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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gacūḍāmaṇyupanisiad |
Gorakṣaśataka |
Gorakṣapaddha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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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yar본 |
Baroda 필사본 |
Nowotny 1976본 |
Bombay, 1967본 |
1 |
104a 6-7 |
(4b) |
(I. 4b)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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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I. 7 |
3a-b |
10c-d |
10c-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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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c-4b |
13 |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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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c-24 |
15-35b |
15-35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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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9 |
36-40 |
3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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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a-b (a) |
(90a-b ?) |
(39a-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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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c-39b |
41-49 |
4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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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c-45 |
51-83 |
5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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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7 |
51-83 8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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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1 |
51-83 77-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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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5(b) |
51-83 6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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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70 |
51-83 58-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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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
51-83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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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4 |
105a7-106a9 |
- |
- |
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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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
84 |
86ab |
86ab |
86a-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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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c-90 |
87c-91 |
87c-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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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a-b(c) |
92a-b (91b ?) |
92a (91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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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c-96 |
92c-97 |
92c-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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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9 |
99-101, 102-103, 104e-106(e), 109e-108 |
99-101 II.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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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06(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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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101, 102-103, 104e-106(e), |
109e-108 99-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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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1-7107-121(f) |
110-124 |
9-23 |
부이에 따르면 Adyar본 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의 제1송과 72-84를 제외한 모든 게송이 고락샤샤따까와 고락샤빠드핫띠라는 두 문헌에서 발견된다. 한편,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조사한 바로다(Baroda)의 그란타(grantha) 필사본(Baroda Oriental Institute, Ms. No. 9995r/1)과 Adyar에서 출판된 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와 일치하는 곳은 두 군데 뿐이다. 부이에 따르면 바로다 필사본이 더 오래된 형태의 이본이지만 부이의 결론은 ‘108 우빠니샤드’가 집성되던 17세기에 편집자가 고락샤샤따까에서 발췌한 게송을 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 2-71, 84-121에 편입시켰다는 것(p. 37)이다.
이 쯤에서 떠오르는 의문은, 불이론자들이 요가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근거와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한 것이다. 반대로 오히려 하타요가 문헌이 불이론 문헌을 발췌했던 것은 아닐까? 부이가 스스로 묻고 대답했듯이 고락샤샤따까와 하타의 등불, 요가비자(Yogabīja)와 같은 하타요가 문헌이 각각 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 나디빈두-우삐니샤드, 요가쉬카-우빠니샤드를 차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pp. 111-112). 그 이유는 나라야나(Nārāṇaya)와 같은 요가-우빠니샤드 주석자들조차 하타의 등불이나 케짜리비디야를 인용하고 있고 또 고락샤나타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p. 115)이고 또 하타의 등불이 나다빈두-우빠니샤드나 샹까라의 아빠록샤아부브후띠(Aparokṣānubhūti)를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p. 112)이다. 덧붙이자면 최소한 14세기 이전에 성립된 고락샤샤따까와 1450년에 성립된 하타의 등불이 15세기에서 17세기에 성립된 요가-우빠니샤드들을 인용했을 리 만무할 것이다.
부이의 주장에 동의할 경우엔 불이론 학자들은 물론이고 요가 학자들도 풀기 힘든 새로운 난점이 생긴다. 그것은 고락샤샤따까와 하타의 등불에 권위를 부여하고 인용하며 자설에 편입시킨 불이론자들의 행위는, 사실상 샹까라의 불이론에서 이탈한 것 내지는 반역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부이의 지적대로, 샹까라(Śaṅkara)가 이미 브리하다란야까-우빠니샤드(Bṛhadāraṇyakopaniṣad) I.4.7에 대한 주석에서 ‘심작용(心作用)의 지멸’(cittavṛttinirodha)이라는 방법으로는 해탈에 도달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p. 51) 특히 브라흐마경 주해(Brahmasūtrabhāṣya) II.1.3에서 요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p. 55) 15세기 이후의 불이론이 요가를 수용하고 심지어 하타요가 문헌에 권위를 부여했던 것(p. 10)은 극적인 변심, 아니 스승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일 것이다. 17-18세기의 불이론 수행자들 조차 샹까라의 브라흐마경주해에서 설명된 불교의 유식사상을 알고 있었을 정도로 브라흐마경주해의 권위가 확고했다는 점에서 ‘샹까라가 불교보다 더 강력하고 정확하게 비판했던 요가’를 후대의 불이론이 수용하고 심지어 권위를 부여했던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요가에 대한 샹까라의 입장이 전환되었을 가능성이다. 부이가 빠딴잘라요가샤스뜨라비바라나(Pātanjalayogaśāstravivaraṇa)를 검토하면서 ‘샹까라가 초기엔 요가수행자였지만 후대엔 요가로 전향했을 것’이라는 하커(Paul Hacker, 1958-9, pp. 119-148)의 대범한 가설을 상기했던 것(p. 61) 역시 이 문제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부이는 즉답 대신 다양한 가능성을 언급한 후 ‘설사 이 문헌이 샹까라의 진작이라 해도 전형적인 샹까라의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는 선’(p. 62)에서 마무리한다. 필자도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룰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샹까라가 거부했던 요가가 후대의 불이론에 수용될 수 있었던 근거’를 비바라나의 진-위 문제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샹까라가 요가에서 불이론으로 실제로 전향했다’고 한다면, 후대의 불이론자들이 재차 샹까라가 하선했던 그 배를 짊어지고 산으로 갈 이유가 오히려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스승이 요가수행자에서 불이론으로 전향했다’는 것은 ‘요가의 유용성’을 떠올렸다기 보다는 요가 비판의 정당성만 더 각인시켰을 것이다. 더욱이 후술하겠지만 ‘상캬적 요가에 대한 바로 그 해설서’가 샹까라의 진작이라 해도 그것이 후대 불이론이 하타요가를 수용하게 된 버팀목이나 근거는 될 수 없다.
두 번째 해결책은 샹까라가 거부했던 요가의 정체와 그가 충분히 활용했던 요가를 구별하는 것이다. 샹까라가 거부하고 비판했던 요가는 의심할 바 없이 BṛU. I.4.7에 대한 주석에서 비판된 ‘심작용(心作用)의 지멸’(cittavṛttinirodha)의 요가, 즉 그가 파악한 바의 ‘상캬적’ 빠딴잘리 요가이다. 또 Bsbh. II.1.3에서 비판했던 요가 역시 ‘사실 그가 틈만나면 끊임없이 비판하고자 했던 상캬’에 대한 비판의 동일 선상에서 제기된 ‘상캬적 요가’이다. 샹까라의 요가 비판은 ‘지성을 결여한 승인(勝因, mūladhāna, =prakṛti)에서 세계가 전개될 수 없고 오직 의식적 존재인 브라흐만에서 전개될 수 있다’는 논리에서 근본원질-전변설을 비판하고 브라흐만-전변설을 확립하고자 했던 샹까라의 상캬 비판의 연장선에서 이루어 졌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샹까라의 요가 비판은, 그가 끊임없이 비판하고자 했던 상캬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제기된 ‘상캬적 요가’에 대한 비판일 뿐 ‘요가 그 자체’나 ‘요가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빠딴잘리 요가가 전대의 요가를 통합했던 유일무이한 요가는 결코 아니었고 따라서 샹까라가 상캬적 요가를 비판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요가가 비판되었던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빠딴잘리 요가가 요가의 전부라는 견해’에 근거한 지극히 단순한 생각일 것이다. 이 점은, 샹까라 시대에 이미 빠딴잘리의 요가와 구별되는 요가 전통이 있었고 샹까라도 ‘바로 그 비-상캬적인 요가’의 주요 개념을 충분히 활용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빠딴잘리 요가에서 발견되지 않는 개념, 즉 수슘나(suṣumnā, TUbh.1.62, PrUbh.3.7), 72,000나디(nādyaḥ .... dvāsapatatiḥ sahasrā. BUbh.2.1.9)와 같은 개념이 샹까라의 작품에서 발견되고 더 충격적인 것은 꿈브하까(kumbhaka, BGbh.4.29와 꿈브하까-쁘라나야마(kumbhakaprāṇāyāma, BGbh.4.29) 등 후대 하타요가의 핵심 용어들이 고락샤보다 몇 백 년전 인물인 샹까라에 의해 최초로 정의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빠딴잘리 요가와 전혀 무관한 별도의 요가 전통들(또는 가르침)이 상까라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요가들, 즉 말하자면 ‘훗날 하타요가로 체계화되기 이전의 비-상캬적 요가 전통’에 대해 샹까라가 우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요가를 잘 알고 충분히 활용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이후의 불이론이 하타요가를 수용했던 것은 결코 반역 행위가 아닐 것이다. 요가에 대한 샹까라의 이중적 태도, 다시 말해서 ‘상캬적 요가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와 동시에 ‘그 외의 요가 가르침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이중적 태도 중에서 후대의 불이론이 수용했던 요가는 의심할 바 없이 후자로서의 요가(비-상캬적 요가), 즉 하타요가이다.
이 점에서 후대 불이론자들의 친요가적 성향을 빠딴잘라요가샤스뜨라비바라나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무모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후대의 불이론이 수용하고 권위를 부여했던 것은, 말하자면 ‘상캬적 요가라 할 수 있는 빠딴잘리요가샤스뜨라비바라나’가 아니라 상캬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고 다분히 불이론 지향적이었던 하타요가 문헌이었기 때문이다.
요가-우빠니샤드와 하타요가 문헌을 연구했던 부이의 주장, 즉 ‘15세기 이후의 불이론이 하타요가를 수용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또 고락샤샤따까나 하타의 등불에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은 파격적으로 들리지만 그의 연구를 살펴보면 불이론의 하타요가 수용은 자연스럽고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샹까라를 추종한다는 현대 불이론자(또는 빤디뜨)들의 친-요가적 성향에 더 이상 당황할 이유도 없고 또 그들의 요가 친향적 DNA가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되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요가를 상캬적 요가, 즉 ‘상까라가 비판했던 빠딴잘리 요가’로 오해하는 우를 재차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부이의 논의대로 ‘불이론에 수용된 요가’란 고락샤에서 스바뜨마라마로 이어지는 중세기의 나타파 요가, 즉 ‘본서 이후부터 비로소 학계에서 조명되기 시작한’ 하타요가에 한정될 뿐이기 때문이다.
불교학리뷰 제18호 (20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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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는 다시 하타 요가의 재정립과 수련을 통하여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