텅 빈 항아리를 발견했을 때 거미가 느꼈을 황홀을 가늠해 보기도 하고, 허기에 나갈까 고민하며 그물을 치다가 말다가 했을 거미의 망설임을 되짚어 보기도 한다. 그러다 잘못 날아든 나방을 향해 깔깔 웃기도 했을, 지금은 없는 거미의 날들을 빈 항아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한다. 거미의 종적은 묘연하지만, 거미가 다녀갔음을 기억해주는 시인이 있는 한 거미는 분명 그곳에 살았었다. 박미라의 시는 이렇게 잊혀진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시간을 기록하는 시인의 시선은 사라져 없거나 잊혀진 존재에게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한다.
우레 같은 숨소리를 다스리는데 백 년이 걸리고 눈과 귀를 버리는데 천 년이 걸렸다 버리고 지운 것이 그 뿐이 아니어서 겉과 속이 똑같이 살점도 가죽도 뼈도 아닌데
나는 어느 강물의 종족이었는지
선명히 남아 있는 실핏줄 아니어도 강물 한 굽이를 잘라낸 몸의 기억이 환하다 생각 깊어지는 한밤중이면 달빛 아래에서 출렁일 줄도 알고 한 마리 나비의 기척에도 살갗 파르르 떨린다 살점 어딘가에 깊숙이 숨은 채 마른 물줄기를 후벼 파는 기억 하나 있지만 오래된 것들은 닮아 가는지 통증도 이제는 견딜만하다
발바닥이거나 종아리쯤에서 실핏줄 하나 터졌는지 물소리 가만가만 들려오지만 풍화를 꿈꾸기에 나는 여전히 너무 무거워 또 다시, 천 년을 작정하고 禪定에 든다
피고지고피고지고, 몇 송이 풀꽃만이 누대에 걸친 이웃이다 ―「고인돌」 전문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고인돌은 전국에 분포해 있어서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오래 전의 무덤 형태가 기나긴 세월을 지나 지금까지 여러 곳에 남아 있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 말이 없는 저 고인돌 무덤에서 시인은, 긴 세월을 지나며 그것이 버리고 지운 것들을 떠올린다. “우레 같은 숨소리를 다스리는 데 백 년이 걸리고 눈과 귀를 버리는 데 천 년이 걸렸다”. 물론 저 거대한 침묵의 돌로 남기까지 버리고 지운 것이 그 뿐일 리 없다. “겉과 속이 똑같이” 단단한 돌로 남아 오랜 역사를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고인돌을 보며 시인은 자신의 기원을 생각해 본다. “나는 어느 강물의 종족”이었을까. 침묵하는 저 고인돌을 바라보며 자신의 기원을 더듬던 시인은 “살점 어딘가에 깊숙이 숨은 채/ 마른 물줄기를 후벼 파는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시인의 몸을 뚫고 간 상처 입은 기억은 아직 선명한데, “오래된 것들은 닮아 가는지/ 통증도 이제는 견딜만하다”. 시인 역시 단독자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피고지고피고지고” 하는 무수한 세월을 지나온 존재이다. 시인의 몸에는 오랜 세월을 변함없이 흘러온 강물이 흐르고 있다. 그녀는 풍화를 꿈꿔 보지만, 그러기엔 여전히 너무 무겁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고 “또 다시, 천 년을 작정하고 禪定에 든다”. 여기서 시인은 이미 고인돌이 된다. 그녀 역시 단단한 돌이 되어 이 땅을 스쳐 간 오랜 시간을 기록하고자 한다. 오랜 세월 피고지고 피고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몇 송이 풀꽃만이 누대에 걸친 이웃”이 된다.
4. 몸의 언어, 두드림
지난 세월의 흔적을 기록하기 위해 시인이 귀 기울이는 것은 몸의 언어이다. 소리도 잃고 시야도 잃어 점점 흐려지는 어머니와 유일하게 소통하기 위해서 그녀가 익혀야 했던 것도 몸의 언어였을 것이다. “허연 혓바닥을 길게 빼물고/ 철썩철썩 제 등짝을 두드리며”(「혀」) 노는 격포 바다의 아주 오래된 습관을 시인이 눈여겨보는 것도 “시화호 갈대숲 기슭에서 한곳을 바라보는 새떼들” 무리의 끝자리에 “빈 문장의 물음표처럼 뒤돌아선 한 마리”(「새여,」)의 몸짓을 쉽게 잊지 못하고 담아두는 까닭도 그 몸을 스쳐간 오랜 시간의 흔적을 기억해두고자 함이다.
2 몸이 없는 것들과 깊이 알고 지낸다 가장 오래 머문 것들은 아주 다른 두 이름이다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가만가만 혹은 격렬하게 두드리며 산다
떨림으로 가득하다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두드려 본다 벼랑인 듯 매달려 흔들리던 몸이 없는 것들의 흔적이 한 줄기 와디로 가슴을 흐른다 강물은 마음의 길을 읽을 줄 몰라서 사막을 건너는 한 마리 실뱀처럼 속으로 속으로만 파고드는데
부어오른 목젖을 확인하고도 어딘가 약에 쓰일 맹독이 있을 거라고 늙은 승냥이처럼 컹컹컹 울면서 갈비뼈 사이마다 두드려보는 너의 전갈은 오래된 천식처럼 집요하여 몸에도 마음에도 부릴 곳이 없다 ―「두드리다」 부분
기침은 이상하게도 저녁만 되면 더 심해진다. 저녁마다 기침에 시달릴 때 가슴을 탁탁 두드려 숨을 고르면 눈물 솟구친 경험을 한번쯤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두드림, 그것은 몸의 언어이다. “두드린다는 건 막막한 것들끼리 건네는 잠깐의 위로”이자 “어둠 속에서 더 잘 들리는 은밀한 말”이다. “밤새도록 목울대를 두드려 갈비뼈까지 흔들고야 마는” 기침도 목울대를 두드려 내는 몸의 언어이며, 기침을 멎게 하기 위해 가슴을 탁탁 두드리는 손길도 몸이 건네는 전언이다. 시인은 떨림으로 가득한 몸의 언어에 귀 기울이며, 기침으로 온몸을 두드리는 “너의 전갈”이 건네는 말을 알아들으려 애쓴다. 몸이 없는 것들도 우리 몸에 흔적을 남기고 온몸을 두드리는 몸의 언어를 건넬 줄 안다. 그 집요한 두드림이 우리 몸을 울림통으로 만든다.
감기약을 달인다 바짝 마른 약재를 불과 불꽃의 경계에 올려놓고 물의 비등점을 자꾸만 밀어낸다 끓는 물처럼 버글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달여서 만든 것들의 이름을 외워본다 진액. 진심. 진정. 진국. 풋것일 때의 향기를 그대로 풍기는 저들도 오래 왔을 것이다
초록이거나 붉은 혹은 노랑이었을지도 모르는 것들의 고혈을 쥐어짠다 죽음 속에 싸 두었던 검은 피 한 잔 그 구구한 기록을 훔친다 감싸 쥔 잔 속에서 잔물결이 인다 바람과 햇살의 뼈마디들이 한데 섞여 흔들리고 있다 목숨의 절정을 함께 견딘 것들끼리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툭툭 친다 몸 섞어 부비는 것으로 묵은 안부를 끝낸다
손바닥이 따듯해진다 바람 잦아들고 햇살 고요하다 열에 들떠 바작바작 타 들어가는 입술을 약 그릇에 댄다 뜨거움으로 뜨거움을 짚어가는 검은 피, 한 잔의 경건한 의식이다 ―「검은 피 한 잔」 전문
박미라의 이번 시집에는 일상의 체험으로부터 시적 순간을 포착해 건져 올리는 시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인용한 시도 감기약을 달여 먹는 체험을 통해 “목숨의 절정을 함께 견딘 것들끼리/ 몸 섞어 부비는” 경건한 의식에 대해 말한다. “풋것일 때의 향기를 그대로 풍기는” 저 오래된 것들의 고혈을 쥐어짜 달인 감기약을 시인은 “검은 피 한 잔”이라 부른다. 목숨의 절정을 함께 견딘 것들끼리 몸 섞어 부빈 검은 피 한 잔은 죽은 후에도 몸의 언어로 말한다. 손바닥이 따듯해져 오는 것은 그 몸의 언어를 알아차렸기 때문일지 모른다. “바람 잦아들고 햇살 고요”한 가운데 “열에 들떠 바작바작 타 들어가는 입술”과 검은 피 한 잔이 몸을 섞는 경건한 의식이 시작된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툭툭” 치는 두드림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아픈 몸은 서서히 치유될 것이다. 두드림, 즉 몸의 언어는 박미라에게 치유의 언어가 된다.
5. 초록 우주의 생명력
눈도 귀도 어두워지고 차차 살았던 흔적을 지워가는 것들이 몸으로 건네는 언어에 귀 기울이며 시인은 오랜 시간의 흔적을 더듬어 기록한다. 기록은 기억에 생명력을 부여해 잊혀가던 것들은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그렇게 박미라의 시는 우주만물에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생생한 초록 빛깔이다.
살얼음 낀 방죽에서 연밥을 딴다 씨방의 껍질을 찢고 그 안의 씨앗을 다시 깨뜨려 살점을 가르면 태아처럼 웅크린 꽃눈
천천히 고요해지는 찻물을 따른다 찻잔 가득 번지는 저 색깔을 무어라 해야 하나 아득한 이 향기를 무어라 해야 하나 연잎에 구르던 빗방울이, 꽃잎에 쌓였던 달빛이, 조금씩 덜어두고 간 입김 따위로 빚어진 아직은 흑백인 우주. 곰곰이 들여다보면 지금 막 초록으로 건너가려던 중인 걸 알겠다 자꾸 수그러지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찻물을 따른다 툭툭 튼 입술을 마른 땅 밟듯 지나서 뻘밭 속으로 몸을 옮기는 내 몸의 다음 생. ―「연자차」 전문
살얼음 낀 방죽에서 연밥을 따 “씨방의 껍질을 찢고/ 그 안의 씨앗을 다시 깨뜨려/ 살점을 가르면/ 태아처럼 웅크린 꽃눈”이 나온다. 연자차는 연밥 속의 씨앗을 가르고 그 안의 꽃눈을 꺼내어 덖어 끓인 차이다. 시력과 청력이 약해진 사람에게 좋고 불안 증세나 가슴 두근거림에 좋은 차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시인이 연자차를 끓여 먹게 된 데도 사연이 있을 법하다. 저 깊은 곳에 웅크려 앉은 꽃눈을 꺼내어 덖어 끓인 연자차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향기와 아련한 빛깔을 품고 있다. 시인은 그것이 “연잎에 구르던 빗방울”과 “꽃잎에 쌓였던 달빛”이 “조금씩 덜어두고 간 입김 따위로 빚어진” 것임을 이내 알아차린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연밥의 씨앗을 스쳐 지나갔을 무수한 시간이 우러나와 연자차의 빛깔과 향을 뿜어내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아직은 흑백인 우주이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지금 막 초록으로 건너가려던 중”인 것을 시인은 발견한다. 곰곰이 들여다보는 저 시선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줄 아는 시인의 시선이다. 박미라의 시선은 낡고 오래되고 사라져가는 것에 이렇게 초록 우주의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마침내 저 찻물이 몸속을 지나면 두 우주가 주고받는 몸의 언어에 의해 툭툭 튼 입술의 마른 생애에도 뻘밭 같은 축축하고 질펀한 생명력이 흐르게 될 것이다. 죽어가는 몸을 “다음 생”으로 옮기는 초록 우주의 생명력이야말로 박미라의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일 것이다. 희미해져 가는 안개 부족에게도 다음 생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저 초록 우주의 생명력에 가 닿은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