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진 광주이씨효열문(廣州李氏孝烈門)정양진의 취재일기
2015. 9. 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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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이회(而晦), 호는 반곡(盤谷). 아버지는 정몽응(丁夢鷹)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군수로서 의병을 모으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 병마절도사 조대곤(曺大坤)과 함께 기략(奇略)을 써서 적을 금오산(金烏山) 아래에서 대파하였다.
1594년에는 당시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계청(啓請)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때 세운 전공이 책록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였다.
한때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투옥되었을 때 조정에 나아가 왕에게 “이순신의 애국심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전쟁에 나가 싸움을 미루는 것은 병가의 승책(勝策)인데 어찌 적세를 살피고 싸움을 주저한다 하여 죄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왕께서 이 사람을 죽이면 나라가 망하겠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이순신의 석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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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지기 전의 광주이씨 효열 문 - 보성문화유산총람
광주이씨효열문(廣州李氏孝烈門)은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봉서동 마을에 세워져 있었으나 60여 년 전 태풍으로 허물어지고 담장만 남아 있을 뿐이다.
효열문 안에는 ‘효열부고학생정혁처광주이씨지여상지17년경진명정(孝烈婦故學生丁爀妻廣州李氏之閭上之十七年 庚辰命旌)’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1883년(고종 20년) 김평묵이 쓴 열부이씨정려기(烈婦李氏旌閭記), 장흥부사 이학래가 쓴 정려기(旌閭記)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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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효열 문 터
이 씨는 둔촌(遁村)의 후손으로 19세에 증 예조참판 정경달(丁景達)의 10세손 정혁(丁爀)에게 출가하게 되었다.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남편이 병을 앓자 3년을 정성껏 치병, 간호하였으나 남편이 죽자 살려내지 못한 책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목을 매어 26세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남편 곁으로 가게 된다.
열부이씨 장록 – 후손 정길상 제공
이에 1852년(철종 3년) 전라도 유림들이 이 씨를 가상(嘉尙)이 여겨 포상해주도록 조정에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80년(고종 17년) 기재호 등 호남유림들이 다시 조정에 상언(上言)하니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명령받아 열녀문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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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암 김평묵의 이씨 정려기 - 후손 정길상 제공
70여 년 동안 이 씨의 얼을 살리고 가상한 뜻을 기리기 위한 정려문은 빗물이 새고 기둥이 썩어 강한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1959년 태풍으로 허물어졌다. 후손들은 복원계획을 세웠으나 종손 봉강 정해룡(鳳崗 丁海龍)의 두 번에 걸친 정계진출 실패로 인하여 집안이 몰락하게 되고 정려문 복원계획은 무산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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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가 살았던 집은 전남문화재자료 제261호로 지정되었으며 정혁의 고손 정길상이 관리하고 있다.
지방의 유지들과 영광정씨 후손들은 광주이씨효열문(廣州李氏孝烈門)이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반드시 지정, 복원되어 후손에게 물려주길 바라고 있었다. 정혁(丁爀)의 고손(高孫) 정길상(69세)은 “조선시대 나라에서 정려를 명하였으니 국가에서 관리해야 마땅하지만 후손들이 복원을 못해 죄스러울 뿐입니다.”라며 보성군의 복원을 바라고 있었다.
- 자 료 : 1. 보성문화유산총람 – 보성문화원
2. 정양진의 역사 르포 – 봉강 정해룡
- 참 고 -
1. 정경달(丁景達) : 호는 반곡(盤谷)으로 본관이 영광(靈光)이다. 1542년 전남 장흥 반산리에서 태어나 식년문과(병과)에 합격하고 선산부사로 취임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여 지대한 공을 세우고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게 되었다.
2. 둔촌(遁村) : 이름이 이집(李集)으로 호가 둔촌(遁村)으로 본관이 광주(廣州)다. 고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등과 교류하였던 학자이다.
3. 김평묵(金平黙) : 호가 중암(重庵)으로 본관이 청풍(淸風)이다. 1880년(고종17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던 학자. 척양(斥洋), 척왜(斥倭)의 소를 초안하여 유배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풀려나게 된다. 70세로 죽자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반곡 정경달 장군장흥 관련 내용
【육전의 난중일기 남긴 반곡 정경달 장군 】
임진왜란 420주년을 맞아 전남 장흥 출신의 명장이자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으로 종횡무진한 정경달(盤谷, 丁景達)(1542~1602)의 ‘육전의 난중일기’가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85년에 새로 발견된 제2의 난중일기을 기록한 조선 중기의 문신 정경달은 자는 이회(而晦)이고 호는 반곡(盤谷)으로 1542년 전남 장흥 반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0년(선조 3년)에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병조정랑, 가평현감, 남원부사, 청주목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부사로서 의병을 모으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병마사 조대곤(曺大坤)·정기룡(鄭起龍)·이해(李垓) 등과 함께 금오산과 죽령 등지에서 왜적들을 격파했다.
임진왜란으로 선산이 왜군에 함락되자 인근 금오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펴 일본군 415명을 참수했다는 승전보 소식이 인근 고을에 알려지면서 수많은 의병장들이 합세했다는 기록도 있다.
1594년(선조 27년)에는 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이 되어 행정, 징모업무, 군수조달, 시찰, 전령, 명 장수들과의 외교 등을 담당했다.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으로 근무하며 활약한 공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9세기 다산 정약용이 적을 방어한 수령의 모범 사례로 정경달을 높이 평가해 <목민심서> ‘어구(禦寇)’ 항목에 수록할 정도이다.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으로 투옥되자 조정에 나아가 탄원서를 보내고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정경달은 왕에게 이순신을 죄주는 것을 적극 만류하기도 했다.
탄원서에는 “이순신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장수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정세를 살피는 것을 가지고 싸움을 주저한다고 몰아 죄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왕께서 통제사를 죽이시게 되면 사직을 잃게 되옵니다”라며 이순신의 석방을 강력히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저서로는《반곡집(盤谷集)》《반곡난중일기》《반곡시집》과 《광국공신계회도(光國功臣契會圖)》《흉배(胸背)》 《공신록권(功臣錄券)》등이 지방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의 《난중일기》는 바다에서의 전투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었다면 《반곡집(盤谷集)》은 내륙전투에서의 전략과 전과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반곡난중일기》에는 임진년(1592) 4월 13일부터 무술년(1598) 2월 17일까지 약 7년여 동안의 전쟁 기록, 평안도 용천·청주·곽산의 난에 대한 기록하고 있어 왜란 당시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학계의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의 아들인 정명열(丁鳴說)도 정유재란 때 이순신에게 쌀과 배를 보태고 명량해전에 함께 참전하기도 했다. <출처 : 일등방송>▲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원촌마을의 영광정씨 4인을 비롯하여 이순신, 임영립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반계사
<반계사 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