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묵은 메추리알, 죽, 생강(Thousand-year-old quail egg, potage, ginger)'의 식재료와 완성 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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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 최고의 요리사 중 하나로 꼽히는 토머스 켈러가 운영하는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프렌치 론드리(The French Laundry)’와 뉴욕 맨해튼의 ‘퍼 세(Per Se)’에서 수석 셰프로 일하면서 두 식당이 미슐랭 3스타를 획득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새로운 스타 탄생에 반응한 것은 요식업계만이 아니다. 영국의 예술전문 출판사 파이돈(Phaidon)은 모던 아시안 요리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코리 리와 베누에 주목, 그의 요리와 음식 철학을 소개한 쿡 북을 최근 펴냈다. 파이돈이 한국 셰프에 관한 책을 낸 것도 처음이다. 출간을 계기로 내한한 그를 만났다.
'봄날의 성게죽(Spring porridge with sea urchin)'의 식재료와 완성 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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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근무지가 바뀐 아버지를 따라 다섯 살 때 뉴욕으로 건너온 꼬마는 가족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도 청운의 뜻을 품고 홀로 남았다. 소호의 한 일식당에서 새벽 2시까지 일하던 열 여덟 고등학생은 요리가 자신의 천직임을 깨닫는다. 과감하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뉴욕과 런던과 파리에서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 6개월이고 1년이고 머물며 내공을 쌓았다. 강호의 고수들과 일합을 겨루며 일취월장해 가는 외톨이 검객처럼.
2001년부터 프렌치 론드리에서 요리사로 일을 시작했고 2009년 수석 셰프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1년 여의 준비 끝에 ‘베누’를 오픈했다. 베누는 고대 이집트어로 불사조라는 뜻. 주 특기인 프렌치 스타일에 아시아 이민자들이 특히 많은 샌프란시스코의 독특한 문화까지 녹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베누의 경우 한국계 미국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사실 어떤 요리를 할 것인가 같은 큰 그림은 없었어요. 다만 다채로운 요리 테크닉을 통해 제가 얻어낸 경험을 전달하고 싶었죠. 한국과 미국의 문화, 또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 그리고 이민자로서의 체험 같은 것들입니다.”
그는 베누의 철학을 “맛있고 흥미롭고 신나는 요리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식당을 찾는 사람들이 ‘음식 모험(food adventures)’에 나섰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가 말하는 모험이란 새로운 식재료에 대한 열린 마음이다.
“동남아의 두리안이나 일본의 낫토, 대만의 냄새나는 두부 처우더우푸(臭豆腐·Stinky tofu)같은 것은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입에 대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죠. 저는 요리사로서 이 모든 재료가 존재한다는 자체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손님에 대한 테스트는 아닙니다. 저도 열린 마음으로 재료를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눈감고 먹으면 익숙해질 수 있는 맛을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죠. 드시는 분들은 이같은 복합적 경험을 즐겨주셨으면 하는 거구요.”
'참나무로부터 온 거지의 보석 지갑(Beggar’s purse of treasures from the oak)'의 식재료와 완성 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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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해준 도토리 묵에서도 요리 힌트
베누를 찾은 손님이 맞닥뜨리게 되는 첫 번째 코스로 ‘천년 묵은 메추리알, 포타지(죽처럼 걸죽한 수프), 생강’이 있다. ‘천년 묵은 메추리알’은 중국의 삭힌 알 요리인 피단(皮蛋) 요리. 흰자는 탱글탱글한 갈색 푸딩처럼, 노른자는 검정색으로 각각 변해 암모니아 냄새마저 풍기는 색다른 음식이다. 그는 오리알 대신 작은 메추리알을 이용해 부담감을 줄였다. 마리네이드(양념장)의 PH 레벨을 낮추는 방식으로 암모니아 냄새도 확 줄였다.
그의 대표작은 ‘굴, 삼겹살, 김치(작은사진)’다. 보쌈을 새롭게 해석했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이 아담한 요리는 그러나 7개의 레시피가 필요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간다. 특히 김치 국물을 투명 유리처럼 처리한 ‘김치 유리(kimchi glass)’라는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만들기 위해 그는 ‘퓨어 코트(Pure-Cote) B790’라는 첨단 요리 재료까지 사용했다. “싱싱한 굴과 고소한 삼겹살과 매콤한 김치의 절묘한 조화는 섬세한 형태 속 예상치못한 식감이 주는 강렬한 풍미를 기분좋게 지속시킨다”는 설명이다.
그런가하면 ‘참나무로부터 온 거지의 보석 지갑’은 도토리를 이용한 요리다. 그에게 도토리는 한국과 미국과 유럽을 이어주는 중요한 아이콘이다. “여덟 살 때인가, 할머니가 집 근처 숲에서 주워오신 도토리로 묵을 만들어 주신 적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흔한 것이었지만 저는 처음 먹어보았는데, 정말 할머니가 마법사같아 보였죠.”
2007년 스페인 엘불리 레스토랑 수석 셰프의 초대로 바르셀로나 요리 대회에 갔을 때 어떤 창조적인 요리를 보여줄까 고민하던 그는 숙소 옆 참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에서 추억을 떠올렸고 섬광처럼 힌트를 얻었다.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 참나무 뿌리에서 자라는 송로버섯(Truffle), 그리고 그 도토리를 먹고 자란 돼지의 고기로 만든 이베리코 하몽의 절묘한 결합이었다. “이들은 모두 참나무와 연결된다는 공통점이 있었죠. 참나무는 사람에게 먹을 것도 주고, (그늘과 목재로) 쉴 곳도 준다는 컨셉트를 담았어요. 사실 샌프란시스코가 있는 북부 캘리포니아에서는 옛날부터 도토리가 주식이었대요. 도토리는 칼로리가 매우 높은데, 밀의 4배라고 합니다. 물론 도토리가 가장 맛있는 음식 재료는 아니지만, 이 요리의 경우 옛 사람의 주식을 현대인이 먹는다, 한국인이 먹는 묵을 미국인도 먹는다는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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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기는 직접 스케치해 광주요에서 제작
고급스런 아이보리색 하드커버 겉장에 상하이 만두 샤오룽바오(小龍包)를 형상화해낸 책은 거의 아트북 수준이다. 금문교가 보이는 샌프란시스코 앞바다로 시작해 32가지 코스의 재료&요리 사진은 물론 장독대, 천일염 제작현장, 도자기 만드는 가마, 홍콩의 건어물상, 그리고 제주 해녀들의 물질하는 모습까지 울림있는 사진으로 가득하다.
“고교 시절 대학생 누나와 한국에 잠시 들렀다가 제주에서 해녀를 처음 봤어요. 놀라운 경험이었죠. 살아가는 방식도 그렇고 노동의 방식도 그렇고. 아름다운 멜랑콜리랄까. ‘엄마’를 느꼈어요. 한국 여성의 희생정신요. 책 출간을 위해 해녀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는 사진작가 준 초이 선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침 사진 작가 에릭 울핑거가 서핑을 즐기는 사람이라 바닷가에서 몇 시간 놀면서 여러 모습을 담아낼 수 있었죠.”
사진속 요리들은 모두 정갈한 도자기 위에 올려져 있다. 광주요다. 베누 개관을 앞두고 조태권 광주요 회장과 만난 코리는 자신의 요리에 어울릴만한 도자기를 직접 스케치했고, 조 회장은 그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광주요 그릇을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광주요 코리 리 라인’이 탄생한 순간이다. 리 셰프는 “한국의 전통적 색감과 모양에 서양인들이 매우 흥미로워한다”며 “매번 새롭게 제작되어 온 그릇을 볼 때마다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조희경 광주요 이사는 “스타 셰프가 자신의 세계적인 레스토랑에서 한국의 도자기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한식 세계화의 시작”이라며 “지금까지 만든 코리 리 라인이 40종이 넘었다. 최근에는 샥스핀용 볼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함께 상의중”이라고 밝혔다.
베누가 미슐랭 3스타를 짧은 기간 내에 얻어낼 수 있었던 데엔 리 셰프의 식당 운영 및 고객 관리 스타일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듯하다. 베누에서는 점심 식사가 없고 저녁 식사만 가능하다. 게다가 일요일과 월요일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 대신 저녁 코스에는 13~17가지의 ‘작품’이 나온다. 40여 명의 스태프가 오로지 여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소믈리에로 일하는 윤하의 경우 각 메뉴와 와인 등 음료간의 궁합을 연구해 어울리는 짝을 만들어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떤 손님이 어떤 코스를 먹었는지 모두 기록해 놓는다는 것이다. 다음에 왔을 때 같은 것을 먹지 않게 하려는 꼼꼼한 배려라고했다. 지난 2월 한식 파인 다이닝 가온을 오픈한 조 이사는 “그의 세심함에 레스토랑 경영자로서 충격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코리 리가 말했다.
“파인 다이닝은 집에서는 하기 힘든, 할 수 없는 요리입니다. 사람들은 셰프의 재주를 즐기기 위해 레스토랑에 가지요. 집에서도 해 먹을 수 있는 것을 먹기 위해 굳이 레스토랑에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셰프들이 매일 연구하고 창조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