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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와그너의 미네아폴리스 기별을 회고함
I. 중대한 예비적 요소의 연속
1. 열쇠가 되는 표현과 더 큰 의미
미네아폴리스 건너편에 있는 추억과 여파로 들어가지 전에 잠시 멈추어 와그너의 기별의 어떤 기본적 특성과 결정적인 구절을 충분히 회고해 보자. 우리 앞에 있는 엘렌 화잇의 말과 참석한 관찰자들의 증언을 가지고 와그너의 근본 목적과 진행 등 그가 참으로 성취하려고 기도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해 보자. 그의 주요 서적 그리스도와 그의 의에 나타난 대로 그의 주요 표현을 적당히 살펴보자. 사용된 분명한 문장에 빛을 던져주는 배경을 살펴보자. 우리는 또한 와그너의 놀라운 연구에서 한 문제가 된 어떤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솔직히 살펴보자. 왜 와그너가 어떤 문구를 사용했는가? 그가 실제로 그것으로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가 반대하는 견해와 다리를 만들어 연합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었는가? 혹은 어떤 것에 응수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혹은 둘 다 뜻하는 것인가? 그가 스스로는 항상 자기 자신이 한 말에 관하여 항상 명백하고 조직적인가? 다른 말로 해서 그는 아직도 새로운 중대한 사상을 표현을 하고 있었는가?
2. 엘렌 화잇의 지지의 의미
그러나 먼저 다른 각도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엘렌 화잇의 와그너의 제시에 대한 전례 없는 지지의 의미와 의도이다. 하나님께서 1888년 와그너의 연구 위에 어떤 빛을 비추도록 부인에게 계시하셨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네아폴리스에서 와스너의 최고의 빛과 뚜렷한 말 이상으로 어디까지 화잇 부인의 마음을 인도하셨는가? 특별히 그 당시 재림 신도의 어법, 사상, 강조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그의 건전한 사상의 어떤 점들에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는 말 물론 그 말은 멀리 미치고 불가피한 역사적인 함축성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들과 다른 요령 있는 관점은 저들 자체의 취지가 있고 그 진실한 역사적 제시 위에 빛을 던진다. 이 모든 것은 더 깊은 회고를 요청한다. 와그너의 영구적인 영향 때문에
3. 의의 기별의 필수 요건
우리가 와스너의 연구를 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을 꿰뚫어 볼 때 필요불가결한 접들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강조를 위하여 익숙하고 효과적인 교육상 반복의 원리를 적용하여 그는 원래 교사였다. 와그너는 끊임없이 일정한 어군 - “신성의 모든 충만함” 을 그리스도의 전능한 초월성과 절대 신성에 대한 결정적인 관념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자주 기쁜 소식 중에도 변함이 없이 계속된다. 그것은 그의 중추적인 사상이었다. 그는 이 확신을 인상 깊게 그리고 끈질기게 철저히 납득시켰다. 그것은 협소한, 피조 된 그리스도, 제한된 파생된 그리스도, 그리고 한정된, 종속적, 예속적인 그리스도라는 Arian의 견해를 일소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모든 충만함과 충분함 중에 계신 그리스도는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고 와그너는 느꼈다. 그 총회에서 어떤 이들의 혼돈된 관념은 그를 크게 걱정하게 했다. 그 그릇된 견해를 그는 반드시 교정해야 한다고 매셨으며, 성서적 진리를 확립시키려고 애썼다. 그것이 뒤에 올 모든 것의 기초였다.
4. 신성의 충만함 사상을 위태하게 하였다
와그너가 끊임없이 강조했던 이 성서에 기초된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란 말은 어떤 이들의 완고하게 주장하고 옹호하는 그리스도의 최고의 의미에서 완전한 하나님, 영원부터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근본적 필수 요건을 중화시키고 무효로 만들고 헛되게 만든다. 이런 종류의 그리스도만이 그의 완전하고 본질적인 의를 위하여 충분한 힘과 효력을 줄 수 있다. 그의 주제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였다. 고로 그의 최초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절대 신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어떤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반 Arian적 견해를 분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와그너가 미네아폴리스 연구를 시작할 때 강조하게 된 것은 최고의 가장 충분한,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타당성이었다. 그렇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그의 주요 부담이요, 주요 강조를 위한 기본적인 필수 요건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가 그것을 신령한 요구에 응할 수 있고 우리 구원과 회복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필수적인 의를 분비한다. 그것을 확립한 다음에 와근는 그의 교훈의 주요 목적, 증언한 목표로 그 모든 충만함 중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으로 전진 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Arian과 반 Arian 견해를 분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와그너가 미네아폴리스 연구를 시작할 때 강조하게 된 것은 최고의 사장 충분한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타당성이었다. 그렇게 먼저 취급한 분명한 이유이다. 믿음으로 주장한 그런, 그리스도의 완전히 충분한 필수적인 의를 준비한다. 그것을 확립한 다음에 와그너는 그의 교훈의 주요 목적, 증언한 목표로 그 모든 충만함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으로 전진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Arian과 반 Arian을 지지하는 어떤 이들의 노발대발하는 반응을 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주요, 교리에 부딪히게 되었는가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와그너의 개인적 친구들과 동료들 중 총회에 참석한 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목적과 진행을 아는 자들이 한 말이다.
Ⅱ. 와그너 기별의 핵심을 푸는 주요 열쇠
1. 미네아폴리스 묘사의 주요 목적
의문의 여지없이 1888년 와그너가 제시한 전체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결정적인 구절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이다. 그의 연구는 기초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채우시는 초월적인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필수적인 의이다. 그 간단한 부분, 여기에 하선한 부분은 와그너의 중대한 공헌의 내적 핵심을 여는 주요 열쇠를 제공한다. 그의 기본적인 논리를 제시하는 주요 구절과 수긍이 가는 이유를 요약하면 아내와 같다. 최고의 가장 충분한 의미에서의 영원한 신성 하에 속하는 인격의 완전하고 본질적으로 한 분이신 초월적인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채우시는 창조주, 입법자, 속죄 희생, 구속 주, 심판장, 중보자, 의롭게 하시는 분, 거룩케 하시는 분, 영화롭게 하시는 분, 오시는 주가 될 수 있다. 오직 그러한 분남이 흠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죄인이 충분히 변화되고 전신갑주를 입고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필수적인 온전하고 완전히 적합한 의의 근원이 되실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신성한 의 그가 지상에 육체로 계실 동안 이루신 의의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 발견되고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
2. 중추적인 문장이 여기 재현되었다
주의 깊게 아주 자세히 구절구절 연구하면 이 주요 구절의 충분한 뜻을 알 수 있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창조주와 입법자로서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동등이신 신성의 모든 특성을 소유하신 신성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은 속죄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힘이다. 속죄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것 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인도하도록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벧 3:18). 그러나 만일 그가 하나님과의 동등에서 한점이라도 부족하다면 그는 우리 중에 인도할 수 없다. 신성은 신성의 특성들을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신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단지 한 인간의 희생을 소유한 것에 불과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주에서 최고의 고조된 지성적 존재라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에 자기 자신의 의무 이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율법에 충성해야 할 한 백성일 것이다. 그는 남에게 나눠 줄 의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창조된 최고의 천사와 하나님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최고의 천사는 타락한 사람을 향상시킬 수 없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할 수 없다. 천사들은 봉사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구속하실 수 있다. 우리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 이 진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좀 더 완전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그를 통해서 신의 뜻과 신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말하자면 신성의 대변자요, 신서의 나타남이시다. 그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알리시고 알게 하신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충만함이 거하시는 것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나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을 통해서 비취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창조주와 입법자로 높임을 받으실 때 아버지께서 두 번째 지위로 좌천되지 않는다.
이것이 와그너의 역사적인 기별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의 내적인 핵심이다. 그의 적대 적합성, 그의 무한한 매력과 능력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남들에게 나눠 줄 의가 없다. 그런 초월적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 자신의 완전한 의를 거저 주고 나눠주실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하신다. 이런 개괄적 기초적 이해를 가지고 그의 모든 충만함 중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모든 충만함 중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제시가 명백히 드러난다. 그것이 와그너의 기별의 핵심이요, 본질이다. 그리고 진행이다.
3. 숭고한 충만함은 엘렌 화잇을 감동케 했다
엘렌 화잇은 8개월 후에 나와 내 남편 사이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맨 처음 가장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매력의 이 숭고한 높임이었다. 그것은 놀라운 선언이요, 찬사로 보증이었다. 부인은 그것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인정했다. 매우 명백히, 부인은 하나님이 계시는 중에 그것을 내게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제시했을 때 거의 심장의 매 고동마다 아멘이라고 했다고 감명 깊게 선언한 이유이다(원고 5, 1889; 6, 17 로마 N. Y.에서). 그것이 부인의 현저한 증언이었다.
Ⅲ. 와그너가 사용한 신성의 의도
1. 신성 묘사의 주요 열쇠
언급한 바와 같이 신성이란 단어는 위에 인용절에서 3번, 와그너 책에서 되풀이하여 사용한 중추적인 단어이다. 그것은 그의 의미를 이해하는 주요 열쇠이다. 신성이란 말은 K.J.V.에 있는 3번(행 17:29, 롬 1:20, 골 2:9)에 나온다. 그리스 어원에서 약간 다른 차이가 있는 한편, R.S.V.에 가 경우에 “deity"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낱말은 정상적인 영어 독자에게 그리스어의 뜻을 아주 적합하게 표현한 것이다. "godhead"라는 영어는 Mtlimtok와 Strong은 신의 본성과 본질이라고 정의한다. Oxford 영어 사전에는 신성(godhead)은 God 또는 a god의 본질, 신의 본질, 본성, 신성이다. 이 의미에서 godhead라고 한 말은 우리 현대인의 귀에도 deity가 참 뜻을 더 잘 표현한 것으로 들리지만 하나님의 어원의 적당한 번역이다.
2. "godhead"라는 말의 의도
godhead라는 말의 또 다른 정의는 Merrian Webster 사전에 2번째 의미로서 한 신성, 삼위일체 중 한 분, 신학, 하나님의 본질은 삼위일체라고 생각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 단어를 삼위일체의 뜻으로 사용함은 보통 우리 교회 전 역사를 통해서 S.D.A.에게 통상적이었다. 아마도 우리 지도자들과 초기의 신자들 중에 반 삼위일체론 자들의 영향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아니지만 분명히 와그너는 우리가 방금 인용한 말 중에서 몇 줄 더 내려가서 그는 그가 골 2:9을 인용할 때 신성의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한다. 이 복합 명사의 사용에서 그는 엘렌 화잇과 대등한 지지를 가지고 있다. 예언의 신에 신성에 관하여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이 되셨으나 신성은 아직도 그 자신의 것이었다. 그의 deity는 그가 충실히 서 있고 충성하는 동안 상실할 수 없다(5BC 129). 그리스도는 그가 인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심을 중지하지 않으셨다. 그가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었을지라도 신성은 아직도 그의 것이다(DA 663, 664). 원수는 하나님의 인성 안에 있는 신성으로 정복당했다. 구주의 신성의 능력은 감추었다(5BC 1108).
3. 전 상부구조를 위한 기초
와그너는 그리스도는 신성의 한 부분인 삼위일체의 제 2위이시다 라고 명백히 선언한다. 그는 아버지와 모든 점에서 동등이요, 그와 동등에 있어서 한점도 부족하지 않다고 제시한다. 그것은 와그너가 그의 전체 상부 구조 거기에서부터 직접적으로 필연적으로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구체화되신 그런 그리스도의 의의 필요성을 소위 그의 기별의 주요 부담을 피력하는 세우려는 기초적 견해이다. 그것이 그의 제시의 진수이다.
Ⅳ. 완전히 동등 - 모든 특성들과 모든 충만함을 소유함
1. 완전한 신성에 특별히 강조함
와그너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의 선언에 포괄적 특별한 강조를 한다. 그의 독특한 묘사를 한 번 더 주목해 보자. 신성의 모든 특성을 소유하시고 모든 점에서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 됨에 있어서 한 점도 부족하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신다(p. 43, 44).
2. 그 견해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와그너는 그 후에 그의 저서 “창조 중의 복음”에서 그 같은 분명한 표현을 사용했다(1893, p. 147, 157).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쓴 지 10년 후인 1900년의 “기쁜 소식”에서도 같다. 이것들은 참으로 그의 1888 연구회 부록 같은 부분이다. 이 선언한 견해에서 와그너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관하여 그가 이 신중하게 선택한 표현, 그의 흔들리지 않는 으뜸가는 사용은 항상 무시할 수밖에 없다. 와그너가 다른 곳에 사용한 다른 표현의 짝의 인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들에 관해서는 더욱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자 이제 잠시 다른 그리스도인 학자들의 사상을 살펴보자.
3. 영원하신 하나님의 바른 그 본질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골 2:9을 그의 그리스도 안에는 단순히 신성의 한가지 혹은 여러 가지 특성이 거하지 않고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 거한다. 신성의 충만함은 성육신 전에 그리스도안에 있었다(요 1:1, 18.; 빌 2:6). 성육신 한 동안은 물론(오 1:14, 18; 요일 1:1-3) 그리고 그것은 그의 영화된 신성의 인격 속에 끝없는 세대에 항상 영원히 거할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안에 본래 존재하는 본질적 신성 단순히 신성의 특성들만이 아니라 신성의 본질 자체에 관해서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 존재의 모든 시대에서부터 모든 시대까지의 영원한 고유의 화신이다(Marrin R. Vincent, 신약에 있는 말씀 연구. 1890, vol. 3, p. 487). 이것은 와그너가 계발시키고 거듭 역설한 것과 같은 사상이다. 그것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전체 기별의 기조이다.
4. 참으로 인상 깊은 부가적 증거
그 모든 충만함 중에 그 신성이 그리스도 안에 참으로 성육신 한 것은 각 추가하는 표현으로 부가적으로 확립된다. 저들은 모두 놀라운 사실을 이룬다. 와그너의 표현에 나타난 대로 합성어와 어군과 집합적인 의미를 분석해 보라. In Him - 그 위에 강조한다. “dwellwth”(거한다) - 영구적으로 거한다. 과거 현재 미래 변하는 표현이 아님.
“신성의 충만함” - 신성의 충만함, 완전함,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 존재의 온전한 한없는 능력과 특성들을 신성의 온전한 본징, 본성, 존재, 전능함이다. 그 문장의 포괄적인 범위는 시간, 공간, 능력ㅏ의 한계가 없다.
"Bobily" - 성육신에 있어서 모든 충만함이신 영원하신 말씀이 육체 속에 거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지상 생애의 영화된 유형적 인성을 이제와 영원히 신성의 충만함과 함께 지니고 계시다. 와그너가 그 총회 회중 앞에 그의 확신을 역설하기 위해 사용한 문장을 다시 자세히 연구하라. 그 다음에 이후에 기록한 성전에 게시된 신성의 고유의 특성들의 당당한 명단을 살펴 보라.
5. 하나님의 고유의 특성
하나님은 실제로의 신성의 고유의 특성들은 하나님의 본성과 존재와 분리된다. 이 특성들은 다만 인간성 묘사일 뿐만이 아니라 성서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계시함을 통해서 알려진 신의 본성의 진정한 표현이다. 저들로 신성의 연합 안에서 피차 조화 있게 자존성, 완전성, 전능, 무소부재, 예지, 통치권 등으로 인식된다. 도덕적 특성들은 보통 거룩, 의, 공의, 지혜, 진리, 신실, 자비, 인자, 사랑, 은혜이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와그너의 제시는 이상에 열거한 것으로 기록된다. 신의 직무의 당당한 열거 - 이 특성들에다가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하나의 유일한 신인, 속죄 희생(속죄, 화목, 화해. 대속), 의롭게 하시는 분 거룩케 하시는 분, 영화롭게 하시는 분, 사람의 구세주, 죄의 용서하시는 분, 생명의 왕, 000을 주는 분, 중보자, 심판장으로 오시는 왕이시다. 얼마나 찬란한 묘사인가?
이상은 그리스도의 특성이요, 그 의 무한한 특성이요, 와그너가 제시한 매력이다. 그런 그리스도는 최고의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다. 그런 그리스도는 와그너가 제시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필수적인 의의 근원이시다. 눈부신 이름과 칭호들 - 와그너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수많은 이름들과 명칭들과 칭호들을 열거한다. 완전수와 그 범위는 놀랍다. 말씀에서 모은 주석을 붙이지 않은 이 눈부신 명단을 자세히 살펴보라. 대언자(요일 2:1), 전능하신 자(계 1:8), 알파와 오메가(계 1:8),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히 12:2),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과 끝(계3:14, 22:13),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생명(요일 5:20), 신실한 증인(계 1:5), 처음이요 나중(계 1:8, 2:8, 22:13), 신성의 충만함(골 2:9),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딤전 3:16),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딤전 2:3),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마 1:23), 크신 목자(히 13:20), 교회의 머리(엡 5:23), 대제사장(히 4:14), 거룩하신 분(행 3:14),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막 1:24), 구원의 뿔(눅 1:69), 만왕의 왕(딤전 6:15, 계 17:14), 생명(요 14:6), 빛(오 8:22), 만주의 주(계17:14, 19:16), 하늘에서 오신 왕(고전 15:41), 영광의 완(약 2:1), 모든 사람의 왕(롬 10:12), 메시아(요 1:41), 생명의 왕(행 3:15), 화목제물(요일 2:2), 부활의 생명(요 11:25), 의로운 재판장(딤후 4:8), 의(고전 1:30), 거룩함(고전 1:30), 구주(죽 2:11), 세상의 구주(요일 4:14), 목자(막 14:27),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25), 보증인(히 7:22), 참 하나님(요일 5:20), 참 포도나무(요 15:1), 진리(요 14:6), 말할 수 없는 선물(고후 9:15), 길(요 14:6),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계 1:4),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 말씀(요 1:1), 하나님의 말씀(계 19:13), 생명의 말씀(요일 1:1), 생명의 떡(요 6), 생수(요 4), 의로운 해(말 4). 이상이 와그너가 높이고 제시한 그리스도이었다.
6.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신성의 최고의 충만함
최고의 묘사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으로 항상 제시된다. 이것은 영감에 의하여 신성에 함유된 모든 것의 총체를 표현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안에 구체화 된 것을 사용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강조적인 무구이다. 아버지와 성령 안에도 꼭 같은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거한다. 그가 성육신 하는 동안에 신성과 인성의 영합이 그리스도 안에만 혼자만 유독히 있다. 그 안에는 절대적인 신성이 내포되어 있으시다. 여하간 피조된 혹은 파생된 존재에는 그것이 없다. 최고의 성서의 충만함이 원래부터 그의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하나님에 관하여 최고의 관념에 포함된 모든 것 그리고 하나님을 구성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거하고 지상에 계실 동안 그의 육체적인 형태와 인격과 관련되어 그 안에 나타났다.
Ⅴ. 바로 본질이란 와그너의 낱말이 결정적인 증거
1. 아버지와 같은 본질 몇가지 그리스도
우리는 이제 와그너의 결정적 증거들의 다른 것을 살펴보자 이를 위하여 의미를 상실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중요하다. 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바로 본질과 본성이라고 명백히 선언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바로 그 본질의 본성에 의한 존재” 그리고 그 자체 속에 생명을 가지시고 그는 마땅히 자존자, 여호와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이 표현 “바로 그 본성” 은 Arian 사상을 거세하기 위하여 총체적으로 반대했던 Athanasianism(아타나시우스 주의) 삼위일체론의 바로 핵심이다. 그것은 A.D. 325년에 Nicea 회의에서 대결되었던 Arian 논쟁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간다. 그 때 거기서 신성의 제 2위이신 존재, 본성, 본질을 정리하기 위하여 같은 본질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 반복되는 표현 바로 그 본질 그 많은 말보다도 자기 견해를 더 잘 강조했다.
2. 가치를 감소시키는 Arian사상에 대한 공격
Arius와 Arian주의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영원성 동등, 같은 본질이라는 것을 부인했다. Arian주의로 하나님만이 무한하시고 시작이 없고 아들은 안 계셨을 때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주의는 아버지만이 충분히 하나님이시오 아들은 하위기 되셨고, 영원하지 않다. 아들은 피조된 존재요, 하나님 아버지 다음 지위요, 그는 실상 파생되고 유명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Arianism은 그리스도의 참 절대적인 신성을 부인했다. 그런 제한된 가치로 감소시키는 사상은 도전을 받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최고 신성은 그리스도 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00논쟁에 중대하다. 이것을 와그너는 깊이 느꼈다.
3. Arianism은 “같은 본질” 사상을 부인함
Arian주의는 “같은 본질(Homoi-ousios)”를 Arianism은 완강히 거절했다. 사상을 부인하고 단지 비슷한 본질을 주장했다. 그것은 본질의 동일성을 부인했고 혹은 바른 그 본질을 부정함. 와그너가 여기서 2번 주장함). 놀랍고 의미심장한 일이 꼭 5년 후에 1890년에 엘렌 화잇이 그 같은 낱말 - “한 본질” 1888년에 와그너가 사용한 말과 같은 말을 사용함으로 있었다. 이곳에 부언한 말이 있다.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고 말씀했을 때 신성이 인성을 통해서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깊은 의미로 충만한데 그는 자기와 아버지는 같은 본질 같은 특성들을 소유했다고 주장한 것이다”(Signs, No, 27, 1893, p. 54). 와그너와 그 동료들은 Arian과 반 Arian 견해를 모두 명확히 배격했다. 이것은 그의 주요 논리를 이해하는데 중단한 역할을 한다.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초월적인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해하는데 그것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통한 타당성이 있고 효과 있는 구속에 관한 그의 온전한 사상에 대한 기초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연구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Ⅵ. 신성의 명위가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1. 와그너는 연구를 쌓은 주의 깊은 태도로 말했다
와그너의 사상에서 나타난바 신성이란 말은 의심할 수 없이 신성의 구성의 복수 -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완전한 연합과 협조적인 구속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와그너는 신학자였고 신학적 용어를 잘 알고 있었고, 신학 서적을 넓게 읽었다. 그는 신성을 구성하는 삼위일체의 신성을 확실히 믿었다. 그리고 그 말의 구성 중에 그는 첫째, 둘째, 세째 신성을 동등, 동질성으로 인정하여 Arian 주의 반대 논리와 직접 대립되는 일찍이 제시한 것 주에 논리를 효과적으로 전개했다.
2. 속죄의 필수적인 기초
와그너는 신성의 삼위의 연합된 행위는 그가 특히 이 관련에서 말할 때 속죄와 그 관께의 효과를 위하여 기초적인 필수적인 준비가 된다고 명확히 주장했다. 속죄의 최고의 목적을 단순히 단지 죄를ㄹ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죄인들을 위해 필수적인 의를 준비하는 것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땅에서 설 수 있고 영원히 거하기에 필수적인 의를ㄹ 예비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요구를 채우는 신과 인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제공한 의이다. 와그너는 이것을 인식했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구속의 전 계획은 실제로 영원한 신성 중의 이 신비한 삼중 연합 그러나 분별되는, 뿌리 박혀 있는데 그 신성 안에 아버지가 아들을 타락한 인산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도록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영광의 장소로 돌아가셔서 자기가 이루어 놓은 구속과 완전한 의를 사람들에게 적용하도록 성령을 보내셨다. 이렇게 하여 하늘의 삼중창의 각 위는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한다. 이상이 신성의 신령한 조화와 동등한 관련성이 있다.
Ⅶ. Arian주의를 분쇄함
1. 본질 논쟁은 와그너를 반 Arian파로 분류하다
바로 “그 본질”(Wagggoner, 1888)이란 말은 “같은 본질”(Nicene, A.D. 325)과 “한 본질”(Ellen White, 1893) - 모두 같은 의미 -표현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신성의 영원한 둘째 위로서 인정한 것으로 Arian 파나 반Arian 파는 결코 사용하지도 않고 허용하지도 않은 표현이다. 그런 논쟁 Stephenson, Smith, Waggoner, Stone - 그리고 의심 없이 다른 이들 -1854-1888년 사이에 이들이 선언한 가정과 직접으로 불일치되는 논쟁이었다. 그것은 S.D.A. 사업이 초기 선구자들 중의 어떤 Arian주의와 반Arian 주의에서 이제 막 방향이 명백한 징후이다.
2. 반Arian 주의에 직접 반대함에 있어서
이같이 와그너 박사 1888년대와 1893년에 화잇부인은 아버지와 아들의 같은 00의 문제에 완전히 일치되었다.
그러므로 와근는 그가 항상 강조했던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충만함 중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제시하기 위하여 미네아폴리스로 와서 자기 친 아버지를 포함하여 Arian으로 기울어진 견해를 벌써 깨뜨리고 있었다.
3. "Godhead"은 Arian주의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화잇 부인이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이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의 의미와 부인이 와그너의 반복된 강조를 인정했다는 것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화잇 부인이 유별나게 표현한 하늘의 삼중창의 삼위가 포함된 신성에 관하여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의미가 있는 신성은 Arian주의자가 인정하지도 사용하지도 않은 낱말이다. 저들은 특히 주목할 것은 제 2위를 제 1위와 동등 됨을 부인하고 제 3의의 신성을 Godhead의 부분이라는 주장을 부인했다. 그것이 중요한 점이다. 신성은 분명히 삼위일체론자의 낱말이다. 그리고 와그너의 반복됨 사용이 정의는 Arian주의가 주장하는 요소를 파괴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배타적인고로 조화될 수 없는 논점이다. 그는 분명히 그 다음에 모든 충만함 중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더 큰 범위를 제시하기 위하여 먼저 Arian주의의 전제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17장 와그너의 미네아폴리스 기별의 회고
Ⅰ. 비건전한 억측에의 유감스러운 모험
1. “나왔다(proceedsd Forth)”는 말에 의하여 혼돈됨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와그너는 공론의 두꺼운 얼음 속으로 모험해 들어왔고 그 눈길을 실상 어느 누구와도 깊은 추측의 물 속으로 들어갔다. 이 두 경우에 같은 점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기독교 시대에 긴 세월 동안에 그리스도인 학자들을 호기심을 끌게 하고 당황하게 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기 몇 세기에 호기심 많고 교인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토론의 시대에 자극되어 온 것이다. 그것은 다시 종교개혁 시대와 그 후시대에 토론되었다. 그 반향은 19세기초에 개신교 단체들에서 아직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교회에서도 초기 수십년간에 토론되었다. 그것은 성서적 의미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여기에 집중되었다. 와그너에게는 이것이 무었을 의미했는가? 그리고 저들이 우리를 얼마나 멀리 무한한 과거 속으로 끌어갑니까? 두 개의 행위가 하나는 측량할 수 없이 영원한 시작 그리고 하나는 성육신 한 분으로 나타났을까? 그것이 문제였다.
2. 어떤 호기심을 끄는 술어를 염려함
이것들은 Arian의 충동에 의하면 만일 그런 것을 측량할 수 있다면 “낳았다”와 “아들 됨”이 언제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부언해야 할 것은 금지된 심비의 회의적인 시험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인간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다. 여기에 성서의 제한된 계시가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은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않된다. 공허한 추측은 삼갔다. 유한은 무한을 잴 수 없다. 인간의 마음이 재보려고 기도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그리고 그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어떤 중대한 역사적 배경을 검토해 보자. 이것들은 여기서 당면한 더 큰 논쟁에 대한 수세기 간의 문제로부터 얻는 가치 있는 빛을 던져준다. 저들은 초대교회와 그 다음에 영국 개혁 교회의 사상과 술어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은 재림신도들인 우리는 일반적으로 취급하지 않던 영역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면한 문제에 빛을 준다. 그것은 또한 수세기 간에 역사적인 교회의 반동과 기록과 관련하여 우리 자시의 견해와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문제로 우리는 향한다. S. D. A. 로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시초부터 전통적으로 모든 명문화한 교회 신조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점진적으로 공개되어야 할 성경 진리들을 제한적인 한계를 긋는 것으로 느끼며 흘겨보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신조들은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문제에 빛을 준다.
Ⅱ. 초대 교회와 종교적 신조에 있는 증거
1. 초기 기독론적 논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아마 그리스도의 인격, 본성, 신성과 삼위일체의 다른 신0들과의 그의 본질적인 관련성 등에 관하여 초대 교회에서 아무 논쟁도 없었던 정성들여 만든 신조는 없었으리라. 이 기본적인 논쟁에 관한 성서의 참 뜻에 관해서 논쟁들이 있어왔을 때 교회 지도자들은 교외의 이해와 공중 교육을 위하여 거기에 관한 성경의 교훈의 참 의미를 이해하도록 표현하려고 애썼다. 이리하여 초기 신조는 계발되고 확대되고 공인될 필요성이 생길 때에 완성되었다.
2. 성서와 신조의 근본적 관련성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을 공인된 개신교 사상에서 모든 신조, 의식서, 고백서의 권위는 관계가 있으나 제한되는 것으로 취급된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조나 신앙 고백은 그의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나 해석에 관한 인간의 말이다. 그와 같이 신조는 다만 교회에 권위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전조들은 솔직하게 기록된 사상이요, 수년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3. 베드로의 고백 - 그리스도의 침례의 신조(신앙 형식)
최초의 기독교 고백은 의심 없이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었다(마 16:16). 그리스도는 참으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요, 핵심이다. 그리고 침례 형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으로라고 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하나의 신성 안에 3위라는 사람을 일으켜서 이리하여 얼마 안 되어 결정적으로 삼위 일체 강조에 이르렀다. 이것을 그 후에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결과가 생겼고 그리고 신자들이 그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포괄적인 이름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이리하여 소위 사도들의 신조 신조들 중의 신조라는 술어가 발전되기 시작했다. 사도들의 신조는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는 성령을 믿는다.”라고 한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조직화하려는 교인들의 노력으로 보인다. 그 나머지 그 후에 일어난 신조들의 전 구조는 영감 없는 기초라고 일컬어져 왔다.
4. Nicene 기독교 신조의 기초
그 다음에 A. D. 325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확대되었고 Chalcedon에서 승인된 Nicene신조가 생겼다. 이 신자들은 모든 기독교 신앙의 공동 유산이 되었고 여기서부터 거의 모든 신조들이 뻗어나간 공동 뿌리가 되었다. 이리하여 복음주의적 개신교 신조는 대부분 이 초대 교회 신조들 위에 기초되었다. 그것이 왜 우리 재림신도들이 그들을 유리하게 말도록 하기 위한 또 다른 이유이다. Nicene회의 선언은 일어났던 Arian 이단에 대항한 것 같이 인격의 교리에 관한 그 후의 Athanasian신조, Nicene신조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빛 중의 빛, 바로 그 하나님의 바로 그 하나님, 아버지와 한 본질의 존재,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제시한다. 그는 낳았다고 선포되었지 만들어지지 않았다. 무에서 혹은 다른 본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Arian이 주장한 것처럼 피조되지 않았다. 그 논리는 명백했고 그 결정은 틀림없이 기록되었다.
5. Nicene 첫 세계적 신조
Nicene신조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말 중에 가장 정확하고 명백한 것이다. Arian논쟁에 관한 결정을 성분화 했기 때문에 “같은 본질”, “동등”, “모든 세계보다 먼저 나신” 바로 그 하나님의 바로 그 하나님이란 문구는 반세기동안 교회를 어지럽힌 Arianism과의 투쟁에서 승리의 증거이다. Nicene신조는 일반적인 영속적인 수확을 얻은 첫 번째의 것이었다. 그러나 Nicene신조는 Constatinople회의에서 논의하고 보충되었다. 왜냐하면 Nicene신조는 그리고 “성령 안에서”라는 말로 거칠게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Nicene신조는 381년에 확대되고 완성되었다. 우리는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다. 그리고 모든 세계가 있기 전에 아버지에게서 낳은 하나님의 독생자 한 왕,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중에 하나님, 빛중의 빛, 만들지 않고 낳은, 그로 말미암아 만물을 만드신 아버지가 한 분이신 분을 받는다. “그리고 주요, 생명을 주시는 분, 성령을 받는다. 아버지에게서 나온 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신 분을 믿는다.”(schaff Creeds of Christendons, vol. 1, p. 27, 28).
6. Chalcodon - 성육신과의 관계
Nicene신조가 Arianism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한 신성을 제시한 한편 Chalcodon신조는 하나의 존재가 된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의 실제적이며 영구적인 연합 - 하나의 신인의 개체로 나눌 수 없이 연합한 우리 모든 사람과 공통된 인성을 취하신 신령한 Logos(말씀) -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서 피차 섞인 하나의 이중성이심을 제시한다(p. 29-34).
7. Athanasian - 신성(Godhead)의 모든 충만
Athansian신조의 근원은 분명치 않다. Athanasius자신이 그 저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다나시안의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그 이름을 따서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다룬 것이다. 그것은 각기 신성의 모든 충만을 소유하신 신성의 삼위의 신령한 존재의 절대 하나 됨과 연합을 제시한다. 이리하여 삼위론 - Tritheism를 대적하여 보호한다. 각 위는 신령한 본체 혹은 신성 속에 모든 신성한 특성들이 존재한다. 각각 한 개체를 가지고 있다. 이 삼위일체 안에는 시간적인 전후도 없고, 계급의 우열도 없으나 개체 인격은 꼭 같이 영원하고 동등하다. 그것이 Athanasian신조의 강조점이요, 더 깊은 의미이다(물론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신성에 관한 무한한 진리는 인간 정신과 그 이론과 논리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8. Athanasian 신조의 주요 인용문
여기 아래에 이 정성 들여 만든 신조에서 따온 신성과 그 관련성에 관한 주요 인용구가 있다.
1) 우리는 삼위일체에 한 하나님과 단일 중에 삼위일체를 믿는다.
2) 신격들을 혼돈하지도 않고 그 본질을 분류하지도 않는다.
3) 왜냐하면 아버지 되시는 한 신격이 계시고 아들의 신격과 또 다른 성령의 신격이 계시기 때문이다.
4)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모두 하나이다. 같은 영광, 같은 영원함, 위엄,
5) 아버지와 아들도 피조되지 않으시고, 성령도 피조되지 않으셨다.
6)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무한하다.
7) 아버지도 영원하시고 아들도 영원하고 성령도 영원하심.
8) 그러나 아들은 세가지 영원한 종류가 아니라 꼭 같이 영원하다.
9) 그리고 세가지 종류로 피조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세가지 종류로 무한함이 아니라 한가지로 피조되지 않고, 한가지로 무한하다.
10) 그러므로 이와 같이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전능하시다.
11) 그러므로 아버지도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12) 그러나 온 삼위가 같이 영원하고 동등하시다.
13)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심은 성령으로 믿고 고백한다.
14) 만물전에 낳으신 아버지의 본질이신 하나님, 그리고 그 어머니의 본질을 가진 사람으로 세상에 낳으셨다.
15) 완전한 신, 완전한 사람
16) 그의 신성을 볼 때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그의 인성을 볼 때 아버지 보다 낮다.
17) 그는 하나님이요, 인간이실 지라도 둘이 아니요, 한 그리스도이시다.
18) 한 분, 신성이 인성으로 전환된 것이 아니요 신성에 인성을 취하심으로 한 분이 되심.
19) 모두 한 분 본질이 혼합된 것이 아니요, 인격의 단합으로 말미암아서...(Philip schuff, 기독교의 신조들, vol. 2, p. 66-69).
엘렌 화잇의 표준적인 선언과 사상과의 미와 현저하게 비슷했다. 아버지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시고 아들도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시고 그리고 성령도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다(Ev 614, 615). 그리고 이 아다니시안 신조를 거듭거듭 강조한 것은 현저하게 감명 깊고 간과해서는 않된다. 그것은 영감을 통해서 얻은 이 신성한 실재들과 연관성에 대한 엘렌 화잇의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동시에 화잇 부인의 진리가 담긴 말씀은 이 초기 신조들 중 어떤 반복된 선언 각 세기들을 거쳐서 계속되어온 주 신조의 본질적인 건전성에 관한 새 인식을 준다. 이들은 신조들 중에 어떤 반복된 선언과 조화 일치된다. 이것에 관하여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9. 개혁자들은 Athanasia 신조에 경의를 표했다
기록해야 할 것은 개혁자들 특히 루터와 개혁 교회들은 Athanasia신조, 혹은 표를 크게 존경했다는 것이다 루터 교회 Augsfurg 신앙 고백, 영국 국교의 39개조, 제 2 Helratic 신조, 그리고 다른 고백서들에 긍정하여 말한다. 루터는 그것을 영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한 것과 같이 최고로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랫동안 고백해 온 그리고 유지되어 온 복음주의적 개신인 신조들 위에 이 초기의 신조의 견해를 Millerite 무리의 대부분과 저자가 이해할 것을 포함하여 우리 교회 시초의 건설자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초기의 신조들의 견해가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표를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회중 교회, 감독교, 루터교 등에 전해 내려 온 이 초기 신조들과 다른 신조들이 이리하여 우리 문제에 결정적인 관계를 가진다.
Ⅲ. 복음주의적 개혁자 신조들, 고백들, 교리 문답들 - Millerite은 종전의 관계를 계승하다
신성(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관한 역사적인 신조들 Miller운동에 가담한 대부분의 압도적인 대다수의 삼위일체론 자들이 취해온 단순히 종전의 관계들에서 계승받았다는 것은 틀림없이 분명하다. 마치 윌리암 밀러가 한 것처럼 “나는 하나의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신성(Godhead)에는 삼위가 계심을 믿는다.”(Sylkester Bliss, Miller 회고록, 1853, p. 77, 78). 이 모든 문제들은 1843-1844년 운동에서는 논평이 없었다. 우리가 지도적인 개신교 신조들을 정확히 알도록 아래에 여러 복음주의 적인 개신 교회들의 지지자들이 신성 특히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의 본성과 신격들에 대해서 주장한 것을 기록해 둔다. 이 선언들 중에는 더러 종교개혁이 발생한 시대로 되돌아간다. 다른 것들은 더욱 최근에 새긴 것이다. 여기에 이 점에 관한 다른 교파의 신조에 제시한 Philip Schaff의 “기독교의 신조들” 3편에서 인용한 귀한 견해들이 있다.
1. 복음주의적 개혁파(Heidelburg 교리 문답 1563)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다”(Ques. 33). “참되고 영원한 아들로 항상 계시는 사람과 꼭 같은 본성을 취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Ques. 35). “그 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꼭 같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문 53).
2. 영국교(39개조)
“이 신성의 연합 속에 한 본질, 한 능력, 한 영원하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가 계시다”(1조). “아들은 바로 그 하나님의 영원한 하나님이시오,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다”(제2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한 본질, 한 위엄, 같은 영광이시며, 바로 꼭 같은 그 하나님이시다”(제5조)
3. 장로교회와 회중 교회 - Westminster 신앙 고백사, 1647
“신성의 단일 안에 한 본질, 권능, 영원성을 가지신 삼위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
“신성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가 계시다. 그리고 이 셋은 한 하나님, 본질에 있어서 같고, 능력과 영광에 있어 동등하신 분이시다.”
4. 침례교(New Hanpshine와 New England, 1833년 경)
“신성의 연합체 안에는 모든 신성하신 완전함에 동등하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가 계시다.”
5. 미국 자유 침례교(1834)
모든 신령한 완전함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영원하며, 무소부재하시고 전지하시고 완전함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6. 미국 감리교(1784)
“신성의 연합체 안에는 한 본질 능력, 영원성을 가지신 삼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시다.”
7. 미국 개혁 감독교회(1875)
“이 신성의 연합체 안에 한 본질 능력 영원성을 가지신 삼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시다.” “아버지의 말씀이신 아들, 영원에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낳으신 바로 그 하나님, 결코 나눌 수 없는 하나의 그리스도 바로 그 하나님이시오, 바로 그 사람이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한 본질, 위엄, 영광을 가지셨고 바로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난외.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에 관해서 세계들 혹은 시댜가 있기 전에 낳으신 영원으로부터 나오신 독생자, 혹은 낳으신 분으로 말함과 같이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강조적으로 반복해서 말한 이 신호들이다. 저들의 생각에는 아무 사상의 논쟁도 없는 것같이 보인다. 저들은 비교하지 않고 중화시키려고 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조직적이며 모순 없는 것처럼 여겼다. 이상이 역사적 신학의 증거이다.
8. Helvetic 고백서(1566)
두 개의 Helvetic 고백이 있다. 첫째는 성찬에 관한 토의 후에 Bullinger와 다른 이들이 작성한 것이다. 두 번째는 역시 Bullinger가 Zwirglian파와 Calvein파가 조화하여 역시 작성한 것 안에 Swiss개신인 뿐만이 아니라, 스위스 밖에 개신 교회에서도 받아들였다.
Second Helvetic Conference - 세 분의 하나님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본질과 같은 영원성과 동등이시며, 구별된 삼위가 계시다. 이 분들의 위를 보면 분별되고 순서에 있어서 한 분이 다른 분보다 앞서지만 여하한 동등이 아닌 점이 없다. 이 분들은 긴밀히 함께 연합되었으므로 한 하나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성한 본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공통이시다. 우리가 믿고 가르치는 것은 그의... 신성을 다룰 때 아버지와 동등이시오, 같은 본질이시다. 단지 이름이나 양도에 의해야 특별한 은총에 의하여가 아니라 본질과 본성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나 특별한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과 본성에 있어서 참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적해서 말하는 Arius와 모든 Arian파의 참람 된 교리를 매우 싫어한다. 우리는 영원하신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을 믿고 가르친다.
Ⅳ. 전술(前述)한 신조 증거에서 얻은 추론
1. 앞에 있는 증거를 관찰함
우리는 여기 삼위일체가 그 구성 신격에 관한 밀러 운동 당시 대부분 기독교계와 밀러 주의자들의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지도적 개신교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1844년의 밀러의 무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그 구성상에 압도적 대다수가 삼위일체론 자들이었다. 이 견해들은 역시 분명히 그 큰 분기점 1844, 10, 22 대 실망 이후에 우리 교회 기초를 놓은 조상들 중 삼위 일체, 그러나 이것은 처음에는 논쟁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배경이다. 우리 교회 역사의 첫 10년간에는 그 문제에 관한 선동이나 분열이 없었다. 1854년에 Stephenson은 자기의 아리안 논쟁에 이곳에 제시된 적대가 있을 것을 인식했고 그렇게 말했다.
2. Stephenson 이 분열적인 역할을 함
우리 앞에 있는 신조의 증거를 가지고 비교, 대조를 위하여 회고하여 열거한 J. M. Stephenson의 속죄 책에서 주도적인 경제가 되는 Arian 사상을 여기 기록한다. 오직 아버지만 자존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념을 한 분리 존재가 먼저이고 후자의 존재는 그 후에 존재한다.” “영원하신 아들이라는 사상은 전부 모순이다.”만일 영감의 저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같은 시대의 존재, 영원성의 사상을 전달하기를 원했다면 그 보다 더 모순 된 낱말은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낳았고 그 결과로 그는 시작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성경 절들은 그는 결코 시작한 날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의 영원한 존재의 가능성을 배제한다”(p. 131). 그는 창조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리므로 그의 생명과 불멸성은 아버지의 뜻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p. 133). “그는 시작을 가졌다. 그는 모든 피조물 주에서 먼저 나셨다. 하나님은 창조의 시작이다”(계 5:11).
그의 요약 중에 Staphanson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 성육신에 관하여 내가 취한 견해는 많은 이들에게 반대당할 것이다”(p. 187). 그는 골 2:9에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히 거하신다를 공격하면서 이것은 그것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p. 190). 그것이 Stephenson에 의해 소개된 조화되지 않는 기록이다. Stephanson 책 전체가 1854년에 당시 공개토론 형식으로 리뷰지 8월 22일부터 12월 19일 까지 논문 형식으로 수록되어 보존되었다. 제 2판이 1855년에 나왔다.
3. 변덕스러운 혁신자 Stephenson
이비 기록한 바와 같이 그는 결코 정당한 재림 신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초기 잡지가 결정적으로 공개토론의 토대 위에 있었을 때 이 접선하는 가르침을 인쇄된 책 형식으로 낸 첫 번때 사람이었다. 우리 교회는 그 때 천년기에 안식일 지키는 재림 신도들이 한 단체로서 신성 그리고 그 구성 분자의 위들 본성과 연관성, 어떤 결정적인 견해가 선포되기 훨씬 전이었고 그 후에 고려될 만한 적당한 때가 되기까지 도전이나 반대 받지 않고 어떤 견해든지 각자가 결정하도록 남겨두었다. 이제 다시 1888년의 와그너 제시로 돌아가 보자
4. 와그너의 중심 사상의 현저한 명확성
앞에서 검토한 바에서 우리는 초기 니케네 아타나시안이 강조한 기독 론적 특성들과 복음 주의적 개신교 신조들 사이에 놀랍게 비슷한 점을 볼 수 있다. 저들이 새 안식일을 지키는 재림 운동을 출발할 때 우리 초기 선조들 중 대부분이 그 사상을 유지했다. 더운 감명 받은 것은 영원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그 후의 예언의 신의 확증과 사상과 표현이 놀랍게 비슷하다. 신성의 모든 충만함, 아버지와 아들의 한 본질 등과 꼭 같다. 이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더욱 여러 세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유지한 영원하신 신성의 제 2위로서 아들의 영원한 존재와 절대 신성에 관하여 그 후에 예언의 신이 언급한 대로 사상과 표현이 실제로 일치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5. 모든 충만함의 반복 사용으로 강조함
이것은 분명히 와그너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제시의 기초로서 제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여기서 공중 앞에서 첫 번에 제시한 것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 강조하려고 한 것이 모든 것이 참으로 요약되었다. 그 중추적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와그너는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없었다. 그 최초의 선언 주에 비록 그 주요 신뢰와 그 주요 표현이 예언의 신에 의하여 구두로 공공연하게 했을 지라도 신성의 양상에 관해서는 아직도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충성된 오늘날에도 당황하고 있다. 그의 견해는 여러 세기의 감명 깊은 증거들과 함께 연결된 뛰어난 발전이었다. 오늘날 삼위일체론으로서 우리가 받아들인 것에 있어서도 항상 조직적이고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것은 유명한 선언이었다.
Ⅴ. 와그너의 탈선은 그릇 적용된 성구에 기초됨
1. “나아오다(going forth)”를 하나님에게서 “생기다, 발하다, 유래하다(proceedeth forth)”와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저들의 성구에 그리스도의 근원에 관하여 두 개의 의심스로운 말이 있다. 말씀이 태초에 계셨다. 사람의 마음은 이 구절에 미치는 연대를 파악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연제, 어떻게 낳아졌는가는 사람에게 알도록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단지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기 전 뿐만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도 신령한 말씀이시라는 것을 안다. 그의 십자가 직전에 그가 지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창세전에 영감의 말씀에 의하여 이렇게 예언되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고을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로부터 내게로 나아올 것이다”(미 5:2). 난 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서 나아온 것을 안다(요 8:42). 그러나 인간의 머리로는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영원한 시대로 돌아간다(그리스도와 그의 의, p. 9).
“성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선언한다. 그는 낳지도 창조되지도 않았다. 그가 언제 낳아졌는지에 관해서는 우리가 묻지도 못하고 말해도 우리 머리로 이해 할 수도 없다(미 5:2).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서 아버지 가슴속에서 나온 때가 있었다(요 8:42, 1:18). 그러나 그때는 영원한 날에 너무 멀어서 유한한 이해로는 그것은 실제로 시작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요는 그리스도는 낳은 아들이요, 피조된 백성이 아니다. 그는 원래 천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는 그 자신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이다(히 1:4; 3:6)”(p. 21, 22). 그의 고심 중에 강조된 것은 ‘낳은 아들’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청중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피조 된 존재라고 주장하는 어떤 이들의 논쟁에 대항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와그너는 또한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의 말은 아들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다른 어떤 존재도 없고 있을 수 없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아담같이(요 38:7, 눅 3:38).” “창조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인들은 양자로 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다(롬 8:14, 15). 그러나 그리스도는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시다”(p. 12).
2. 잘못된 인용에 기초됨
와그너는 미 5:2에서 나아오다(going forth)를 인용하고 요 8:42에서 하나님에게서 발생하여 나왔다는 말과 요 1:18 아버지의 가슴에라는 표현을 정확히 인용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선언되었고 “하나님에게서 발생하여 나왔고 상고에 태초부터 나아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아버지의 가슴속에서 생겨나온 때가 있었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그 때는 너무 멀어 영원한 날 전인고로 유한한 이해로는 사실상 시작이 없는 것이다.
엄격한 삼위일체론의 견해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는 그의 신성에 대한 절대적인 본질이다. 자존도 시작이나 파생의 암시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서 나온 영원의 어느 지점이 있었다면 그는 시작이 있는 것이니 완전한 신성보다 못하다. 아무리 영원한 시대 이전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이것을 그렇다.
3. 위의 3 성구는 모두 오역된 것임
와그너의 잘못은 그가 인용한 3개의 성구에 오역에 있다. 요 8:42에 있는 그리스도의 주장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그가 나를 보내셨느니라” 이 성구 안에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세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요 1:18에서 사도는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것을 시사하기 위하여 그 는 아버지 품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 표현에 대하여 S. D. A. 성경 주석에는 아마 가장 가까운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관용어식의 표현이라고 한다. 이 해석은 아버지와 연합되었다는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과 완전히 일치된다. “너희가 내가 아버지 안에 내가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 내가 하는 말은 내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요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어떤 계심을 믿으라”(요 14:10, 11). 아무도 요 14장을 읽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어떤 발생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와그너는 의심 없이 요 1:18의 독생자라는 표현 중에서 그리스도의 출생 혹은 낳았다는 그의 견해를 지지했다. 이 문제의 의미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 장에서 취급하겠다.
4. 베들레헴에서 나온다
미 5:2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의 탄생자로서 베들레헴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하여 말한다. 그것은 또한 영원한 날부터 그의 선재를 지시한 것이라는 것은 초기 기독교 시대로부터 교인들의 사상이 되었다. “날아온다(goes forth)”란 말은 영어 번역이나 히브리어 원어나 모두 주석강의 문제를 제기해 왔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제의되었다. (1) 그 말은 죄가 시작될 때로부터 하나님의 목적 중에 인류의 구세주의 “나아오신”다는 말씀이다. (2) 그것은 다윗의 혈통 중에 그리스도의 선조에 대한 말씀이다. (3) 그 히브리어의 원어는 “나아온다(came forth)”로 적당히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원에서부터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나오심에 적용될 수 있다. 이 마지막 제안이 예언의 문자적 형태는 시적이다는 것과 히브리 시의 보편적인 대구법은 첫 절에서 베들레헴에서부터 나온다는 것과 마지막 절에서 나아온다는 것과 같게 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어떤 지지를 받을 수 있다.
5. “나아간다(going forth)”는 그리스도를 높임
자신의 성육신을 묘사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마가의 예언과 거의 비슷하게 보인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노라”(요 16:28). R.S.V.에 "going forth"를 "origin"으로 번역한 것은 그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도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못한다. 헌신적인 Arian파는 물론 이것을 그리스도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 영원한 날에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근원이라고 읽을 것이다. 삼위일체론 자들은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될 때 비롯되지 않고 그의 영원한 거처에서 베들레헴의 인간으로 왔다고 해석하여 읽을 것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와그너의 제시는 엄격한 성경 해석과 건전한 이론에서부터 이탈선으로 인하여 손상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간단한 불행한 실언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판단해야 한다.
6. 그리스도의 총체적 신성을 강조함
그의 논문의 첫 부분에서 와그너의 주요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절대적 신성이었다. 우리는 그의 한가지 과오를 간과해서 건전하고 유례없는 정통적인 말 많은 강조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예컨대 그의 책 22페이지에 그가 말하기를 그러나 요는 그리스도는 아들이지 한 피조된 백성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같은 문단에서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 분은 하나님의 바로 그 본질이요, 본성이시다.” 그는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계시고 자기 자신의 권한 내에 불멸성을 가지고 있다. 이 이론상의 문맥은 총체적으로 건전하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서 와그너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바로 그 본성과 그 본질이시고 스스로 생명을 가지셨고 그는 자존자이신 여호와라고 할만하다(어떤 Arian은 일찍이 이것을 허용치 않았다). 그 자신의 날과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는 영원한 과거에 시작이 있다는 말과 - 와그너는 또한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특성을 소유하시고 신성의 모든 충만함으로 채워지시고 그 안에 원래 생명이 있고 그러므로 그에게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고 자원해서 그것을 버리시고 다시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와그너의 의도를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아버지의 절대 동등권을 믿었다. 와그너의 말을 눈에 훤히 보이게 하고 더 잘 평가하기 위하여 여기에 같은 단에 기록해 둔다. 독자는 더 읽어 내려가지 정에 이 점에서 주의 깊게 그들을 시험해 보라고 요청한다.
7. 증거의 압도적인 무게
이 모든 말들에서 얻은 연역법은 매우 명백하다.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동등, 그의 자존, 신성의 모든 충만함의 화신의 사실을 반복하고 재 반복하고 언급하고 재 언급한 것과 영원한 능력과 신성, 영원한 말로부터의 그의 존재, 영원부터 중보자, 신성의 모든 특성을 소유하심, 신성의 모든 능력을 활용하심, 아버지의 바로 그 본질, 본성을 가진 존재임을 강조한 것에는 분명히 고의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와그너의 압도적인 강조점이다. 이 의미를 밀집 형태로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신성에 관한 와그너의 주요 표현과 대략 그 횟수의 도표 형식의 명단이 아래에 있다.
신성의 모든 충만함(15번), 신성의 부분(8번), 아버지와 완전한 동등(7번), 신성의 모든 특성(5번), 영원한 능력과 신성(4번), 영원한 말로부터(4번), 신성의 완전한 부분(3번),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이심(2번), 동등한 본성과 본질의(2번), 능하신 하나님(2번), 자존자(1번), 영원으로부터 중보자(1번), 태초부터 하나님(1번), 끊임없는 존재(1번), 합계 56번.
14가지 주요 숙어들과 56번 사용에다 좀 덜하지만 비슷한 의미의 표현들 이것들은 3개의 추론적인 “나아온다”와 “출생으로”라는 어떤 제한된 관념에 기초된 말들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간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8. 성육신의 신비는 이해할 수 없다
아래에 하나님이 육으로 나타나심이란 부분에 사색을 위한 그의 간단한 말 후에 와그너는 건전하게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그 영광을 스스로 벗으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성을 스스로 입으셨다. 이리하여 그는 성육신을 통하여 성육신하는 동안에 스스로를 낮추셨다. 그러므로 와그너는 말하기를 우리는 내 아버지보다 크시다는 말을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조화시킬 수 있다. 그 후에 그는 즉시 합당하게 권고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에 주기까지 하셨는지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에 관하여 추측하는 것은 무엇을 할 뿐 아니라 더 나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술어로 그것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라(p. 25, 26). 이리하여 와그너는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본성과 존재는 유한한 이해력의 한계를 분명히 넘는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감히 그것을 00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례를 어겼을 때 곤란을 당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성경 진리를 해석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뛰어나게 균형잡힌 기도를 했다. 와그너의 제시는 이리하여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충분한 기초와 준비로서 그리스도에 관한 전반적인 견해를 더 폭넓게 다룬 첫 번째 유능한 기도였다.
Ⅵ. 예언의 신의 놀라운 보증
1. 그리스도의 위의 영원한 선재
불행히도 유감스럽게 그 당시에는 와그너 박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선재와 완전한 신성에 관한 엘렌 화잇의 가장 강력한 성언의 대부분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1888년에 와그너는 부인의 많은 그 후의 말의 유익이 없이 개척하고 있었다. 눈을 살펴서 이 놀라운 부언한 증언들 살펴 보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뿐만 아니라 그의 개별적인 선재 그의 무한성, 동등권, 전능성을 보라. 그리고 우리는 아래에 있는 모든 놀라운 보증은 영감으로 기록되고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음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붉은 줄친 말들의 의미를 숙고하라. “영원하신 창조 받지 않은 자존자”, “하나님과 동등이시고 무한하신 전능하심 그는 영원하시고 자존하시는 아들이다.” “영원한 말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그의 근본은 영원하신 날로부터”, “그리스도는 선재하시고 자존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우리에게 보증하기를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 중에 계시지 않은 때가 한 때도 없었다.” “자존하고 영원하고 불멸하시는 분” 그 안에는 근본적으로 빌리지 않은 생명이 있었다. “그가 아버지와 모든 영원부터 가지셨던 영광”, “그는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지상에서 거니셨다.” “태초부터 아버지와 동등이셨다.” - 1906년에 더욱 확대되어 말씀하신 것도 주목하라 - “그 말씀은 한 신령하신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와 연합하여 하나로서 존재하셨다. 영언부터 그는 그 언약의 중보였다. 사람들과 천사들이 창조되기 전에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다. ...이에 관하여 하신 말씀들은 매우 결정적인고로 아무도 의심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셨고 최고의 의미에서 하나님이었다. 그는 영원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영구히 복되신 모든 것 위에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다. 영원부터 존재하신 한 구별된 신적이지만 아버지와 하나이신, 하나님의 신령하신 아들, 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이셨다는 진리 안에 빛과 영광이 있다. 이것은 흑암 중에 비치는 빛이다. 그것을 신령한 근본적 영광으로 빛나게 만드는 이 진리는 그것이 가까이 갈 수 없고 이해 할 수 없는 빛 중에 간직되어 있는 한편, 그 자체가 무한히 신비한 이 진리는 다른 신비를 해석하고 다른 해명할 수 없는 진리를 해명한다”(R.&H. 4, 5, 1906).
2. 영원부터 항상 계셨다
다른 많은 비슷한 의미의 값비싼 말씀이 있다. 그러나 이 뚜렷한 증거들은 확실히 충분하다. 이것들에서부터 오직 한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어떤 파생된 존재도 자존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시작이 없다. 그는 태초의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꼭 같은 신성의 모든 총명함이 있다. 그는 항상 계시다. 엘렌 화잇은 확실히 틀림없이 와그너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절대 신성과 시작이 없는 선재를 높이고 찬양하는 일에 앞섰다. “그렇습니다. 와그너나 미네아폴리스 총회에 참석한 그 어떤 사람이나 그 후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훨씬 더 앞섰다. 화잇 부인은 영원하신 신성의 영원하신 제 2위이신 그리스도의 초월성의 최고 해설자로서 훨씬 뛰어났다.
3. 세 개의 놀라운 묘사로 요약함
전술(前述)한 수집 중에 하나의 상세하게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문장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같이 보인다. “그 안에는 빌리지 않고 파생하지 않은 근본적 생명이 있다.” 그 축적된 결론 중에 있는 이 의미 있는 술어의 광대함을 숙고해 본다. 그 충분한 의미를 파악하라. “근본적”으로 고유하게 생래적(生來的)으로 독립적으로 그의 것임. 아무 선행사도 없이 그의 존재는 획득하지 않고 얻어지지 않고 수여되지 않았고 받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이들로부터 전달을 통해서 오지 않았다. 그것은 본래부터 그의 것이요, 본래 항상 그리고 개인적으로 영원한 신성의 영원한 제 2위이신 그의 것이다. 빌리지 않은 근본적인 것이 아닌 무엇, 모든 영원으로부터 그의 것이었다. 단지 아버지에게서 얻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개인적으로 그의 것이다. 얻거나. 받거나 번 것이 아니요, 다른 이에게서 얻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개인적으로 그의 것이다. 이 전에는 다른 이의 소유이던 것이 아니요, 어떤 시점에서나 어떤 과정에서 그의 것이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한 소유를 통해서 영원히 근본적으로 그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은 영원히 아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감의 틀림없는 렌즈를 통해서 본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의 본질이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절대적인 신성에 포함된다. 그것은 이 모든 문제가 아직 논쟁 중에 있을 때 쓴 결정적인, 최고의 문장이다. 그런 것이 1888년 후 거의 10년 후에 쓴 점진적인 청사진의 인도하심이다.
Ⅶ. 현대의 와그너의 기본적 기별을 중화하는 것을 삼가라
1. 논쟁이 그 당시에 일어나지 않았음
특별히 기록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재검토한 이점을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와그너의 주요 제시를 집요하게 반대한 거절하던 그 동시대 사람들에 의하여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약점을 주시했다. 그것은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그의 기본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에 의해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저들 중에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것은 그 다음 10년 동안 -어려운 1890년대- 1890년대 후반기에 와그너와 밀접하게 개인적으로 함께 일하고 그의 견해를 알고 있던 W. W. Prescott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와 동시대 인물들에 의하여 논쟁으로 비화되지 않았다는 이 사실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2. 지금까지 수면상태, 무활동 중에 있음
1888년에 미네아폴리스에서 와그너의 전체 연구를 직접 듣고 찬성했고 와그너, 존스와 함께 그 직후에 1889년과 1890년에 널리 여행하며 수고한 엘렌 화잇에 의하여 그 논쟁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와그너는 교회들에서, 장막회에서, 연구회에서, 기관들에서, 사역자 회의에서 자주 미네아폴리스 총회의 주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1892년, 엘렌 화잇이 호주에 거주하고 있었을 때 와그너의 책이 호주에서 출판되었고, 화잇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왜 그것이 그 당시에 간과되었을까? 사람들은 와그너의 주요 주제에 대하여 반대 입장이든지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그것은 논쟁이었다. 이점은 겉으로는 그의 주요 부담과 기별의 기초로서가 아니라 한 추상적인 문제에 관한 한 개인의 견해로 취급되었다. 그것은 와그너 자신이 말한바 “사람의 정신의 이해를 초월한 무엇이었다”(op. crt, p. 9). “유한한 이해력” 밖의 것(p. 22), 그것은 한 분명치 않은 점에 대한 한 개인적인 견해로 분명히 생각했다.
3. 와그너의 제시에 관한 비상한 각성
이 모든 것 중에 우리는 와그너의 기별의 건전함에 관한 화잇 부인의 찬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엘렌 화잇의 일반적인 보증을 주목하라. “하나님께로서 온 기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임장을 지니고 있다”(R. & H. 9, 3, 1889). “신령한 신용 증명서를 가진 기별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냄을 받았다”(상동, 5, 27, 1890). 그리고 부인이 와그너의 주요 문구와 기본 사상을 인용한 것을 특별히 주목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함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우리 중에 제시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역사 하셨음을 안다.” “나는 나의 형제들의 곁에 서서 이 때를 위한 기별과 함께 나의 증언을 제시하는 것을 한 특권으로 여긴다(상동, 3, 18, 1890).
4. 영감의 빛과 조화됨
1888년 총회 동안에 화잇 부인은 그 제시를 “이 때를 위한 하나님의 기별이다”라고 불렀다(Ms. 8, 1888, R.&H. 3, 18, 1890). “하늘에서 근원이 된 진리가 사단의 거짓과 대경하고 있는데 이 진리가 이길 것이다”(Ms. 8a 1888). 그것은 진짜 세째 천사의 기별이다. 그것은 명백하고 분명히 세째 천사의 기별이다. 그 기별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말들은 회고하며 쓴 것이다. 지지함에 변함이 없었다. 1888년의 와그너의 연구 연속 끝에 가까웠을때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의 부인의 끝마치는 마지막 기별에서 엘렌 화잇은 그가 말한 것에는 귀한 빛이 있다라고 단언했다(Ms. 15, 1888).
아마 화잇 부인의 가장 강력한 보증은 다음과 같다. 제시된 것은 나의 전 생애의 경험 중에 내게 주시기 기뻐하셨던 빛과 완전히 조화된다. 이 말씀들은 한 비상한 보증이다. 그 기별의 근본적인 건전함에는 우리가 의심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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