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순공(文純公) 후조당(後彫堂) 연시(延諡) 연관(聯關)
오천(烏川) 및 계상간(溪上間)
주요(主要) 왕래문서(往來文書) 촬요(撮要)
4. 후조당연시후변무록후편(後彫堂延諡後辨誣錄後編)
(4-1) 서언(緖言)
이 책자는 1826년(純祖 26년, 丙戌) 초여름 후조당(後彫堂)의 사시(賜諡), 연시(延諡) 연관의 시비(是非) 이래 38년이 지난 1862년(哲宗 13년, 壬戌) 七월에 진성이씨(眞城李氏) 문중이 소위 『후조당가장변파록[後彫堂家狀辨破錄]』을 출간(出刊)함에 맞서서 군자리 오천(烏川)이 간행(刊行)한 것이다.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문순공(文純公) 후조당(後彫堂)은 생년(生年)이 1516년(正德 11년, 丙子, 中宗 11년)이시고, 1577년(萬曆 5년, 丁丑, 宣祖 10년)에 하세(下世)하셨는데 향년(享年)이 62년이시었다. 서세(逝世)하신 지 248년되는 1825년(純祖 25년, 乙酉)에 문순(文純-道德博聞曰文, 中正精粹曰純)의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62년 봄에 오천(烏川) 문중은 그 동안의 시호(諡號) 연관 시비 등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고 나서 사시(賜諡) 후 한 세대(世代)를 더한 터이라, 낙천사(洛川社)에 불천(不遷)으로 모신 후조당의 위패(位牌)를 그때서야 징사(徵士)가 아닌 문순공(文純公)의 시호(諡號)로써 개제(改題)하였다. 또 향현사(鄕賢祠)인 경현사(景賢祠)에 불천으로 모신 증참판공(贈參判公)의 위패를 그 해 3월에 개제(改題)한 즈음이었는데, 그 일에 반감(反感)하여 진성이씨(眞城李氏)들이 위와 같은 변파록(辨破錄)이라 한 것을 간행하였던 것이다.
오천(烏川)으로서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그 일에 대응(對應)하였던 것이 바로 이 『후조당연시후변무록후편(後彫堂延諡後辨誣錄後編)』이었다. 문집 형식으로 간행되었을 듯한데, 지금껏 종택(宗宅)에 전하는 문서는 두 사람 이상의 글씨로 된 필사본(筆寫本)이다. 모두 42판이지만 전자 진성이씨측 『후조당가장변파록[後彫堂家狀辨破錄]』에 비하여 아주 작은 글자들로 씌어졌는데, 역시 거지반(居之半) 작은 규모의 문집 한 권 분량이었다. 이 책자는 물론 양문중(兩門中) 후손들 모두 그 동안의 문순(文純) 사시(賜諡) 연관 시비(是非)의 본질과 핵심에 접근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위하여 여기서 한 가지 첨언(添言)할 것이 있다. 그것은 후조당의 사시(賜諡)에 대한 불만의 표출에서 양(兩) 문중이 가장 크고 무거운 것으로 여기었던 사항이 곧 퇴계(退溪) 선생이 15세 연장(年長)임에도 가장(家狀)에서 이른바 “처음에는 벗으로 삼았다가” 등으로 일컬은 바였다. 피차 문자(文字)의 왕래(往來)에서 첫 번째로 거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문중이 사용한 문자의 분량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곧 진성이씨 측의 변파(辨破)에서는 그 부분이 문집 1면(面) 남짓했지만, 오천(烏川)의 변무(辨誣)는 문집 7면(面)을 넘었다. 또 변정(辨正)이 필요하였던 전체 조목을 위하여 사용한 문자의 분량도 오천(烏川)쪽이 훨씬 방대(尨大)하였다.
이는 이씨측에 비하여 우리 군자리 오천(烏川)이 그 사안(事案)들을 더욱 크고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여 더더욱 힘들여 변무(辨誣)코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첨언(添言)할 사항은 계상(溪上)의 문중이 17개 조목으로 나누어 변파(辨破)하였으나, 오천(烏川)의 변무록(卞誣錄) 중 변정(卞正)에서는 모두 14개 조목으로 나눈바 다름이 있었다. 그것이 그리 된 것은 오천(烏川)이 때로 계상(溪上)이 둘로 나누어 본 것을 하나로 합쳐 변무한 것이 몇 조항(條項) 있었기 때문이다.
(4-2) 서책명(書冊名)-후조당연시후변무록후편
(後彫堂延諡後辨誣錄後編)
[參考-여기서의 『後編』은 ‘先篇’이나 ‘前篇’의 존재에 따른 ‘後篇’이 아니라 ‘後日의 編纂’이라는 뜻임.]
(4-3) 간행 시점(刊行時點)과 동기(動機)
■[原文]-洛川祠改題後,哲宗大王十三年壬戌[1862]甲午,改題景賢祠位版,是夏事變復上一層,溪上所謂卞破錄者出,而烏川對擧卞正錄成,逐條條下
□[飜譯]-낙천사(洛川祠)의 향사(享祀)를 위해 봉안한 후조당(後彫堂)의 위판(位版)을 개제(改題)한 다음 철종대왕(哲宗大王) 13년 임술(壬戌) 갑오(甲午)에 증참판(贈參判) 휘(諱) 효로(孝盧) 공을 향사(享祀)한 경현사(景賢祠) 위판을 개제(改題)하였는데, 이해 여름 계상(溪上)의 문중이 소위(所謂) 변파록(辨破錄)이라 하여 전자(前者)에 비하여 한층(一層) 더한 바를 출간하였으므로[眞城李氏의 소위 後彫堂家狀辨波錄 刊行을 가리킴] 그래서 오천(烏川)이 그에 대응하여 변정록(卞正錄)을 이루었으므로 이를 조목(條目)으로 나누어 아래에 열거한다.
(4-4) 변정록서설(卞正錄叙說) 국역(國譯)
■[原文]-伏以夏初,溪上文字,未免由我之歎,惕然自反,瞿然自訟,杜門屛息,恭俟究竟者三四朔,于玆矣每聞進道門內,閱月高會聲言,爲付之剞劂,擬諸金石,苟在自己身上則,俯首受刃,是所甘心,而事關先故誣衊此極,且念事往境,新易致眩白認黑矣.除非我固室同心之地,此箇苦心,其孰諒諸於是乎.前日畏縮之心,終不能持守,而知舊謹厚之戒,亦不能服行,始乃以癡拙之識,粗備其卞正之說,此生等情勢之不容已者也.大抵鄙家之前後所作,爲皆不外乎不容已三字焉. ▶惕-두려울 척, 놀랄 척. 剞-새김칼 기. 劂-새김칼 궐.
□[飜譯]-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초여름 계상(溪上) 문중의 문자가 우리들의 탄식을 불금(不禁)케 하므로 놀라운 마음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곡절(曲折)을 따져보면서 두문(杜門)하여 숨을 가누지 못한 체 공경히 결말을 기다리기 거의 삼사삭(三四朔)이었습니다. 이에 매양(每樣)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소문을 듣고 달마다 열리는 고회(高會)의 성언(聲言)을 살피면서, 그 어느 사람의 사행(事行)을 책판(冊板)에 붙여 새김이 금석(金石)에 다름이 없다 하더라도, 그 일이 진실로 자기 신상(身上) 연관이라면 머리를 숙이고 칼날을 받더라도 감심(甘心)할 바이지만, 일이 선대(先代) 고인(故人)을 모독(冒瀆)함이 극(極)에 달하였으며, 또 지난 일을 생각하되 또다시 백(白)을 흑(黑)으로 알도록 현혹(眩惑)하니, 우리와 같은 거처(居處)로 같은 마음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가 이와 같은 우리의 고심(苦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전일(前日) 움츠려 들었던 마음이 종래(從來) 자신의 마음을 가눌 수 없게 하였고, 친우(親友)들이 두터이 삼가도록 경계(警戒)한 바를 또한 복행(服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시초(始初)에 치졸(稚拙)하였던 안식(眼識)으로 그 변정(卞正)의 언설(言說)을 조악(粗惡)하게 준비하였던 것은 당시 우리들의 정세(情勢)가 용납(容納)치 않았던 탓이었는데, 대개 우리 문중이 전후(前後)에 지은 바[所作]는 모두 불용이(不容已) 석 자(三字)에 넘지 아니하는 바였습니다.
■[原文]-我後彫公學問節義之實,已載於卞錄中,而大賢門下高第弟子也.淸風卓節,百世不可掩者則,實理自顯,公議不泯,此當初吾黨所以齊籲九閽,冀蒙壹惠者也,而且況發論而始事者李氏也,儒疏而疏頭者李氏也,堂疏而獨上者李氏也,此秉彝之不容易者也, ▶籲-부르짖을 유, 九閽-宮闕. 冀-바랄 기. 彛-떳떳할 이.
□[飜譯]-우리 후조공(後彫公) 학문(學問)과 절의(節義)의 실질(實質)은 이미 변록(卞錄) 중에 실은 바와 같이 대현(大賢-退溪先生) 문하(門下)의 고제제자(高第弟子)이셨습니다. 그 청풍탁절(淸風卓節)을 백세(百世)토록 감출 수 없음인즉슨 실리(實理) 자현(自顯)하고 공의(公議)가 민멸(泯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들이 임금께 아뢰어 후조당께 시호(諡號)의 은전(恩典)이 내리도록 바람이었는데, 더욱 하물며 이 일을 발론(發論)하여 시작한 사람이 진성이씨(眞城李氏)요, 유소(儒疏)를 올릴 때의 소두(疏頭)가 또 진성이씨이며, 당소(堂疏)를 홀로서 올린 분이 또한 진성이씨라 이는 인간의 도리로서 결코 쉽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原文]-及其 諡命初下,風浪大作,或曰不可遵行之成 命,或曰何不請諡於 先朝,而必於當宁乎,或去姓名,而直呼後彫諱,至以儒疏堂疏中,所入之實蹟飜成,謂節節杜撰,而蜚文道內,投通太學,甚至於治章,上京擬抗 脩門,而喉院叱斥,欺 天計阻,則乃以其疏藏之,於陶山光明室中,以待百年之計云云,前後氣燄,其勢燻天,而 天恩優渥,特降曠典則剋日,迎 諡奉行縟禮者,此分義之不容已者也, ▶宁-쌓을 저, 군주의 자리 저. 喉院-承政院. 燄-불꽃 염. 縟-번다(繁多)할 욕.
□[飜譯]-급기어 시명(諡命)이 처음 내릴 때에 이르러서 풍랑(風浪)이 대작(大作)하여 혹(或) 어떤 이는 시명(諡命)을 준행(遵行)하지 못하리라 하는가 하면, 혹 어떤 이는 하필 청시(請諡)의 일을 전조(前朝) 때 하지 아니하고 당저(當宁)에서 하였는가 하였고, 혹 어떤 이는 그 성명(姓名)을 버리고 후조공의 휘(諱)를 직접 일컬으면서 유소(儒疏)와 당소(堂疏) 가운데 포함된 실적(實蹟)을 뒤짚는가 하면, 절절(節節)이 두찬(杜撰)이라 일컬으면서, 도내(道內)에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돌리고, 태학(太學)에 투서(投書)를 하고 심지어는 글을 만들어 상경(上京)하여 궐문(闕門)에 항의를 하고, 승정원(承政院)을 질책(叱責)하여 임금의 뜻을 막아보고자 하였고, 이에 그 소장(疏狀)을 도산서원의 광명실(光明室)에 갈무리하여 백년의 대계(大計)로 삼고자 한다 운운(云云)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전후(前後)의 기염(氣燄)이 하늘까지 뜨겁게 달구었으나, 천은(天恩)이 넓고 두터워 특별히 내린 은전(恩典)이 태양처럼 밝으니, 시호(諡號)를 맞아 받드는 번거롭고 까다로운 예절을 다함은 분수(分數)와 의리(義理)와 연관하여 또한 불용이(不容已)한 바였습니다.
■[原文]-祧埋已久,周粟難再,而惟此腏享之所,尙留徵士之題字,遽然三十八年之久則,先世未遑之擧,實是後生之責也.所以今春享禮改題者,亦事體之不容已者也.至若家狀則,撰述之體愚何敢言,而恐似撰德莫如據實矣,據實莫如藉重矣,謹考老先生遺書,則後彫公事行之據實,而藉重者莫此之信且大焉,學問焉推許其講質之益,名節焉獎美其堅貞之心鄭重,至訓昭然炳若,則撰狀之據實而藉重者,舍是書何以哉,此又家狀家所以傳信之,不容易者也. ▶祧-祧廟, 사당 조. 腏-강신(降神) 잔 철. 遽-갑자기 거. 遑-서두를 황. 藉重-중요한 것이나 권위 있는 것에 크게 의지함. 중요한 것에 의지함.
□[飜譯]-조묘(祧廟)로 체천(遞遷)한 지가 이미 오래요, 옛날의 습속을 되돌릴 수가 없었으므로, 후조당을 향사(享祀)하는 곳 위판(位版)의 제자(題字)가 여태껏 징사(徵士)로 되어 있는 지가 거연(遽然)히 38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선세(先世)에서 서두르지 않았던 거조(擧措)가 여태 계속됨은 실로 후생(後生)의 책임질 일이라, 그 때문에 올봄에 개제(改題)코자 향례(享禮)를 하는 일 또한 사체(事體)의 불용이(不容已)한 바였다 할 것입니다. 가장(家狀)의 일에 대하여 감히 저가 어찌 왈가왈부(曰可曰否)하겠습니까? 그래서 두렵게 생각하옵건대 덕(德)을 찬술(撰述)함에서 실질과 달랐을까, 또 실질을 거론함에서 자중(藉重-중요한 것에 의지함)함과 달랐을까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퇴계 선생의 유서(遺書)를 살펴보면, 후조공 사행(事行)의 거실(據實)에서 그 자중한 바가 그보다 더하게 믿을 만하고 또 클 수가 없으며, 학문에 대하여는 그 강질(講質)에서의 유익하였음을 추허(推許)하였고, 절의(節義)에서는 그 견정지심(堅貞之心)의 정중(鄭重)함을 일컬으셨고, 지극한 교훈(敎訓)이 밝은 불빛 같았으므로 가장(家狀)의 찬술(撰述)에서 거실(據實)에 자중함을 이 책 아니고 어찌 써 그러할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가장가(家狀家)가 전신(傳信)하기 불용이(不容易)한 까닭이었습니다.
■[原文]-而彼家乃以割裂粧竄刪沒挨逼等,許多名目搆捏,爲聲討之案,而所自爲說,則改換穿鑿,愚弄譏斥問學風節,全沒影響而自謂於老先生遺書,獨得其言外之旨,不幾近於不知量者乎,雖然彼亦一邊之見,則生等之今日苦口,亦安知非血氣所使,自底於悖肆狂妄之歸乎,庸是家狀全文附錄于左,卒望一一考準於陶山集,家狀中果有如李氏所云,則雖孝子慈孫,亦何辭以自明乎,第惟李氏所云卞破者,果以家狀之眞有所挨逼乎, 諡命後發怒,國人所共知然,若曰 諡典不得禰停,則 朝家事體至重,固非敢私自擬議者也.若曰同 諡爲未安,則父子師弟之間,往蹟亦可考矣.但以自尊之心,顯恣誣賢之習,正所謂奚斯漸之可長也.顧此鄙家不幸先當,而往古來今賢碩何恨,當世有識所以憂之深慮之遠者,豈止於伊川被髮之歎而已哉,嗚呼嘻矣,後之視今,安知不如今之視昔,而特筆俟百世云乎.▶竄-숨길 찬.刪-깎아낼 산. 挨-밀칠 애. 捏-없는 일을 거짓 만들 날. 譏 -나무랄 기. 禰-사당 니.
□[飜譯]-저들 이씨 집안이 이에 베어 내고 찢으며, 꾸며서 감추고, 끊어서 없애고, 밀치며 핍박(逼迫)하였다는 등 허다한 명목을 날조(捏造)하여 남을 성토(聲討)하는 문안(文案)을 만들고, 스스로를 위하여 한 말인즉슨 뒤바꾸고 후벼 팠다 말하고 학문풍절(學問風節) 우롱(愚弄)하고 나무라 배척(排斥)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퇴계선생 유서(遺書)에서 영향을 입은 바가 전혀 없다 하면서, 그 언외(言外)의 뜻을 홀로 끌어 들이면서도 거의 판단하지 못하는 자임을 모르는 것인가? 비록 그러하더라도 그들 역시 일변(一邊)의 견해인지라, 우리들의 오늘 고언(苦言)이 혈기(血氣)에 끌리어 하는 짓거리이거나 패악(悖惡) 방자(放恣)하여 미친 듯 망녕(妄侫)을 부림이 아닌 것임을 어찌 알리요. 가장(家狀)의 전문(全文)을 왼편에 부록으로 삼아 마침내 하나하나 도산집(陶山集)과 대조하여 보아서 가장(家狀) 중의 글이 과연) 이씨(李氏)들이 일컬은 바와 같다면 비록 효자(孝子)요 자손(慈孫)인들 어찌 또 자명(自明)하기를 마다할 수 있으리오. 과연 가장(家狀) 속에 밀치어 핍박하는 바가 있었을까? 시명(諡命)이 내린 후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발노(發怒)하였으나 시전(諡典)을 정지할 수가 없었음은 조정(朝廷)의 사체(事體)가 지중하였기 때문에 진실로 감히 사사로이 헤아려 의논하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동시(同諡)가 마음에 편치 아니 하였다면, 부자와 사제지간이 동시였던 왕적(往蹟)을 또한 가고(可考)할 수가 있습니다. 단지 자존지심(自尊之心)으로 선현(先賢)을 방자(放恣)히 무함(誣陷)하는 것이 버릇이라면 바르게 말하여 그것을 어찌 점차 키워 갈 수 있으리오. 이처럼 우리 집안이 먼저 당한 바 불행을 살펴보면, 고금(古今)의 현석(賢碩)들이 무엇을 한탄(恨歎)하였으며, 당세(當世)의 유식(有識)들이 심려하는 바가 먼 것을 근심하는 까닭이 무엇이며, 이천(伊川) 선생께서 사람이 야만(野蠻)으로 되는 바를 탄식함을 어찌 그치도록 할 것인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하, 우습도다. 후세 사람이 오늘을 보기가 요새 사람이 옛사람의 시각(視覺)과 다를 것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서 특필(特筆)하여 백세(百世)를 기다린다 일컬었습니다.
(4-5) 변정록(卞正錄) 국역(國譯)
(4-5-1) 변정록(卞正錄-1)-오천(烏川) 변정(卞正) 제1조(第1條)
■[家狀原文-1]-正德丙子先生生于烏川之第…止…退陶先生倡道于鄕,長先生十五歲,始也朋友之.[右家狀]
□[飜譯]-정덕(正德) 병자년(丙子年, 1516, 中宗 11年)에 후조당(後彫堂) 선생께서 오천(烏川)의 향제(鄕第)에서 출생하시었는데, ……(中略)…… 그 때 퇴도선생(退陶先生)께서 향리(鄕里)에서 도학(道學)을 이끄시었으며, 퇴계선생은 후조당 선생보다 15년 연상이었는데, 후조당 선생께서는 처음에는 붕우(朋友)로 대하셨지만, 운운.
■[溪上卞破原文-1]-旣曰長先生十五歲,繼言始也朋友之,無或有嫌於金公遜弟之行乎.雖誠有所據,旣非爲稱美之蹟,又非所以尊畏之道,況近始翁所撰遺事墓誌,並無見言,顧何據而爲是彼此無當之說乎.[溪上卞破]
□[飜譯]-이미 퇴계선생이 후조당 선생에 비해 十五세 연장이라 하였으면서 이어서 처음에는 붕우로 대하였다 말하니 혹시라도 김공이 손위 사람에 대하여 몸을 낮추고 공경하는 행실에 혐의가 있다는 말인가? 비록 진실로 증거할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행적(行蹟)을 칭미(稱美)하는 것이 될 수가 없으며, 존장(尊長)을 외경(畏敬)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하물며 근시재(近始齋) 찬술(撰述)의 유사(遺事)나 묘지(墓誌)에서 모두 보이지 아니하는 바인데, 돌아보건대 어떤 근거로 이와 같은 피차(彼此) 당(當)치 아니한 언설(言說)을 하였는가?
■[烏川卞正原文-1]-朋友之切磋講磨輔仁資益之義也,豈有如鄕人下流之爾汝相乎,妄加褻狎之者乎,曾子之孝悌而友顔子,其年爲十六歲上下矣,孟子有尙友之訓,必以年數而拘之者,非古之友道也,且白虎通曰,弟子有君臣父子朋友之道也,張子曰見彼之善而已,效之是師也,故有得其一言一義,如朋友者,有相親炙,而如兄弟弟子,有成就其身,而恩如天地父母者,據此兩說,則師弟分上,元有朋友之道焉.
□[飜譯]-‘벗으로 삼는다(朋友之)’는 말은 서로 학문을 닦고[切磋], 가르치고 연마하며[講磨], 어짊으로 서로 도우고[輔仁],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資益] 뜻이다. 어찌 시골 사람[鄕人] 하류(下流)들이 ‘너와 나’하고 서로 호칭하며 망녕되게 무람없이 친압(親狎)함을 일컫는 것이리오. 증자(曾子)의 효제(孝悌)는 안자(顏子)와 벗하여 이룬 것인데, 그 나이 차이가 16세 상하(上下)였다. 맹자(孟子)에는 벗을 숭상하는 가르침[尙友之訓]이 있었는데, 반드시 나이에 구애(拘碍)받음은 고래(古來)의 우도(友道)가 아니라 하였다. 또 백호통(白虎通)에 가로되, 제자(弟子)는 ‘군신(君臣), 부자(父子), 붕우(朋友)’의 도리가 있어야 된다고 하였다. 장자(張子)는 가로되, 그 사람의 착함[善]을 살펴볼 뿐인데, 이 스승에게서 본받을 바는 그러므로 그 일언(一言), 일의(一義)를 얻음이요, 붕우(朋友)는 서로 친자(親炙)함에서 형제와 같으므로 그 몸을 성취함에서 은혜가 천지부모(天地父母)에 다름이 없다 하였다. 이 두 설(說)에 의거하면 사제(師弟)의 분수(分數)는 붕우지도(朋友之道)에 있다 하리라.
■-後彫先生之始也朋友之,於未師事之前者,何所嫌於遜弟乎,大庵所撰誌文曰,不計年歲,晩暮摳衣,後彫先生讀延平問答箚錄註曰,余初年見先生,先生以涵養急先務爲云云,盖摳衣以前,聞涵養之義者卽,張子所謂得其一言一義,有如朋友時也,晩暮摳衣卽,恩如天地父母時也,
□-후조선생(後彫先生)이 처음에 벗으로 삼았다 한 말은 노선생(老先生)께 사사(師事)를 받기 전 일인데 무엇이 손제(遜弟)의 혐의이리요, 대암(大庵)이 지은 지문(誌文)에 ‘연세’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만년(晩年)에 가르침을 받으셨다. 후조선생이 지은 글 ‘讀延平問答箚錄’의 주(註)에서 가로되 내가 초년에 선생을 뵈었는데, 선생께서는 함양(涵養-학문과 식견을 넓히어서 심성을 닦음)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대체로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기 전 들으신 함양의 뜻인 즉 장자(張子)가 일컬은 바 일언일의(一言一義)가 있음을 얻음인데 붕우시(朋友時)와 같음이요, 만년(晩年)에 가르침을 받음은 그 은혜가 부모천지와 같은 때인 것이다.
■-狀中始中末三節,明其漸次歸服,而結之以晩悟爲恨云云者,可見其段段有據,何以曰彼此無當也,不論其晩年心悅誠服之日,而只道其初年,師事以前之事,曰嫌於遜弟也,曰非所尊畏也,摘抉文字手段極巧,而誣逼先賢形跡遽露,覽者當詳之.
□-가장(家狀) 가운데의 ‘始中末’로 나눈 삼절(三節)은 그것이 점차로 이루어진 귀복(歸服)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 결미(結尾)에서 ‘늦게야 깨달은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운운’한 것을 보아 그 단단(段段)한 논거를 가히 볼 수 있다. 어찌 써 피차(彼此)에 무당(無當)하다 하였는가? 그 만년에 심열(心悅)하고 성복(誠服)하신 바를 말씀 하시지 아니하시고 단지 초년 사사(師事) 받기 이전의 일만 일컬었다고 손제(遜弟)의 혐의라 말하고, 어른을 존외(尊畏)한 바가 아니라 말하였는가? 골라 쓴 글자의 솜씨가 참으로 교묘히 선현(先賢)을 무핍(誣逼)한 형적(形跡)으로 급거(急遽)히 드러내 보였음을 보는 이들이 당연히 상세히 알리라.
■-近始公所撰遺事墓誌,無見云云,是果尊信近始公乎,盖其述先德,詳略或異,家庭論撰,簡古爲貴,遺事幾條,只是未成之書,墓誌亦不免略而不詳,故大庵誌文出於近始公歿後,十五年之久,其中如耽賞松柏愛梅吟詩等語,亦可以前誌之所無而曰無所據乎,近始公闕筆,大庵追補,大庵之所闕漏,增補於撰狀之日,秉筆家何嘗無所見,而輕下一字乎,非敢謂稱美,而誠有所據也.
□-근시공(近始公) 소찬(所撰)의 유사(遺事) 묘지(墓誌)에서 볼 수 없는 바라 운운하였는데, 이것이 과연 근시공(近始公)을 존신(尊信)하는 말인가? 대개 선덕(先德)을 기술(記述)함에 상략(詳略)이 혹시 다를 수 있고, 가정(家庭)의 논찬(論撰)에서 간고(簡古)함을 귀(貴)하게 여기므로, 유사(遺事)의 몇 조목(條目)은 단지 미완성(未完成)의 글이며, 묘지(墓誌) 역시 약설(略說)하여 상세하지 못하였다. 고(故) 대암(大庵)의 지문(誌文)이 근시공(近始公) 몰후(歿後) 15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그 가운데에서 송백(松柏)을 탐상(探賞)하고 매화(梅花)를 사랑하였음과 시(詩)를 읊은 일 등의 말이 전지(前誌)에 없었다 하여 근거가 없다고 할 것인가? 근시공이 궐필(闕筆)한 바를 대암(大庵)이 추보(追補)하였고, 대암이 궐루(闕漏)한 바를 가장(家狀)을 지을 때 증보(增補)하였을 터인데, 병필가(秉筆家)가 어찌 일찍이 본 바가 없었을 것이며, 단 한 글자인들 가벼이 여겼으리요? 감히 칭미(稱美)하지 않았다는 것에 진실로 근거삼을 바가 있는가?
■[家狀家卞]-記某童丱日,隣鄕一長老,過宿先廬,話間云,後彫翁簡亢虖,少日字老先生以朋友待之,中覺友之未安,不復字待以丈人,行末乃自處門人,使此老漸次歸服,朋友而長少而竟至師弟之者,非老先生豈可能之虖,先生之道大德宏,於此亦可知,而後彫之不主先見,漸以心悅誠服,又非知足以知聖人不能也,某時頗有耳聰識之,及年長後觀近始公,所爲後彫先生遺事曰,每以晩悟爲恨,大庵翁所撰墓誌,則曰不計年歲,晩暮摳衣陶山,於是益信前聞,爲不妄以爲斯言也.於師門及門生俱好語也. ▶丱-쌍상투 관. 亢-오를 항. 虖-울부짖을 호, 乎와 같이 씀. 樞衣-가르침을 받음.
□-모(某) 아이 적 기억인데, 이웃 고을의 어른 한 분이 부모 거처를 지나다가 일숙(一宿)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에서 후조옹(後彫翁)이 대쪽처럼 굳으시어 젊은 적에는 노선생(老先生)을 붕우(朋友)로 대하다가 중간에 벗을 삼음이 미안함을 깨달으시어, 다시는 자(字)를 부르는 대접을 그치시고 어른으로 모시었으며, 마지막에는 문인(門人)으로 자처(自處)하시었는데, 이는 노년에 이르러 점차 귀복(歸服)하심이었다. 붕우이다가, 어른과 젊은이이고, 필경(畢竟)에 사제지간(師弟之間)으로 됨이 노선생(老先生)이 아니고서 어찌 가능한 일이리오. 선생의 도(道)가 크고, 덕(德)이 넓었음을 이로써 알 수 있게 된다. 후조당께서 선견(先見)을 굳이 지키지 않으시고, 점차 기쁜 마음으로 성실히 따르시었는데, 참으로 성인(聖人)을 알아보는 식견이 없었다면 그리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모(某)가 당시에 자못 귀가 밝아서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나이가 든 후에 근시공이 지으신 바 후조선생의 유사(遺事)를 살펴본 데에서 왈, 나이를 먹어 늦게 깨달은 것을 매양(每樣) 한스럽게 여겼다 라 하셨고, 대암옹의 묘지(墓誌)에는 가로되 연세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늘그막에 도산(陶山)으로 가르침을 받고자 하셨는데, 그 때에 더욱 이전 날 소문한 바를 신뢰하게 되었다 하였으므로 망녕되게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於師門, 及門生’이라 하는 말들은 다 좋은 말들이다.
■-十年前以本家言,稡後彫先生狀草,至登師門一條曰,是時退陶先生,倡道于鄕,長先生十五歲,先生始也朋友之,中焉長少之,末乃執弟子禮,登門請業,盖見老先生之道益大德益全,以漸以歸服也,識者謂非知足,以知聖人不能也,然每以晩悟爲恨云矣, ▶稡-모을 최.
□-10년 전 우리 집에 전하는 말로 후조선생의 가장초본(家狀草本)을 엮을 때 사문(師門)에 급문(及門)하신 한 조목(條目)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 때 퇴도(退陶) 선생께서 고을에서 도학(道學)을 이끄시었는데, 퇴계선생(退溪先生)은 선생보다 15세가 많았다. 선생은 처음에는 퇴계선생과 벗으로 지냈지만, 이어 어른과 젊은이로 지내다가, 마지막에는 제자(弟子)의 예(禮)를 갖추어 그 문하(門下)에 들어가 학문을 닦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대개 노선생(老先生)의 도학(道學)이 더욱 높고 그 덕망도 더욱 온전함으로 보고서 점차 그 도덕에 감복(感服)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식자(識者)들은 ‘성인(聖人)을 알아볼 만한 지혜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今鄕人謂,豈有十五年間朋友之理乎,誚謗大起,某將得罪於斯文矣,然今俗則率屈指計年友之長之,古人其盡然乎,所謂四不挾尙矣,至中古此風亦不喪盡,厓老至於趙月翁十八歲以間,而抵書中所謂高明,若鄙人若吾輩若承晤者,非朋友間語虖,寒爺又少厓老一歲矣,其與月翁書辭語不能今記,而題則必擧表德尊待間,果有是例乎,此則猶可準曾子吾友之例, ▶誚-꾸짖을 초. 謗-비방할 방. 厓-언덕 애. 晤-밝을 오, 총명할 오. 爺아비 야, 남자의 존칭 야. 表德-字.
□-요사이 향리(鄕里)의 사람들은 어찌 15세의 차이가 붕우로 될 이치가 있는가라고 말한다. 꾸짖음과 비방이 크게 일어나 모(某)가 장차 사문(斯文)으로부터 득죄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요사이의 습속을 보면 손가락을 굽혀 나이를 헤아려 벗을 삼고 어른으로 대우하는 등의 일을 따르고자 하는데, 옛사람들도 다 그렇게 했을까? 이른바 사불협상(四不挾尙-未詳?)이라는 것이 있었다는데, 중고(中古)에 이르러서도 그 풍속이 역시 없어지지 않았다 한다. 서애(西厓-柳成龍, 1542-1607) 선생은 월천(月川-趙穆, 1524-1606) 선생에 비하여 18세의 차이였다. 그런데 서찰(書札)의 글 가운데에서 쓴 이른바 고명(高明)이니 비인(鄙人), 오배(吾輩), 승오(承晤)와 같은 말들이 붕우간의 말이 아니라 하겠는가? 한강(寒岡-鄭逑, 1543-1620) 선생은 서애 선생에 비하여 한 살 아래였는데, 월천 선생과의 서찰에서 쓰신 말을 지금 기억하지는 못하나 제목에서 보면 반드시 그 표덕(表德-字)을 써서 존대(尊待)를 하였는데, 과연 이와 같은 예(例)에서 증자(曾子)가 오우(吾友)라 한 예(例)를 준거로 삼을 수 있으리라.
■-蘇恥兩先生年皆乙亥,先後彫一歲矣,乙丙之間相距果幾許乎,蘇老之祭老先生文曰,資麗澤之多,時資麗澤三字,豈果長少間語虖,朋友間語虖,恥齋之稱老先生,初則擧官與諱,而曰李應敎某,其後則皆字之曰某令公,一處則曰某先生,而其下累處,則皆曰某公,言必稱字果非朋友間虖,然則乙生之所友,而丙生之友之者,果異事虖,
□-소재(蘇齋-盧守愼, 1515-1590)와 치재(恥齋-洪仁祐) 양(兩) 선생은 모두 생년이 을해년(乙亥年, 中宗 10年)으로 후조당보다 한 살이 위였다. 을년(乙年)과 병년(丙年)의 차이가 과연 그 얼마인가? 소재(蘇齋)가 노선생(老先生)께 쓴 제문(祭文)에서 ‘資麗澤-麗澤은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양에 힘씀’이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그 ‘資麗澤’이라는 세 글자가 어찌 과연 어른과 젊은이 사이의 말일까요? 붕우 사이의 말일까요? 치재(恥齋)가 노선생을 칭(稱)하되, 처음에는 관직(官職)과 함께 이름으로 불렀고, 그 다음에는 이응교모(李應敎某)라 하였고, 그 후에는 다 자(字)를 일컫되 ‘某令公’이라 하였고, 한 곳에서는 ‘某先生’이라 하였으며, 그 아래의 여러 곳에서는 모두 ‘某公’이라 하였는데, 언필칭(言必稱) ‘字’를 썼는데 과연 붕우지간이 아니라할까? 그러므로 을생(乙生)이 벗삼은 사람이 병생(丙生)의 벗으로 되는 일이 과연 이상한 일일까?
■-後彫之始也友之者,未之深知也,中焉長之者,漸熟而歸服也,末乃執弟子禮者,七十子之服孔子也,若以初未深知,歸咎後彫虖,末後日月之更也,其可不仰之虖,老先生之道德崇廣於此,其可不益驗虖,然則其據實而云云者,果有未安於師門虖,記此者之獲罪於師門也,
□-후조당께서 처음에 노선생을 벗으로 대하였던 것은 깊이 알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중간에 어른으로 모시게 된 것은 점차 익어져 의지하고 따르기 때문이었다. 끝에 가서 제자(弟子)의 예(禮)를 갖추게 된 것은 70인의 제자가 공자(孔子)를 따름과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 노선생을 깊이 알지 못하였던 것을 후조당의 허물로 돌릴 수 있을까? 훗날에 세월이 바뀌었는데 그래도 숭앙(崇仰)하지 않았을 것인가? 노선생의 도덕이 그 때에 이르러 더욱 높고 넓어졌는데, 그럼에도 유익한 체험이 불가능하였을까? 그러므로 그 실제적인 근거(根據)를 운운하는 이들에게 과연 사문(師門)에 대하여 미안(未安)하다고 해야 하며, 그 글을 쓴 사람이 사문(斯文)에 대하여 죄(罪)를 입어야 할까?
■-蘇老麗澤云云之祭文,先輩之入錄於附錄中何也,當初編定者月翁也,月翁其誠淺於斯門不知,蘇老之可咎虖,抑每每稱字之恥齋集,乃古人之藏板於陶院者又何也,其間又有坐地之說,是則尤可笑已,後彫少日,果以坐地然也,吾家山南公小老先生財十一歲,而未第前已及門,先雪月公少後彫十五歲,亦先已摳`衣,會謂從兄弟之間,亦有坐地之自別者乎矧虖, ▶矧-하물며 신. 坐地-地位.
□-소재(蘇齋)가 여택(麗澤) 운운한 제문(祭文)을 선배들이 부록 가운데에 입록(入錄)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당초의 편정자(編定者)는 월천(月川) 선생이었다. 월천 선생이 사문(師門)에 대하여 성심(誠心)이 엷었고 부지(不知)하였던 것을 소재(蘇齋)의 허물로 돌릴 수 있을까? 또한 때마다 ‘자(字)’를 일컬었던 치재집(恥齋集)을 고인(古人)의 장판(藏板)으로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사이에 벼슬 차례[坐地]의 설(說)이 있었는데 그것 역시 가소(可笑)로운 바였다. 후조당께서 젊어서 그러하셨던 바가 과연 지위(地位) 차서(次序) 때문인가? 우리 집안의 산남공(山南公)은 노선생에 비해 겨우[財] 11세 아래였는데, 급제하기 전에 이미 급문(及門)하셨고, 선대(先代) 설월공(雪月公)께서 후조당보다 15세 아래이신데 역시 앞서 가르침을 받으셨다. 종형제지간이 모이어 담소를 함에서 또한 지위가 자별(自別)하였을 터인데 하물며 어찌 그러했을까요?
■-狀草之成在乙亥歲初,其時一士友貽書要見,某手謄以送,他人因此獲見,擧其中講學,則老先生亦時有舍從一句,語曰此於師門無所可損,於後彫翁則儘好語云,而未聞以始也一句有是非之者,今於十年後,後彫翁 美諡之下,乃叢鏑群集于淺弊未知其云云,五字於後彫翁 諡前,則無未安於老先生,而今於 成命之下,始乃別生未安之端虖,玆錄之將奉質于心公眼明君子.[右 烏川卞正, 以下並依此例] ▶儘다할 진. 鏑-살촉 적, 명전(鳴箭) 적.
□-가장(家狀)의 초본(草本)이 이루어진 것은 을해년(乙亥年-1815?) 세초(歲初)였다. 그 때 한 벗이 보고자 원하는 글을 보내왔기에 모(某)가 손으로 베껴 보냈으므로 타인들도 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 거론하되 “강학(講學) 때에는 노선생께서도 때로 당신의 의견을 버리고 따르는 경우가 있었다” 한 구절이 있었다. 그 때 말하기를 “이 구절이 사문(師門)에 대하여 손상(損傷)할 바는 없다고 하였고, 후조옹에게는 대단한 호어(好語)라 하면서도 ”처음에는 벗을 삼았다가“ 란 구절에 대하여는 전혀 시비(是非)가 없었다. 이제 10년이 지난 후인데, 후조옹이 미시(美諡)를 받은 처지에서는 천견(淺見)의 폐해(弊害)를 알지 못한다 하면서 화살을 퍼붓거늘 그 다섯 글자[始也朋友之]가 후조공이 시호(諡號)를 받기 이전에는 노선생께 미안할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시명(諡命)이 내린 다음에 미안(未安)한 단서(端緖)가 새로이 생겨났다는 말일까? 이 기록에 대하여 장차 공안(公眼)이 밝으신 군자(君子)들게 다시 한 번 질의(質疑)해 보고자 한다.[이상(以上)은 오천(烏川)이 변정(卞正)한 내용임, 이하(以下)의 글들도 모두 이 예(例)를 따라 서차(序次)함]
(4-5-2) 변정록(卞正錄-2)-오천(烏川) 변정(卞正) 제2조(第2條)
■[家狀原文-2]-嘉靖末,始調 祠官不起,隆慶戊辰冬又 除陵官,老先生時在都下,貽書勉出曰,雖非所樂,來拜 聖恩看如何,作去就 ▶貽-줄 이, 끼칠 이.
□[飜譯]-가정말(嘉靖末)에 처음으로 사관(祠官)을 제수(除授) 받으시었는데 부임(赴任)하시지 않으셨고, 융경(隆慶) 무진(戊辰, 1568)에 또 능관(陵官)으로 제수되었는데, 당시 한양에 계시던 노선생이 서신(書信)을 보내어 출사(出仕)하기를 권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비록 관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올라와서 성은(聖恩)에 숙배(肅拜)를 올리고, 사정이 어떠한지를 보고 거취(去就)를 결정운운.
■[溪上卞破原文-2]-原書採入不得不就加節略,然存拔之間,亦須謹愼,不然則其悖本旨鮮矣,聖恩下刪去就閱寒暑四字,或恐非原書之旨也,盖老先生之意,以爲晩景祠官,雖非所樂,而 聖恩不可不一肅,亦不妨優游卒世,以決去就,正綽綽有餘,此其爲語勢之圓滿,進退之無缺,而今直曰,來拜 盛恩看如何作云云,則是似爲看 聖恩之如何,而決其去就也,夫以爵祿,恩遏之故,以懷心報錢若水,且以爲中人以下之,所爲而老先生迺以是勉人也乎. ▶悖-어그러질 패. 綽-너그러울 작. 알
□[飜譯]-원서(原書)의 글을 채입(採入)할 때에는 부득불 보태거나 줄이는 수가 있는데, 그대로 두거나 빼어버리거나 하는 경우에는 또한 모름지기 근신(謹愼)해야 한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본지(本旨)에 어긋남이 뚜렷해진다. 여기서는 ‘聖恩’의 아래 원서(原書)에 있는 ‘就閱寒暑’ 네 글자를 산거(刪去)하였는데, 혹시나 원서(原書)의 본지(本旨)와 달라진 것이 아닐까 두렵다. 대체로 노선생의 뜻은 “만경(晩景)에 사관(祠官)을 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겠지만 성은(聖恩)에 불가불(不可不) 숙배(肅拜)를 드리더라도 한가롭게 세상을 마치는 데 무방(無妨)할 것”이라 하셨다. 그렇게 거취(去就)를 정하는 것이 맹자(孟子)의 이른바 “나아가고 물러남에 여유롭게 한다는 것이 됩니다.” 와 같이 말하여야 어세(語勢)가 원만(圓滿)해 지고, 진퇴(進退)에 결함(缺陷)이 없게 된다. 그런데 직통(直通)으로 “성은이 어떠한가를 보아서 거취를 결정 운운”하였으므로, 이는 마치 “성은(聖恩)이 어떠한가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라는 것이 된다. 대저(大抵) 작록(爵祿)은 은혜를 끊고 막는 것이기도 한데, 금전(金錢)으로 보상하기 물과 같으리라 마음을 먹는 것이 중인(中人) 이하의 소위(所爲)일 것이라 한 노선생의 말씀이 무슨 권면(勸勉)인가?
■[烏川卞正原文-2]-後彫先生 仁廟己巳以後,所守已堅實,松柏于庭,而顔其堂曰後彫,又種梅其傍,以寓淸寒之趣,老先生詩集中,騷情非淺後彫春,苦節君休訝主人,與我已成心契密,不應桃李更交親者也,至於六月晦夜仁山之哭,前後二十年餘之間,歲以常爲七月一日,卽 仁廟昇遐之辰,而仁山卽先大夫雲巖公之墳庵也, ▶遐-멀 하, 멀어질 하, 갈 하.
[飜譯]-후조선생께서는 인조(仁祖) 기사(己巳-1625, 仁祖 7年)이후 지조(志操)를 지키시기 견실(堅實)하셨으므로 뜰에 송백(松柏)을 심고 그 거처의 이름을 후조당(後彫堂)이라 하셨으며, 또 그 옆에다가는 매화(梅花)를 심어 청한(淸寒)의 지취(志趣)를 우의(寓意)하셨는데, 노선생(老先生)이 시집(詩集) 중에서 “봄을 만나 후조당(後彫堂) 시정(詩情)이 얕지 않네, 주인의 굳은 절개 그대는 의심 마소, 나와 함께 긴밀히 심계(心契)를 맺었으니, 도리화와 어울려 친하지는 않을 걸세.”라 하셨다. 六월 그믐날 밤에는 인산(仁山)에 드시어 곡(哭)하시기 전후 20년이시었는데, 때가 7월 1일인즉슨 인조(仁祖) 임금의 승하일(昇遐日)이요, 인산(仁山)은 곧 선대부(先大夫) 운암공(雲巖公)의 재실(齋室)이었습니다.
■-先是大小尹之說行於民間,雲巖公每歎曰,國家大禍,將自此始矣, 東宮一國人心之所屬,何乃有此言也,至於臨終,執後彫公手泣謂曰,勿爲時論所集撓云云,雲巖公下世在於甲辰九月,而翌年七月 仁廟昇遐. ▶撓-어지러울 요, 굽을 요, 마음이 바르지 아니할 요.
□-먼저 대소윤(大小尹)의 설(說)이 민간에 유포(流布)되어 있었는데, 운암공(雲巖公)께서 매양(每樣) 탄식하시면서, “국가의 큰 화근(禍根)이 반드시 이로 인하여 시작되리라, 동궁(東宮)께 일국의 인심이 쏠려 있는 터인데, 어찌 이와 같은 말이 있을까”라고 하셨다. 임종(臨終)에 이르러서는 후조공의 손을 잡고 우시며 말씀하시되, “요사이의 시론(時論)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라 하셨다. 운암공이 서세(逝世)하신 것은 갑진년(甲辰年, 1544, 中宗 39年) 9월이었는데, 익년(翌年) 7월에는 인종(仁宗)께서 승하(昇遐)하셨다.
■-嘉靖末 祠官之始調已爲不起,則果於戊辰再 除之日,始以尋常之 祠官爲不樂也,老先生書中,就閱寒暑四字,恐是從容宛委善難處,有如成聽松拜命不就之意也,畧而言之,則看如何三字,已包其意故,家狀中所以節約者,彼謂今直曰來拜 聖恩看如何云云, 則是似爲看 聖恩,如而決其去就也,老先生乃以勉人也乎此,則卞明我先師,不畫人於卑近之道也,甚善甚善然,亦爲夸逞之,家狀家而以中人以下事,無端爲老先生貶薄之辭,加之後彫先生乎,此綽綽有餘四字,亦豈年邁之衰宦念漸薄者之,所可承當者乎. ▶夸-자랑할 과. 逞-구속 아니 받을 정. 굳셀 령, 꾀할 령.
□-가정말(嘉靖末-1566, 丙寅, 明宗 21年)에 처음 사관(祠官)에 제수(除授) 되시었을 때 나아가지 않으시었는데, 무진년(戊辰年, 1568, 宣祖 元年) 두 번째 제수 받으신 날에 처음으로 심상(尋常)하게 사관(祠官)을 배명(拜命)하기가 즐겁지 아니한 일이었을까? 노선생의 서찰 가운데 ‘就閱寒暑’라 한 말은 종용(從容-태연하고 침착함)함과 완위(宛委-완곡하고 자세함)함과 선처(善處)함과, 난처(難處)함을 두려워함인데 곧 성청송(成聽松-成守琛)이 벼슬을 배명(拜命) 받고서 나아가지 아니한 뜻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看如何’ 세 글자 속에 이미 그러한 뜻[就閱寒暑]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가장(家狀) 중에서 절략(節略)한 까닭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바로 일컬어 “來拜 聖恩看如何” 운운하였는데, 이는 곧 “看 聖恩如而決其去就”와 같은 뜻이 된다. 이에서 노선생께서 출사(出仕)를 권면(勸勉)하시었음이 곧 우리 선사(先師)께서 비근(卑近)한 도리(道理)로써 사람을 판단하지 아니하셨음을 바르게 밝혀 말한 것이다. ‘甚善甚善’이라 한 말 또한 과장(誇張)이었다. 가장가(家狀家)의 이른바 중인(中人) 이하(以下)인 사람의 일은 말하였는데 노선생께서 무단(無端)히 후조당을 폄박(貶薄)하는 말을 가(加)한 것일까? ‘綽綽有餘’라 한 네 글자도 또한 어찌 연매(年邁)하고 기운이 쇠잔(衰殘)하여 벼슬할 마음이 점차 엷어지는 사람에게 가히 마땅한 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