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한옥이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중농주의 실학자인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이 살았던 고택이다.
이 한옥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수락산을 등지고 도봉산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주변 경치가 상당히 수려하고, 수락산 계곡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곳이다.
이 한옥은 박세당 고택의 사랑채다.
사랑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비교적 큰 규모의 건물이며 乙자 모양을 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누마루가 사랑채 끝에 붙어 있다.
원래는 안채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를 갖춘 양반가의 대 저택이었으나
한국전쟁때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사랑채만이 남아 있다.
누마루 창을 통해 끌어다 본 이 집 사랑채 앞 안산(案山) 도봉산이다.
이 집 사랑채는 수락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도봉산을 안산(案山)으로 하고 있다.
안산 도봉산 만장봉에서 내려오는 기세(氣勢)가 만만치 않게 느껴지는 게 명당 길지임을 실감케 한다.
사랑채와 안산 사이에 보호수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420년 된 노거수(老巨樹) 은행나무이다.
은행나무를 심은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공자가 은행나무아래 마루를 놓고 학문을 가르친데서 유래한다.
서계 박세당이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 연마에 매진하던 사랑채 그 앞 마당에 있는 노거수 은행나무이다.
남동쪽 영진각 근처에서 바라 본 사랑채다. 누마루 관어정(觀魚亭)이 돋보인다.
관어정 누마루 남쪽에 걸린 주련이 그 폭의 의미가 주인을 찾은 객을 반긴다.
왼쪽부터 주련을 옮기고 그 뜻을 함께 의미하려 한다.
意中有會花同笑
(뜻에 맞으니 꽃도 따라 활짝 웃고)
心裏無機鳥自親
(기심이 없으니 새가 절로 찾아오네)
누마루 남쪽에서 보면 편액은 관어정에서 누산(樓山)으로 바뀐다.
한양 도성 북서쪽 도성 밖 장시(場市) 다락원 누원(樓院)이 있었다.
도봉산 자락 오늘날 회룡역 근처에 있던 다락원은 송파장과 함께 도성 밖 양대시장이었다.
누산(樓山)은 다락원 일대에 있는 큰 인물임을 격찬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전한다.
청나라 금석학자 엽지선(葉志銑)의 글씨이다. 그는 추사 김정희를 몹시 아꼈던 옹방강의 친구다.
예서체로 쓴 글씨는 기풍이 돋보이는 명품으로 엽지선인(葉至善印), 중인씨(仲寅氏)라 새겼다.
순조 때 강원도 관찰사하던 후손이 금강송을 뗏목으로 실어다 지은 한옥이다.
그 관찰사를 하던 이의 형은 좌의정을 지낸다. 서계 박세당의 가풍과 전통을 이어간 형제이다.
누각에 앉아 서쪽을 향해 있는 문을 열어도 시원하게 도봉산이 조망되고 남쪽 문을 열면
시원한 계곡의 물 흐름과 물소리, 물고기의 유정까지 시야에 가득 차고도 남을 정도의 풍경이다.
하석 박정과 서계 박세당의 영정을 모신 영진각(影眞閣)이다.
영진각은 다른 문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부자의 초상화를 나란히 모셨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윈 서계 박세당의 효심을 실감할 수 있는 영진각이다.
왼쪽으로부터 하석 박정의 영정과 서계 박세당의 초상화를 나란히 모셨다.
서계 박세당은 조선후기 현종대 활동했던 대표적인 중농주의 실학자이다.
그는 40세에 관직을 그만둔 뒤 이 곳에서 말년에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농사에 관련된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그는 조선 현종 1년(1660)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4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또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토대로 그의 대표적인 농학서 『색경』을 저술했다.
처음에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를 갖춘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규모였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바깥 사랑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동쪽의 수락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향집에서 왼쪽을 향하고 있다.
보통 좌향의 배치에서는 남향이나 남서향 남동향을 따르는 것에 비해 이 가옥은 방향보다 배산임수의 자연지세에 따라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종부 김인순여사는 찾은 객을 누마루로 안내하였다.
그는 누마루에서 차를 준비하면서 시댁 서계 박세당 명문가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냈다.
"서계 할아버지 세짜 당짜..." "정재 할아버지 태짜 보짜...
집안의 내력에서부터 소소한 가족사까지 맛갈나게 전한다. 타고 난 입담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명문가 서계 박세당 고택은 200년 이상된 한옥이다.
그 명문가의 가풍과 문화 전통을 잘 지키려고 애 쓰는 종부 김인순여사다.
그는 어느 명문가를 아들과 함께 찾았을 때 아들에게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양반이 몰락하면 어디까지 가는 지를 보여주는 이 순간 이 장면을 결코 잊지 말라! "
전통과 고유문화를 지키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세월이 흘러오면서 전국의 많은 명문가 고택에서 겪고 있는 갖가지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