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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는 일제의 식민사관과 전통적인 중화 패권주의사관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훼손되었다. 더불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에 의해 우리의 고대사를 전설이나 믿기 어려운 후세의 위작으로 치부하고 있는 현실이다. 다행스럽게 재야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이러한 역사가 복원되고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연구에 필수적인 한문에 능통한연구자가 줄어들고 있어 앞으로가 더 걱정스럽다.
고구려는 중국의 만주는 물론 북경부근까지 진출하여 중국과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고구려가 마치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둔갑하는 현실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중국과 맞서 싸운 고구려의 산성이 중국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현장을 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필요한 것이고, 역사에 대한 해석과 기록이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역사학을 가지지 않는 나라에서 능동적으로 시대를 열거나 주도한 사실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구려 유적에 대한 향수가 마침내 실현되었다. 7월 21일(수) 인천항에서 중국 단동으로 가는 배편에 몸을 실었다. 오후 5시 출항한 배는 16시간의 항해 끝에 아침 9시경 단동동항에 도착했다. 짙은 안개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는데 다행히 동항에 거의 다가서 동쪽으로 북한 배들과 신의주가 어렴풋하게 들어왔다.
단동동항에서 단동 시내까지는 약 40분이 소요되었다. 동항은 여객항이라기보다는 화물이 주류를 이루는 물류기지로 보인다. 압록강을 끼고 새로 뚫린 도로를 달려 시내에 들어서니 강변으로 고층건물들이 즐비하여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의 경제력을 실감할 수 있다. 단동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 철교는 2개가 있는데 하나는 6.25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북한 방향으로 반이 잘려 교각만이 남아있어 전쟁과 분단의 상처로 남아 있다.
이른 점심을 마치고 시내를 빠져나가자 위화도가 보인다. 2-3층짜리 건물 여러 동이 단동방향으로 서있다. 중국이 등소평의 개방정책에 의해 경제가 발전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 사람들이 부러워했다는 건물이란다. 위화도는 이성계가 회군하여 조선을 건국하게 된 역사적인 장소이기에 낯설지 않다. 오늘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에 있는 유적을 돌아보고 백두산 아래 있는 송강하까지 갈 머나먼 여정이다.
위화도를 바로 지나자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썼던 의주의 통군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그려진다. 의주에서 열흘이나 장마와 홍수에 갇혀 있었던 지루함을 털고 압록강을 건너던 풍경도 눈에 선하다. 압록강 건너 아마 구련성부근에 상륙했을 것이다. 금나라와 원나라 때는 순검소가 있었고, 명나라 때는 진강부를 두었었는데 지금은 토성도 무너져 자취만 남았고 연암이 찾았을 때도 허허로운 상태였을 것이다. 열하일기에 의하면 중국의 책문까지는 여기에서 사흘이 더 걸렸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책문은 지금의 봉황산 부근 변문진이었다고 한다.
연암에 대한 생각도 잠시 오른쪽으로 옛날 우리의 박작성으로 추정되는 호산장성이 보인다. 호산장성은 백두산을 다녀와서 답사를 하기로 돼있어 먼 발치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다. 세 시간 반 정도 버스로 이동하여 집안에 들어서자 국내성터가 흔적만을 남긴 채 말없이 고구려 천년의 웅혼한 기상과 긍지를 전해 준다. 집안 시내를 지나 광개토대왕비를 먼저 찾았다.
조선 후기에 편찬한 ‘해동지도’에 압록강 위쪽에 황제묘가 있고, 그 옆에 커다란 석비가 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금나라나 요나라 황제비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집안을 금나라 오국성 이라 칭하였는데 송나라 휘종이 포로로 끌려와 억류됐던 곳이며, 오국성은 바로 고구려의 국내성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저명한 선비들이 왜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아마도 우리 것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불행하게도 광개토대왕비는 1870년대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의 첩보요원 사쿠오 중위가 금나라 황제비가 아니라 광개토대왕비임을 발견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를 세운 이는 장수왕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2년 후(414) ‘광개토경’이라 부르던 위대한 정복 군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 구화리에 6.39미터의 웅장한 높이에 무게만도 37톤에 달하는 거대한 응회암 비석으로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비의 네 면에 새긴 글자 수는 원래 총 1,775자이지만, 탈락되었거나 마모되어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141자가 있어, 이 글자에 대한 해독을 놓고 아직도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비문 내용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주몽)의 신비스러운 출생과 건국 이야기, 왕가의 내력, 호태왕(광개토대왕)의 치적, 비를 세운 목적을 둘째는 호태왕이 정복사업을 벌린 이유와 과정, 결과를 열거했으며, 셋째는 왕릉을 관리하는 묘지기의 규정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정복전쟁의 결과 거란과 백제를 정벌했고, 신라에 침범한 왜를 격퇴했으며, 동부여 등을 멸망시켜 정복한 지역이 총 64성 1,400촌이었다는 내용인데 이 부분을 둘러싸고 중국, 일본, 우리와 북한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가 서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대왕릉이 있는데, 현재 길이는 66미터, 높이는 14.8미터인데 평면면적으로 보아 장수왕릉의 네 배 정도 큰 규모로 추정되지만 많이 무너져 내려 본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아쉬웠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장수왕릉이 있는데, 거대한 장방형 돌로 쌓은 7층짜리 웅장하고 빼어난 조형물이 대지를 발판 삼아 하늘을 떠받치듯 우뚝 서 있는데 절로 탄성이 나오며, 가히 장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장수왕릉은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잘라 쌓고 안으로는 돌로 채운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한 변의 길이가 34미터, 높이는 13미터인 건축물이다. 석재의 중량만 2만 톤 이상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무게를 견디게 하기 위해 능 주위를 5미터가량 파고 안에 자연석과 강돌을 다져넣었다고 한다.
돌로 무덤을 만드는 것은 고구려와 흉노의 특이한 풍습이며 한족에게는 볼 수 없다. 장수왕릉은 자연재질을 그대로 살린 그랭이공법을 사용해 축조했는데 돌의 원형을 살려가며 이를 맞추듯 접합시키는 방법으로 경주 불국사의 축대나 서산 개심사의 기둥과 주춧돌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석재 테두리에 볼록한 홈을 만들고, 윗돌을 맞물리게 해서 압력이 가해져도 밀려나지 않게 하는 홈파기와 위로 갈수록 조금 작은 돌을 사용하는 들여쌓기로 오랜 세월 원형을 유지해 온 것이다. 네 변에 거대한 돌을 세 개씩 기대어 세워 놓았는데 그 중 뒤쪽 가운데 하나가 없어져 기단석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12개의 돌은 십이지신상을 상징한다는 설도 있다.
왕릉 뒤에는 딸린 무덤이 5기 있었다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었다. 기단 위로 돌을 쌓고 상단은 고조선의 표지유물인 고인돌과 비슷한 형태여서 더욱 신비롭게 여겨지는데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후궁의 무덤이라고 하나 정확한 사실은 아니고 장수왕과 함께 나라를 지켜온 신하들의 묘라는 설도 있다.
답사를 마치고 집안 시내로 나와 묘향산 이란 북한 음식점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6시간을 달려 밤 12시경 송강하에 도착했다.
23일(목) 아침 7시 호텔을 나섰다. 백두산은 이미 세 번이나 다녀온 곳이다. 서파가 처음 개방됐을 때인 1999년 야생화 탐사팀과 처음 방문했고, 뒤에 적십자주부산악회원들과 그리고 세 번째는 종자명장인 장형태 친구와 북파에서 서파로 종주했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다.
서파 산문방향으로 가니 백두산 공항 표지판이 보였다. 중국은 장백산이라 부르는데 지금 개발의 열풍이 불고 있는 것 같다. 도로도 많이 개선되고 접근이 용이해졌으며, 중국인 관광객도 훨씬 늘었다. 송강하를 처음 찾았을 때는 산촌이었는데 지금은 버젓한 도시가 되었고, 이도백하도 마찬가지였다. 백두산 산문입구까지만 버스운행이 허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문을 걸어서 넘어 깨끗한 셔틀버스를 타고 짚차를 타는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 서둘렀으나 연변방향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북파 등정은 해발 2,600미터 높이의 기상관측소까지는 짚차를 이용하고 거기에서 10분쯤 걸으면 바로 천지를 볼 수 있다. 산의 정상이라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시장처럼 붐볐다. 천문봉(2670m)에 올라 겨우 사진을 찍고 서둘러서 내려와 철벽봉(2660m) 방향으로 천지를 향해 하산했다. 급경사를 내려서자 완만한 능선 길이 나오고 천지가 훤히 보인다. 철벽봉 지나 승사하를 향해 급경사 너덜 길을 내려섰다. 이미 천지가에는 우리보다 앞서 내려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인다. 낙석에 주의하도록 동행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30여 분을 내려서니 천지물이 달문을 통해 장백폭포로 흐르는 승사하다. 물이 많이 불어 신발을 벗고 승사하를 건넜다.
백두산은 내가 어렸을 적에는 사화산이라고 배웠는데 사실은 휴화산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최근 주장에 의하면 2014-2015년에 폭발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주장은 최근 백두산에 잇따른 지진으로 1999년 백두산 인근에 화산관측소를 설치한 중국 지질학자들의 연구결과다.
2002년 6월 중국 동북부 왕청현에서 발생한 진도 7.3의 지진과 백두산 천지의 지형이 솟아오르는 현상, 2009년의 5월 25일 백두산 주변에서 발생한 진도 4.7규모의 지진, 2010년 2월 18일 두만강 하류 러시아와 중국국경 부근에서 발생한 진도 6.9규모의 강진 등이 사례다. 과거 946년과 947년의 백두산 분화는 세계 화산폭발기록 역사상 다섯 번째 안에 드는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어 1014년-1019년, 1122년, 1176년, 1199-1201년, 1217년, 1373년, 1401-1406년, 1597년, 1668년, 1702년, 1903년 분화한 기록이 있다.
946년 발생한 백두산의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역사학자들은 발해 멸망이 926년으로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보이지만, 지질학자들은 화산의 특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반박하고 있다. 화산의 대폭발은 수십 년 전부터 분화를 시작하기 때문에 농작물의 냉해와 기근이 발생해 민심이 이반된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이번에 백두산이 폭발하면 반경 100km정도는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여기에 천지에 있는 20억t의 물이 함께 쏟아지면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규모가 될 것이며, 함경도와 블라디보스톡 심지어 일본 북부까지가 영향권에 들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아직은 잔잔한 천지를 뒤로 하고 장백폭포 방향으로 내려가다 용문봉(차일봉, 2596m)을 향해 급경사 너덜 길을 치고 올라갔다. 장백폭포 회랑입구가 낙석으로 막혀 길을 폐쇄했기 때문이다. 40여분 급경사 길을 치고 오르니 너른 초원이 나왔다. 이곳에서 왼쪽으로는 서파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소천지로 내려간다.
바람이 심상치 않아 길을 서두르자고 재촉하지만 모두들 지치고 또한 주변 조망이 좋아 떠나고 싶지 않은 지 태연자약하다. 조금 있으니 우박만한 소나기가 쏟아진다. 급히 우의를 입고 길을 재촉하는데 30여 분 지나니 마침 장백폭포 아래 온천장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와 소천지로 갈 계획을 바꿔 급경사 길을 내려섰다. 온천주차장 역시 많은 사람들이 장백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오후 6시가 다되어서야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게 되었다. 옷은 젖었고, 다리는 아프다하니 모두들 처량한 모습이다. 음식을 보자마자 게걸스럽게 먹어댄다. 그러나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 올라 좋은 날씨 만나 천지구경을 실컷 했으니 그 복 또한 대단하지 않는가.
일행 중 늦은 사람들이 있어 7시가 되어서야 이도백하를 출발할 수 있었다. 오늘 여정이 통화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지난한 시간이 될 것 같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12시가 넘어서야 통화현의 호텔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24일(토) 모처럼 늦은 시간에 호텔을 출발했다. 본래 길로 가면 환인까지는 1시간 반이면 족한데 도로공사 중이라 신빈만주족자치구를 거쳐 환인으로 가는 길을 택하다보니 세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신빈만주족자치주는 후금(후에 청으로 바꿈) 초대황제 누루하치의 고향이다. 옛날 고구려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누루하치를 기리는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환인의 오녀산성을 찾았다.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오녀산성 서문에서 답사를 시작하였는데 급경사의 계단과 지그재그로 완만하게 이어진 두 개의 계단이 하늘을 향해 이어진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 천창문이란 암벽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서니 남문 터가 나오고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역사서에 의하면 주몽이 부여를 떠나 뒤쫓아 오는 부여군을 엄리대수에서 따돌리고 비류수까지 왔지만 언제 부여의 추격대가 닥칠지 알 수 없어 우선 비류수 위에 옥사를 지어 궁실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녀산성은 임시도읍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오녀산은 깎아지른 험한 산세지만 정상은 평평하고 샘도 있어 천혜의 난공불락인 곳이다.
점장기를 향해 오른쪽 길로 접어드니 건물 터가 나오고 곧 혼강을 조망할 수 있는 태극정과 천지가 나오고 또 다른 건물 터와 군사들의 숙영지가 군데군데 무리지어 있었다. 동쪽 끝에는 요녕제일경이란 부제가 붙은 점장기가 있다. 해발 804m라는 설명이 있는데 아득한 절벽 아래로 댐에 갇힌 태극모양의 푸른 혼강의 유유자적한 흐름을 보면서 주몽도 이곳에서 고구려 천년의 대업을 꿈꾸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점장대를 지나면 소점장대가 나오고 곧이어 일선천이라 이름 붙은 급경사 계단을 만나게 된다. 과연 이렇게 입구가 절묘해서 난공불락의 성이 되었구나하는 감탄과 어떻게 이런 장소를 찾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일선천은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잔도가 나 있는 길이다.
그런데 이 난공불락의 천혜의 산성을 정복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성계 장군이다. ‘동국통감’에 따르면 공민왕 19년(1370) 정월 이성계는 기병 5천과 보병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을 정벌했는데 여진족 장수 고안위가 오녀산성에 진을 치고 끝까지 저항하다 결국 밤중에 밧줄을 타고 도망갔다고 전한다.
일선천을 내려서서 오른쪽 길을 따르면 동문이 나오고 계속 내려가면 남문이 나오면서 오녀산성 답사가 끝났다. 오녀산성에서 나와 환인의 고려성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했는데 모처럼 맛있게 식사를 했다.
환인을 뒤로 하고 단동을 향해 출발했다. 도중 우모오진을 지나는데 이곳에 오녀산성과 비슷하다하여 자매산성으로 이름 붙여진 성정산성이 있다고 하는데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가 황조암 암벽에 음각되어 있다고 한다. 환인과 단동 중간 쯤 관전현을 지나게 되는데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주요근거지 중의 한 곳이다.
압록강이 보이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단동에 들어섰다. 압록강 철교와 단교가 우리를 반겨준다. 시간은 8시가 다되어 어둠이 밀려온다. 호텔 옆 식당에서 저녁을 하고 압록강변을 거닐며 중국인들의 일상을 살폈다.
25일(일) 아침 일찍 압록강 유람선을 탔다. 많은 중국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압록강 철교를 중심으로 북한 땅 가까이 다가가 우리의 산하를 마음에 담았다. 한편으론 마음이 아프고 시리다. 그곳에 정박된 배는 이미 낡은 목선과 철선이었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지도자의 탓이기도 하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마지막 답사장소인 호산산성을 찾았다. 호산성터로 알려진 곳에는 현재 명나라 때 쌓은 장성이 복원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이 호산장성을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중국측의 의도일 뿐이다. 실제 이 성은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추정된다. 박작성은 648년 당과의 전투에 등장하는 성으로 압록강 본류와 애하가 만나는 수운교통의 요지임을 알 수 있다.
일행들은 북한 땅에 바로 맞닿은 일과보라는 곳을 보고 주차장으로 온다고 하여 나 홀로 산성 정상으로 올라갔다. 역시 산성은 정상에서 보아야 주변 지형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당 태종의 설만철이 결국 박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을 만큼 험준한 산세와 압록강과 애하의 자연지형을 이용한 요지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주위 지형은 3면이 압록강과 애하에 쌓여 있고 한 면은 산에 의지하여 공략이 쉽지 않은 장소임을 알 수 있는데 인근 구련성과 애하첨성과 호각지세를 이루며 압록강 건너로는 의주와 인근 고을들이 보이고 단동인근의 너른 들이 훤히 보이는 훌륭한 전망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더 많은 유적을 답사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그래도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적을 보았다는 자위를 안고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다행스럽게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간직해 준 유적들이 더 훼손되기 전에 우리의 역사를 복원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과 좀 더 많은 우리 국민들이 답사했으면 하는 기대를 하며 답사기를 마친다.
광개토대왕릉(집안)
광개토대왕비
국내성 터(집안)
신의주 풍경
신의주 풍경
압록강 철교
압록강 단교
오녀산성 오름길
오녀산성 일선천
장백폭포
장수왕릉
오녀산성 전경
호산장성(박작성)
호산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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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