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0551 김소형 미네르바 중간고사 리포트.hwp
원시를 꿈꾸었던 화가, 고갱
― 고갱의 주요 작품들과 그가 끼친 영향력에 대한 고찰
월요일 1교시, 환경학과, 김소형
<목 차>
1. 들어가며 : 고갱의 생애에 관하여
2. 고갱의 주요 작품에 대한 고찰
2.1 ‘퐁 타방’ 에서의 작품
2.2 ‘퐁 타방’ 을 떠난 후 타히티 섬에서의 작품
3. 고갱이 20세기 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
4. 나오며 : 마무리
<보고서 제요>
본 보고서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혹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예술가/예술작품을 비평하는 미네르바 글쓰기 리포트 과제로, 예전에 고갱의 3대 걸작 중 하나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보고 감명을 받아 흥미를 갖게 된 ‘고갱’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해 고찰한 내용을 서술한 것이다. 그의 작품을 ‘퐁 타방’에서 그린 것과 ‘퐁 타방’을 떠나 타히티 섬에서 그린 것으로 구분하여 비평하고 고갱의 작품이 후기 화가들과 20세기 현대 미술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정리하였다. 또한 그의 삶을 통해서 좀 더 깊이 알 수 있는 그의 작품세계와 그가 추구했던 것에 대해 서술하였다.
Key words: 고갱, 퐁 타방, 종합주의, 타히티 섬, 원시주의
1. 들어가며 : 고갱의 생애에 관하여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저널리스트였던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과 프로토 사회주의자 리더인 플로라 트리스탄이 아버지였던 알리나 마리아 차젤이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갱은 바다를 동경하여 선원이 되어 남미도 항해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그만두고 화가로서 새 출발을 한다. 그러나 회화는 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돈은 다 떨어져서 고갱은 아내를 남겨두고 단 하나의 어린자식을 데리고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1886년부터 브르타뉴의 퐁 타방으로 가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인상파의 그림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창시, 평면적인 채색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화풍을 따르는 젊은 화가들과 ‘퐁 타방(Pont-Aven)파’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가서는 ‘고흐’를 만났다. 그러나 고갱에게는 문명의 거짓을 좋아하지 않았고 순수함에 대한 정열이 있었다. 퐁 타방으로 다시 가 새로운 회화의 이론을 주장하고 고흐의 초대로 아를르에도 가지만 그 우정은 깨져버리고 1891년, 태평양의 타히티 섬 민중들의 순수한 삶과 개성에 감동하여 수많은 걸작들을 그려 냈다. 그러나 궁핍과 병과 싸우다가 1903년에 고독한 생애를 마쳤다.
2. 고갱의 주요 작품들에 대한 고찰
2.1 퐁 타방 시절의 작품
춤추는 네 명의 브르타뉴 여인들 (1886) / 황색 그리스도 (1889)
<춤추는 네 명의 브르타뉴 여인들>이란 작품은 1820년대에서 1840년대 퐁 타방에서 고갱이 함께 지냈었던 사람들과 그 때 입었던 의상들을 그린 그림으로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치는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을 통해서 고갱은 대상의 모습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방식을 추구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고갱이 브르타뉴에 갔을 때에는 산업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과 그 아름다운 풍경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고갱은 자세를 인위적으로 취하는 것을 원치 않아, 여성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기 때문에 그림 속의 여성들을 자세히 살피면 춤을 추는 동작을 취하고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황색 그리스도>는 고갱의 퐁 타방 시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으로, 고갱이 한 성당에서 본 나무 십자가의 예수를 스케치하여 그린 것으로 노란색의 예수의 모습과 배경, 단풍이 든 것처럼 붉게 채색된 나무 등 전체적으로 매우 단순화된 작품이다. 십자가 주변에는 묵상하는 세 여인이 그려져 있으며, 이들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이다.
고갱은 불혹의 나이에 그림에 입문했지만 동료들과의 마찰도 많았는데, 고갱은 본인의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는 다른 예술가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함께 했던 퐁 타방 집단에서 떠나게 되었다. 위 작품을 보면, 그는 남들보다 더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갖길 원했고, 사람들에 비난받고 외면 받을수록 점점 강해지고 종교적으로 변해간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고갱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렸던 것일까? 고갱은 자신이 가는 예술가의 길을 그리스도가 가는 고행의 길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의 고통에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2.2 ‘퐁 타방’을 떠난 후 타히티 섬에서의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위 작품은 고갱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고갱은 사람들과의 마찰과 고립, 외로움 속에서 문명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그가 간 곳은 타히티 섬이었다. 그는 발길이 닿는, 눈에 보이는 곳곳마다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고 바로 그 곳에서 세기의 걸작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 탄생한 것이다. 그림을 보면, 그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우리 인간의 본능적인 삶을 그림에 담으려 했던 것 같다고 생각된다. 이 그림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생이 갖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고 무엇을 하며 무엇을 남기는지에 대한 질문을. 작품의 가장 왼쪽의 노인의 모습을 보면 체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나중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가운데 한 남자가 서서 열매를 따는 모습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식량을 구하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3. 고갱이 20세기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
타히티 섬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들은 다분히 종교적인 상징주의와 폴리네시아의 이국적인 시각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감각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사물을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단순한 윤곽선과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였는데, 감정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점은 이후 20세기 미술의 수많은 화가들-앙리 마티스, 피카소, 뭉크, 블라맹크, 라울 뒤피 등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화려한 색채를 중시한 고갱의 작품세계는 ‘야수주의(야수파)’에 영향을 미쳤다. 야수주의는 강렬한 터치와 화려한 색감을 더욱 강조해 대상의 형체가 점점 일그러지게 되고 형태가 왜곡되다 못해 상실에 이르는 ‘추상주의’(대표작가 – 몬드리안, 잭슨폴록)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술의 종말을 불러온 ‘미니멀아트’(화면상의 형상자체를 제거)가 등장했다. 이 미니멀아트를 모더니즘의 종말로 보고, 이후 모더니즘에 반발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생기게 되고 형식주의(붓터치, 색, 선 등을 중시) 사상이 이후 이어지는 모든 현대 미술의 근본이 된 것이다.
4. 나오며 : 마무리
고갱은 불혹의 나이에 독학으로 그림에 입문했지만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고 동료들과의 마찰이 잦아 다른 예술가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외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건강 악화와 빈곤, 딸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열정을 가진 화가였다. 평생 동안 문명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을 그리고 싶어 했고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기를 기대하면서 그림을 그렸던 그의 작품은 그가 죽고 난 후 반인상주의화파인 나비파를 비롯하여 20세기 현대미술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위키피디아 : https://ko.wikipedia.org/wiki/%ED%8F%B4_%EA%B3%A0%EA%B0%B1
블로그 참조 : http://blog.naver.com/aoowowooa/220683971849
http://blog.naver.com/aoowowooa/220685010149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rcadium&logNo=80124891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