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는 자신이 펴낸 15권의 시집 안에서‘카멜레온’같은 변신을 추구했다. 한국 시사에서 미당만큼 ‘시적 세계관’에 대해, 다양한 수사가 붙은 경우가 없다. ‘신라정신’, ‘영원주의’, ‘불교적 사유’, ‘풍류정신’, ‘초자연주의’ 등 무수한 관점과 평가가 존재한다. 미당 서정주가 시를 통해 이룩한 전 방위적인 미학적 성취 덕분이다. 미당 시집을 전반적으로 조망하며, 시 세계의 흐름을 살펴본다.
△미당 서정주의 시집과 시기구분= 미당 서정주는 68년 동안 창작활동을 하면서 1000편이 넘는 시를 15권의 시집으로 발표했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에서부터 〈귀촉도〉(1946),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1961), 〈동천〉(1968), 〈질마재신화〉(1975), 〈떠돌이의 시〉(1976),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팔할이 바람〉(1988), 〈산시〉(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 등이다.
이 시집들에 담긴 시 세계의 흐름을 연대기별로 나눠서 살핀다는 건 쉽지 않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미당 작품의 시기구분이 완벽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어떤 연구자는 〈동천〉 과 〈질마재 신화〉를 기준으로 미당 시를 전기시와 후기시로 나눈 뒤 시 세계를 조망하고, 어떤 연구자는 ‘〈화사집〉, 〈귀촉도〉까지를 전기시로, 어떤 연구자는 〈화사집〉만을 전기시로 보고 미당의 시 세계를 관통한다.
이수정 광주과학기술원(gist) 교수는 그의 박사학위논문 ‘서정주 시에 있어서 영원성 추구의 시학(서울대·2006)’에서 ‘서정주의 시집 전체를 조감하는 시선에서 시기구분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시의 특징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꿰뚫어 낼 시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수정 교수는 〈화사집〉(1941)부터 〈서정주 시선〉(1956)까지가 미당의 전기시, 〈신라초〉(1961)부터 〈떠돌이의 시〉(1976)까지 중기시,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부터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 까지를 후기시로 분류했다.
△ 미당의 전기시 ‘시적 자아의 확장’= 미당 전기시의 특징은 ‘시적 자아의 확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당의 시 ‘화사〈화사집〉’에서는 꽃뱀을 통해 고독과 허무, 관능과 욕망에 뒤엉킨 젊은 날의 초상을 그려낸다. 즉 꽃뱀은 젊은 날 미당의 얼굴이자 실존의 거울에 해당한다. 이후 미당은 젊은 날의 과오를 회복하기 위해 설화와 함께 불교적 상상력을 도입했다. 촉나라 망제 설화를 모티브로 한 ‘귀촉도〈귀촉도〉’, 사랑과 불교적 상상력을 결합한 ‘추천사〈서정주시선〉’ 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에서는 사랑과 생명은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영원의 세계, 절대의 세계로 열려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또 한국전쟁 이후 미당은 자신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넘어서 자연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귀촉도〉’ 에서는 소녀들을 통해 ‘자연’으로 열림을 추구하고, ‘국화앞에서(서정주 시선)’는 자연현상을 보며 자기 성찰을 한다.
▲ 동국대 미당문고에 진열된 미당의 시작(詩作)노트와 영어공부노트, 그리고 능엄경. △ 미당의 중기시 ‘시적 자아의 한계극복과 신라탐구, 질마재로의 귀환’= 중기시는 전기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라’를 탐구하고, 고향 마을인 ‘질마재’라는 매개체를 사용한다. 미당은 〈신라초〉에 ‘삼국유사’의 설화를 수용해, 젊은 날의 번뇌와 시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선덕여왕의 말씀〈신라초〉’에서 신라의 하늘이 상징하는 ‘영원주의’가 그 내용이다.
하지만 미당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천 년 전의 신라와 교감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동천’에서 쓴 표현“매서운 새”가 그 표현 중 하나다. 서은주 교수는 “매서운 새는 님(신라)과 나의 합일을 찌르고 잘라내는 공격적인 이미지이다”며 “결국 미당은 시에서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는 표현을 사용해 피해가는 방식을 모색했다”고 논증했다.
이후 이런 어려움과 장애를 더 줄이기 위해, 미당은 고향 마을인 ‘질마재’라는 매개체를 선택한다. 미당은 ‘말피〈질마재 신화〉’에서 김유신과 천관녀 설화를 질마재 마을의 간통사건과 연결시키고, ‘상가수의 소리〈질마재 신화〉’로 신라설화를 매개체인 질마재로 당겨온다.
중기의 마지막 시집이라 할 수 있는 〈늙은 떠돌이의 시〉에서는 1977~1878년까지 세계 일주를 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삶의 모습과 생명의 다양성을 노래한다. 특히 이 시집에서는 신라와 고향을 통해 느낀 감수성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하려는, ‘이행’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미당의 후기시 ‘시적 감성의 나눔과 개인사 기록’= 미당의 후기시는 신라를 통해 얻은 ‘원시적 감성’을 대중과 나눠야 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떠돌이의 시〉에서 시인은 세계를 떠돌며 느낀 바를 타인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에서는 ‘신라적 감성의 전달’을 넘어 ‘단군신화’부터 반만년의 한국사를 재해석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 시집은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이수정 교수의 주장이다.
1984년에 출간한 〈노래〉 역시 미당이 말한 ‘이행’의 의미를 담고 있다. 미당은 시집의 서문에 기획의도를 밝혀두었는데, ‘유행가의 범람과 그 가사의 저질성에 대해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면서 ‘가사의 질적 향상에의 책임감을 느껴서 시험 삼아 써본 것’이니 ‘클래식 뿐 아니라 유행가 작곡자들도 동조’해달라는 요지를 담고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실제 작곡돼 불리기를 기대한 것이다. 시집에는 봄노래, 여름노래, 가을노래, 겨울노래의 4부에 모두 56편의 시가 수록됐고, 이 중 8편은 〈질마재 신화〉의 노래부에 수록된 시들 가운데 수정한 것이다.
〈산시〉는 노래보다 더 폭넓은 보편성을 추구한다. 104편이 넘는 시들이 아시아·유럽·오세아니아·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아프리카 6부로 나눠 수록됐다. 이 시집에서는 세계의 신화·역사·풍속·자연에 대해 체험하고 공부한 방대한 자료를 소개했고, 세계 각국의 ‘산’이 하는 말을 시인이 듣고 전하는 형식을 취했다.
미당은 또 자신의 개인사를 연대기 순으로 수록한 시를 펴냈다. 〈안 잊히는 일들〉과 〈팔할이 바람〉이 그것이다. 〈안 잊히는 일들〉에는 시인의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되어 예순에 이르기까지 겪은 일들을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시들이 수록돼 있다. 시인이 살아오면서 겪은 극적인 순간의 감정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묘사한 게 이 시집의 특징이다. 〈팔할이 바람〉역시 〈안 잊히는 일들〉처럼 시인의 개인사를 소재로 담고 있으며 내용도 비슷하다. 1984년에 떠난 2차 세계여행에 대한 것과 친일행적 비판에 대한 입장을 담은 것 등이 보충됐을 뿐이다. 이 시집은 1987년 7월 6일부터 12월 28일까지 〈일간 스포츠〉에 담시(대화형식의 시) 형식으로 52회에 걸쳐 연재됐다.
이후 이어진 〈늙은 떠돌이의 시〉와 〈80소년 떠돌이의 시〉에서도 미당 본인의 개인사를 계속 보충하여 기록했다. 두 작품은 연작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늙은 떠돌이의 시〉는 유년시절부터 1993년에 쓴 시들을 다루고 있고, 〈80소년 떠돌이의 시〉는 전작 이후 1993년 시편과 그 이후 1994년부터 1997년의 시편을 담고 있다. 김세희 saehee0127@jj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