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아메리칸 포크 송 가운데 한 때 우리 중등학교 음악 교과서에까지 실려 알려진 곡기 '오마이 달링 클레멘타인'이다. 이 노래기 불리기 시작한 1863년과 18884년 부터라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미국의 '국민가요'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 데는 1941년에 빙 크로스비란 포크 가수가 불러 빌보트 챠트 20위에 올리면서부터였다. .
1948년 미국 켈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찾아 켈리포니아로 몰려갔다. 서부로 몰려가는 마차 행렬과 원주민 인디언과의 충돌, 인디언을 야만적으로 몰아내는 서부극의 플롯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1849년 한 해 동안에 금을 찾아 켈리포니아로 몰려간 인구가 30만 명이라고 하고 이들을 일컫는 명칭이 fortty niners(49년에 몰려간 사람들)이었다. 이 때 광부들의 생활을 묘사한 노래가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이다.
'산 속 광산에 금을 캐는 광부가 살았다네, 그는 포티나아너이고 클레멘타인 이라는 딸 아이가 하나 있었다네. 내 사랑 클레멘타인 너는 어디로 갔느냐?, 원 가사 2절에는 클레멘타인의 못생긴 외모를 조롱하는데 1840년대에는 이런 뒤집기식 풍자 노래가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가사의 내용이 전혀 엉뚱하게 바뀐다. '넓고 넓은 바닷가 외딴 오막살이에 고기 잡는 늙은 어부가 클레멘타인이라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네.....'
아마도 가사를 번안한 작가가 포티나이너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그 역사 배경을 전달할 적절한 표현방식을 찾지 못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니 이 노래는 우리에게는 집나간 어린 딸을 애절하게 그리는 늙은 홀아비 어부의 노래가 되어 버렸다.
노래 가사의 내용이 왜곡된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는 미국 서부개척사의 어두운 일면을 거의 모른다는 점이다. 켈리포니아는 1850년에 미국의 한 주로 연방에 가입했고 1869년에는 미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 되었다. 초대 켈리포니아 주지사 피터 베넷은 인디언에게 주어진 선택은 멸종과 이주 가운데 하나 뿐이라고 선언했다. 한 때 70만 명으로 추산되던 켈리포니아지역 인디언 인구가 1845년에 15만 명으로 줄었고 1890년에는 겨우 2만 명만 남았다. 켈리포니아 주정부는 인디언의 머리껍질을 현상금을 걸고 사들였다. 이것이 아름다운 클레멘타인이 살던 시대의 한 단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