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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일자 : 2017.07.01. 9:00~12:00 -답사구간 : 천도교 중앙 대교당- 태화관- 보성사(현 조계사 경내,수송공원)- 고등재판소(현 제일은행 본점) - 전봉준장군 처형지- 경무청- 해천교- (광화문복합상소) -참가자 : 심용선, 고은채, 고명선, 김경아, 김영아, 박예춘, 이진희 (7 명 ) -자료 및 안내 : 서울 동학 올레 걷기/ 박길수 (동학민족통일회 출판위원장, 개벽신문 주간 ) -보고서 사진 및 작성 : 김진희, 심용선 및 김영아 |
1. 서울 동학 답사의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혁명적 행위였으며, 우리나라 근대를 이끈 역사적 사건이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는 학계의 시선이 통일되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는 학계의 시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있다.
우선, 1984년에 국한해서 보는 입장이다. 1894년에 고부에 사는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먹고 살기 힘든 농민들이 배고파 일어난 ‘농민봉기’ 정도로 이해한다. 전봉준은 동학도였다기보다는 농민군 대장이었고, 당시 농민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했다고 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사 동학이 중심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은 1894년 동학혁명을 갑오농민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경우 전라도가 그 중심무대가 된다.
둘째는, 1860년 수운 최제우가 경주에서 득도를 하고 포덕을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1897년 해월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어 이듬해 순교당한 시점까지를 그 연구 대상으로 삼는 입장이 있다. 이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에 ‘동학’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 근거로, 1)‘농민군을 지휘하던 지도자들은 대부분 동학 접주 출신들이었으며, 2) 농민군 조직은 동학의 접이나 포를 기반으로 삼아 조직되었다는 것. 또한 3) 김구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대다수 민중들이 동학에 뛰어어든 배경에는 동학의 평등사상과 유무상자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동학의 공간적 배경도 전국으로 넓어진다. 특히, 전라도 외에 경상도 충청도 등이 답사지로 주목된다.
셋째는, 두 번째 입장에 동의하면서 그 시간의 범위를 1897년에 국한시키지 않고 1900년대 이후로까지 확장시킬 것을 주장한다. 1894년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남한의 동학인들은 거의 몰살당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후손들에 의해 동학정신이 계승되었고, 일제 강점기 근대 개화기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났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제 3대 교주인 손병희가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1919년 3.1독립운동이 있다. 또 김기전, 방정환, 정순철 등 천도교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문화개혁운동이 있다. 이런 개혁의 운동에는 동학의 개벽정신과 시천주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공간적 배경의 중심이 서울이라 할 수 있다.
비록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꿈꾸었던 개벽의 꿈이 근대식 무기를 갖춘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고, 해방 후에도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이 땅에 왜곡과 억압의 역사가 계속되어 왔지만, 이제 그 깨졌던 개벽의 꿈들을 하나씩 찾아 이 땅에 가장 적합한 근대를 세우고자 하는 데에 동학이 갖는 21세기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동학을 1894년 우금치에서 좌절된 것이 아니며, 1898년 해월의 순도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1900년대 이후로 연장되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점에서, 서울 동학 답사는, 1900년대(해월 순도) 이후 동학이 서울을 중심으로 어떻게 꽃피웠는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천도교 대교당 경내에서 | 안산동학언니들 |
2. 답사 메모 .
1) 천도교 중앙 대교당, 3.1 독립선언서 배포지, 개벽사 터
첫 답사지인 천도교 중앙 대교당은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구 경운동에 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5분 거리다. 이곳에서 박길수 님(동학민족통일회 출판위원장, 개벽신문 주간)의 안내로 함께 서울동학 답사가 시작되었다. 천도교 중앙 대교당은 1918년 12월 1일에 기공식을 하고 1921년 2월에 완공된다.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가 건립을 계획한다. 대교당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묵암 이종일의 집이 있었다. 1920년대에는 대교당 옆에 개벽사 라는 잡지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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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중앙 대교당 의암은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교단을 재정비하고 교당을 짓기 위해 전국의 천교도 교인들로부터 10년 넘도록 성금을 모금한다. 이에 전국의 천도교인 300만이 십 원 이상의 돈을 내었고, 그렇게 모아진 돈 가운데 많은 액수가 독립운동을 하는데 쓰였다. 이 건물을 짓는데 든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22만원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 천도교인들이 모여 시일식을 한다. | ☜ 독립선언서 배부터 이곳은 또한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한 곳으로, 보성사 사장 이종일 선생의 집이 있던 곳이다. 이종일 선생은 민족 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의 한 사람이었다. 독립선언서는 보성사에서가 인쇄되어, 이곳 이종일의 집에 보관되었다가 28일 전국 각지로 배포됨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된다. | ☜ 개벽사 터 천도교 대교당 옆에는 개벽사가 있었다. 개벽사(開闢社)는 1920년에 문을 연 출판사로 <개벽>를 비롯 <어린이>, <신여성> 등의 잡지를 발간했다. 3.1운동으로 지도부가 대거 투옥된 뒤, 천도교는 신교육을 받은 젊은 엘리트 청년들이 주도해간다. 특히, 어린이 운동은 해월의 ‘사인여천’ 사상이 바탕이 되었으며, 김기전, 방정환(의암의 사위) 등 천도교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다. |
2) 태화관, 보성사 터
태화관 앞 | 민족대표 33인의 모습(태화관 내) |
☞태화관
천도교 대교당에서 나와 인사동을 지나 지금의 조계사 본부로 가는 길에 태화관이 있다. 태화관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 인(정확히는 29명, 4명은 지방에 있어 참석을 못했다고 한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경에게 전화를 걸어 스스로 잡혀갔던 곳이다. 태화관은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으로 명월관의 분점이었다.
원래 독립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에 낙원동의 탑골공원에서 하기로 했다. 독립선언문을 민중에게 살포하고 동시에 학생단과 민중으로 하여금 만세시위 행진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이 2월 28일 손병희 집에서 마지막으로 회동하였을 때, 다음날 3월 1일 거사에 대해 독립선언서 낭독을 태화관에서 하기로 변경하였다. 이유는 시위가 거세질 경우, 일본인들에 의한 희생자들이 대거 나올 것을 우려한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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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보성학원 터 | 보성사 터 표지석( 수송공원 내) | 이종일 선생 동상(수송공원 내) |
☞보성사 터 ( 조개사, 수송공원)
보성사는 출판사로,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고, 그후 투쟁속보격인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한 역사적 장소다. 오늘날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가 있는 그 경내에 있던 보성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는 1906년 이용익 선생이 창립하였는데, 1910년 12월 천도교단에서 인수하면서 학교 인쇄실이었던 보성사도 천도교의 주력 인쇄소가 된다. 보성사는 3.1 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일제가 저지른 방화로 소실되었다. 지금 보성학교와 보성사의 흔적은 없지만, 그때 보성학교 운동장에 있던 회화나무는 조계사 본당 앞에 그대로 남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한편,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를 기념하기 위한 표지석과 이종일 선생의 동상 등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원래 자리인 조계사 바로 옆 수송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3) 고등재판소, 전의감, 해정교, 경무청
☜ 고등재판소 현재 제일은행 본점이 있는 곳(종로2가)은 1895년 당시 ‘고등 재판소’가 있던 곳이다. (1894년 갑오개혁의 결과로 서울에는 고등재판소를 지방에는 지방재판소를 설치하였다.) 이곳 고등재판소에서 1895년 5월부터 1989년 6월까지 수많은 동학교도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해월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아곳까지 드나드시며 재판을 받았다.
| ☜ 전의감 터 전의감은 현재 영풍문고가 있는 종로 2가 4거리 자리인데, 전봉준이 처형(근대법에 의해 참형이 아닌 교수형을 당함)된 곳이다, 해월선생이 처형된 곳은 예전에 단성사가 있던 자리(종로 3가)로, 해월 선생 당시 그곳은 육군법원이 있었다. 해월선생은 육군법원 사형장에서 교수형을 당하셨다 |
☜경무청 터
경무청은 해월 최시형이 서울로 압송되어 최초로 수감된 곳이다. 경무청은 1894년(고종 31년) 조선시대 포도청(좌우포도청)을 폐지하고, 일본식 경찰 제도를 본떠서 만들어진 부서다. 경무청은 오늘날의 경찰업무와 감옥 업무 외에 출판물 판매 허가, 호구조사, 시장, 전염병 예방, 종두, 매장(埋葬) 등 오늘날의 보건업무를 겸하여 그 파워가 막강하였다. 1900년에 경부(警部)로 승격되면서 한성부만 담당하던 것에서 전국을 관할하게 되고, 1907년 경시청으로 개칭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 경찰화하였다.
| ☜ 해정교 터 해정교는 종로1가 광화문 우체국 부근에 있던 다리다. 이 다리 옆에 우포도청이 있었기 때문에 포도청 다리라고도 불렀다. 이곳에서 탐관오리에 대한 팽형을 했다고 한다. 팽형(烹刑)은, 끓는 가마솥에 죄인을 담그고 삶는 공개형이지만, 실제로 사람을 삶는 건 아니고, 삶는 흉내만 하여 경각심을 주었다. 이곳은 육조거리와 백성들이 많이 모이는 종로거리가 마주치는 곳인 동시에 죄인을 다스리는 우포도청 앞이므로 공개형 터로는 최상의 장소였다. 한편, 동학과 관련해서는 1871년 8월 이곳에서 이필재가 부대시능지처사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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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학과 천도교, 그리고 3.1운동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 이 글을 쓰는 나는 3.1운동이, 일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으로 갑자기, 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거사가 특정 조직의 도움없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가 한낱 개인이 아니라, 말 그래로 특정 조직을 대표하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3.1운동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중심에 천도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답를 통해 이제라도 그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긴다.
우선, 천도교는 당시 조선 제 1의 종교였다. 3.1운동 당시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천도교 300만, 기독교 27만, 불교 14만으로 집계 되어 있다..1905년 동학에서 이름을 바꾼 천도교는 종교집단으로 공인이 되어 1910년대 급속히 성장하여 당시 교인수가 300만에 달하는 조선 제일의 종단이었다고 한다. 종교계가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된 이유가 있다.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일제는 조선에서의 모든 사상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는데, 다만 예외적으로 종교집단만은 인정을 했다. 이에 당시 조선 제 1의 종교였던 천도교가 3.1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둘째, 선언서 낭독에 서명한 분은 33명으로,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유림은 참여하지 못했다.) 이며, 그 중에 대표는 손병희다. 손병희는 1919년 1월 자택에서 천도교인인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과 여러 차례 모여서 회의한 끝에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다음과 같은 독립운동의 세 가지 원칙을 세운다. 독립운동을 대중화할 것, 일원화할 것, 비폭력적으로 할 것. 이들은 이와 같은 운동을 천도교 단독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기독교, 불교, 유림 등 각 교단을 총망라하기로 하였다. 동시에 대한제국시대의 유지들을 민족대표로 추대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시대 유지들은 참여를 거부하였고, 유림은 별도로 참여한다고 해서, 유림을 제외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그리고 학생층의 개별적인 독립운동이 통합 단일화되어 거족적인 통합된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3.1운동은 천도교가 주축이 되어 구체적인 추진계획을 세운 것이라 하겠다. 아시겟지만, 이 모임을 주도한 손병희는 1897년 해월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동학(천도교) 3대 교조다.
셋째, 3.1운동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모두 천도교에서 충당했다. 의암은 천도교 공인(1905년) 뒤 전체 교인들을 향한 첫 일성으로, ‘천도교 중앙 대교당을 짓고자 하니 교금을 내주시오’라고 말한다. 이에 전국의 천도교인 300만이 십 원 이상의 돈을 내었고, 그렇게 모아진 돈에서 많은 액수가 독립운동을 하는데 쓰였다. 그래서 백범 김구는 광복 후 귀국하였을 때, 맨 처음 들른 곳이 천도교 대강당이었는데, 이곳에서 강연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건물이 아니었다면 3.1 독립운동이 있을 수 없었고, 3.1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을 것이며,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넷째, 독립선언서 인쇄 작업이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출판사인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다. 보성사 사장은 민족 대표 33인중 천도교 대표의 한 사람인 이종일이었다. 당시 보성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는 천도교 학교였으며, 보성학교 재단의 출판사가 보성사였다.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 간부는 손병희에게 보상사의 폐쇄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손병희는 언젠가 한번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랬는데 그 보성사에서 역사적 업적인 3.1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감시 속에 그 많은 것을 인쇄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1919년 2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선언서는 최남선이 작성을 했지만 최남선은 민족 대표 33인의 명단에서는 빠졌다. 자신은 투사로서보다는 문인으로 남겠다면서, 그리고 선언서의 공약삼장은 한용운이 작성을 했다.)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진다. 그달 27일 출판사 사장 이종일은 공장 감독 및 총무와 함께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인쇄를 완료한다. 총 2만 1000매의 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한 뒤 이종일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투쟁속보를 계속 알림으로 3.1운동이 전국화와 장기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했다. 흥미로운 일은, ‘조선독립신문’ 창간호와 2호 3호 발행 뒤 이종린(이종일의 사촌 아우) 체포되면, 또 다른 인물이 나서서 발행하고, 그 인물이 잡히면 또 다른 인물이 나서서 계속 발행하여 6월 중순까지 30여호에 걸쳐 발행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3.1운동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의암 손병희에 의해서 철저하게 기획 추진되었으며, 그 조직적 재정적 지원도 천도교에서 충당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과서에서는 3.1운동과 관련해서 민족 대표 손병희 그리고 천도교의 배후에 대해서 일체의 설명이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잘못된 역사교육을 받은 후손에게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 2년 후면 3.1 운동 100주기를 맞는다. 더 늦기 전에 3.1운동과 천도교의 관계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길 바란다.
4. 나오며.
오늘 답사는 교보문고 앞 혜정교에서 끝났다. 서울 동학 답사지로, 광화문 복합상소가 있던 자리, 손병희의 집터, 상춘원,봉황각, 서대문 형무소 등이 더 남아 있지만, 다음 번을 기대하며 아쉬움을 접는다. 오늘 답사에서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천도교의 민족운동 그 중에서도 1919년 3.1운동의 중심에 천도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로 항목을 마련하여 동학, 천도교와 3.1운동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2년 전 동학을 처음 공부할 때만 하더라도,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부끄러웠다. 동학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을 찌질이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한국인인게 자랑스럽다. 우리민족은 결코 찌질이가 아니다. 자존심 있고, 싸울 줄 알고, 끈기있는 멋있는 민족이라는 걸 느낀다. 이 모든 게 동학을 공부하면서 느끼게 된 것이다. 함께 공부해준 안산 동학언니들과 또 여기까지 이끌어준 박맹수 교수님, 고은광숙 선생님, 김용휘 선생님 등 여러 선생님들과 그리고 오늘 답사 안내를 맡아주신 박길수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멋진 선배들의 뒤를 따라 개벽 세상의 꿈을 향해 나도 조금씩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끝.
첫댓글 우와 어마어마한 정리임다 몸도 안좋은데 보고서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다 공부할수록 동학은 우리 정체성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길라잡이인것 같습니다
와~~함께 걸었던 시간과 장소가 그대로 전해지네요^^
영아샘~고생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