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독립운동기지로 착수된 지역 가운데 중요한 한 곳이 멀리 북만주의 봉밀산蜂密山일대였다. 헤이그 사행 이후 1909년 여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간 이상설과 그곳 한민회장 김학만金學萬, 그리고 『해조신문』의 주간 정순만鄭淳萬, 유학자 이승희李承熙등을 중심으로 하여 연해주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한 민족운동자들에 의하여 봉밀산지역의 기지화가 추진되었다. 그들이 사방에 물색한 결과 후보지로 잡은 밀산부 관내 봉밀산 일대는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에 자리잡은 흥개호興凱湖부근에 위치해 있다. 그곳은 수천리의 넓은 황무지가 펼쳐져 있던 곳으로 한인이 여기저기 몇 가구씩 들어가 개간사업을 벌이며 정착을 꾀하고 있었지만, 자금과 인력 부족 때문에 유목생활을 넘지 못하는 그런 지역이었다. 이상설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현지의 토지를 사들이고 개척을 시 작하는 일을 이승희에게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승희는 이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700리가 넘는 곳을 그 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면밀히 답사하였다. 이승희는 영남출신의 유학자로 을미사변 이래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상소 등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1908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그곳에 망명한 사람이다. 그는 조선 말기에 영남지방에서 유학자로 이름 있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아들로, 면우 곽종석과 더불어 그 학문적 도통을 이은 학자였다. 그가 남긴 70권에 달하는 문집인 『한계유고韓溪遺稿』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승희는 그 해 가을 이민단과 함께 봉밀산 밑에 기름진 터전을 잡아 우선 45방方의 토지를 사들이고, 북만주의 독립운동기지가 되는 한흥동을 건설하는데 힘썼다. 100여 호를 이주시키면서 이승희는 그곳의 이름을 ‘한흥동韓興洞’으로 명명하였다. 한흥동은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이란 뜻이다. 또한 학교를 세워 한민학교韓民學校라고 하였다. 그후 이승희는 이 한흥동에 전후 4년 동안 머물면서 그곳을 민족 부흥의 터전으로 건설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여기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쳤고,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한인의 단결을 꾀하였다.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으면서 그곳 민족운동자와 한인의 힘을 모아 자금을 조달하였고, 수시로 그곳을 왕래하면서 한흥동의 경영사업을 추진하였다. 밀산부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곧 미국의 국민회에서는 1910년 3월 태동실업주식회사泰東實業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자본금 5만 달러에 1주당 50달러의 1천 주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밀산부 한흥동 부근의 미개간지 2,400에이커를 사들여 개간하고, 그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그 일을 위하여 국민회 북미지방회 총회장인 정재관鄭在寬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3,000달러의 경비를 썼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태동실업주식회사. 1910년 3월 1일 북미대한인국민회가 군사운동독립군양성의 부업으로 조직한 것이며, 그 목적이 원동遠東만주와 시베리아를 지칭-필자주에 독립군 근거지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자본금 총액을 5만 달러로 정하고, 매주 50달러씩 1천 주 모집을 시작한 후에 만주에 있던 정재관국민회 총회장으로 하여금 봉밀산현에 미간지 2,430에이커를 매득하고 개간하게 하였다. 원래 만주와 아령俄領에 있던 가정 2백 호를 이민하려던 계획이 있었으나 그곳에 마적의 행패가 심하여 안정성이 없던 까닭에 사업이 실패하고 경비만 3천 달러를 소모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원동임야주식회사遠東林野株式會社란 공동출자 회사를 러시아 관헌의 허가를 얻어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중국과 러시아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유지를 규합하여 밀산부의 한흥동 경영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한편 한흥동 경영에 호응하여 국내의 신민회는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이 곧 독립운동의 당면과업이라는 것을 내세우게 되었다. 우선 신민회의 중요 간부이던 안창호·신채호·조성환曺成煥·이종호李種浩·김희선金羲善·이강李剛·김지간金志侃등이 각기 한국을 비밀리에 떠나 중국 청도靑島에 모여 1910년 4월 청도회의를 개최하였다. 註114) 독립운동의 큰 방략을 논의하던 이 회의에서 토의되고 결의된 중요 내용이 곧 자금을 모아 한흥동을 경영하고 있던 봉밀산 부근의 미개간지 10만 평을 사들여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는 것이었다. 주요한의 『추정秋汀 이갑李甲』에 이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된 사항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① 이종호의 출자금과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에 요청할 수 있을 자금 등을 합하여 만주의 길림성 밀산현에 농토를 매수하여 토지 개간사업을 행하고
② 동시에 그곳에다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운동의 중심지를 만들 것
③ 이러한 계획의 추진을 위하여 군사교육, 일반 과학교수 및 농업 전문가를 초빙할 것
청도회의에 참가하였던 신민회의 망명 간부들은 이 결정에 따라 여러 길로 갈리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안창호는 자금의 염출이 여의치 않다고 하여 미국으로 갔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와 같은 노선의 독립운동기지 경영을 밀산부를 중심으로 추진하였다. 밀산부 관내의 한흥동이나 그밖에 각지에서의 이와 같은 독립운동기지 경영의 목적은 그곳에서 한인, 특히 청소년을 모아 근대적 문무쌍전의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여 민족의 군대인 광복군혹은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만주 봉밀산지역은 1920년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 독립군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등을 거쳐 피어린 항일투쟁을 전개한 뒤 재기를 다짐하고 북상할 때 단일독립군단인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편성하는 총집결지가 되었다. 독립운동의 유서 깊은 곳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