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濁南 집권과 老峯의 유배
예송논쟁의 와중에서 숙종(肅宗)이 즉위했다. 숙종은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의 손을 들어준 선왕 현종의 뜻에 따라 탁남(濁南)에 맡겼다. 즉 영의정에 허적(許積)을 제수하는 한편 민희(閔熙)․목래선(睦來善)․유명천(柳命天) 등을 요직에 앉혔다. 청남(淸南)을 주도하는 윤휴(尹鑴)․허목(許穆)․오정창(吳挺昌)․조사기(趙嗣基)․권대재(權大載)를 배제한 것은 서인들을 포용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탁남은 온건파이기 때문이다.
노봉은 1675년(乙卯) 남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서 쫓겨났다. 그러다 4년 후인 1679년(乙未) 장흥으로 유배됐다. 처음에는 장흥관아근처에 살다가 원도리(元道里)로 옮겼다. 관아근처면 장원봉 아래 어느 곳이다. 그가 귀양오자 건산의 만수재(晩守齋) 이민기(李敏琦․1646~1704), 관산의 수우옹(守愚翁) 위세직(魏世稷․1655~17)과 운곡(雲谷) 세설(世卨․1657~1687) 형제 등 인근의 제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숙종은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단행되면서 노봉도 해배됐다. 1년 남짓 적거한 것이다. 이 기간에 지역인재들이 몇 사람이나 그에게 학문을 배웠는지 알 수 없다. 제자 가운데 만수재는 진사시험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당파싸움을 보고 귀향해 장동면 용계방 만수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또 수우옹은 기봉(岐峯)의 관서별곡처럼 남해의 경치를 노래하는 기행가사 금당별곡(金塘別曲)을 남겼다.
노봉은 해배된 이후 복직해서 3판서를 거쳐 참찬의사로 있을 때 또 당파싸움으로 유배의 불운을 맞아야 했다. 이번에는 유배지가 남쪽이 아니고 북쪽 벽동(碧潼)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1692년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노봉의 장흥제자들은 1698년(숙종 24) 원도리 적거지에 스승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지어 매년 3월 향사했다. 그가 민비의 백부이고 서인의 지도자기에 주민들은 죄인이라도 그를 범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 실례를 보자. 다암(茶嵒) 위영복(魏榮馥)이 쓴 천관산 장천재(長川齋) 부계당상량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노봉(老峯)선생 흰말타고 지나간 아름다운 자취 옛 어느 해에 있었던가?라고 했다. 그의 유배생활은 화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서를 지낸 조선 최고의 벼슬아치라서 죄인이지만 흰말을 타고서 경승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평민의 처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부러워한 표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자들은 1698년(숙종 24)에 스승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세워 1726년(영조 2)에는 영조로부터 연곡(淵谷)이란 사액(賜額)를 받았다. 장흥유림들은 36년 후인 1762년(영조 42)에는 노봉의 동생인 민유중(閔維重․1630~1687)을 추향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을 거스르지 못하고 1871년(고종 8) 끝내 훼철됐다. 유림들은 단을 마련, 제사를 드리다 1888년(고종 25) 어필각(御筆閣)을 시작으로 1904년까지 복원공사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