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철칙이 무너진 찰나의 공백
《①나는 101살》#260704 경험치로 적는글
by여유시간
8시간전
매일 아침 식사를 마치면 하나의 의식이 시작된다.
벌써 10년째 이어온 습관이다. 벽에 걸린 조제약 봉지를 가위로 잘라 당뇨약과 심혈관약 다섯 알을 손바닥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 10개씩 묶인 고지혈증 약에서 한 알을 꺼내 더한다. 손바닥 위에 정확히 여섯 알이 놓인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물과 함께 삼킨다.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이 순서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몸에 새겨진 작은 철칙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평소처럼 조제약 봉지를 잘라 손바닥에 약을 털어 넣었다. 무심코 손을 보니 이미 여섯 알이 모두 놓여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잠깐... 고지혈증 약은 언제 깠지?'
약 묶음을 바라보니 이미 포장이 벗겨져 있었다. 분명 내가 깐 것이 맞다. 그런데 그 과정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몇 초 전의 일인데도 기억이 없다.
손가락으로 포장을 눌렀을 감각도, 알약이 '톡' 하고 손바닥에 떨어졌을 순간도, 시선이 어디를 향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몇 초 전의 과거를 아무리 되감아도 그 자리에는 하얀 공백만 남아 있었다.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나이가 들면 깜빡하는 일이 늘어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 달랐다. 무엇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분명 행동은 했는데 기억이 아예 생성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은 움직였지만 의식은 그 장면을 기록하지 않은 것 같았다.
궁금해서 AI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현상이 있을 수 있느냐고.
설명은 의외로 단순했다. 같은 행동을 오랫동안 반복하면 뇌는 그것을 자동화된 습관으로 처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행동은 정확하게 수행하면서도 의식적인 기억은 거의 남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이해와 경험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책에서 읽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무게가 다르다.
불과 몇 초 전의 내가 어디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묘한 감정을 남겼다. 섬뜩하다기보다는 낯설었다. 내 몸 안에 또 다른 자동 조종 장치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순간을 의식하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의 몸은 의식보다 먼저 움직이고, 의식은 중요한 장면만 골라 기억으로 남기는 것은 아닐까.
오늘 아침, 나는 몇 초의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얼마나 선택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처음으로 체험했다.
평범하기만 했던 아침 식탁 위에 잘라 던져진 조제약 비닐이 문득 낯설게 보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은 순간들만 이어 붙이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브런치 작가 여유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