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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전능하신 천주 성부 ◎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②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모두 고개를 깊이 숙인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③성령을 믿으며 ④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⑤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⑥죄의 용서와 ⑦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⑧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
이렇게 질문하는 제 입장에서도 여러분이 막히는 것 없이 완벽하게 지금 이 순간 다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해서 묻는 질문도 아닙니다. 입장과 환경이 다르다보니, 묻고 대답하는 위치가 정해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교리시간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의 모든 내용은 사도신경에 있다고 해도 잘못된 표현은 아닙니다. 그럼, 사도신경을 한번 같이 할까요?
우리가 예비신자교리 시간을 통해서 배우고 들은 것을 요약하면, 사도신경이라고는 했습니다만, 그 내용을 다룰 때는 간단한 사도신경을 다룬 것이 아니고, 믿을교리와 지킬계명과 성총을 얻는 방법으로 정리된 교재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이 시간에 하는 교리의 대본으로 사용한 책자는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분열 사건 이후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당시 교회에서, 신앙의 정신을 정리하여 반포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보는 글자 그대로 정리하여 낸 것은 아니지요. 여러분이 보시는 것은 우리말과 글자로 번역된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된, 마르틴 루터의 종교분열은 그리스도교가 하나 더 분열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그리스 정교회라고 이름 붙은 분열이 1054년에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그리스도교회가 세 개로 분열된 것이지요. 가톨릭, 오리엔탈 오르토독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로 말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말한다면, 천주교, 동방정교회, 개신교...로 하면 옳은 표현입니다. 이 세 가지 모습을 합쳐서 영어로 그리스도교회, 한자로 표현하면 기독교(중국말로는 ‘기리시단’으로 발음)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회는 1608년에 영국에서 분열된 또 하나의 개신교이고, 또 하나의 프로테스탄트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생겨난 여호와의 증인, 한국에서 생겨난 통일교도 그런 부류로 묶을 수 있는 개신교의 모습들입니다.
이렇게 여러 종파로 구별되다보니, 그 각각의 신앙신조도 조금씩은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반복하거나 말할 수 있는 내용은 다 접어두고, 우리 가톨릭과 관련된 것이요, 우리 천주교와 관련된 것뿐입니다. 제가 다른 종파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릴 필요는 없지요. 혹시 이야기하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올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4. 사도신경의 내용 설명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내용은 전부 8가지입니다. 앞의 세 가지는 하느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 대상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고. 그 중에서 성자에 대한 내용이 가장 깁니다. 내용이 길다는 것이 대수(〔←大事〕 중요한 일. 대단한 일. 최상의 일《주로 의문문에 쓰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만큼 우리 삶에 적용할 내용이 많다는 소리는 될 것입니다. 먼저 성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그보다 앞에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언급하는 성부라는 표현이 나오고, 하느님의 세 번째 위격으로서 이름만 간단하게 성령이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내용을 빼면, 우리가 세상에서 신양생활하다가 만날 수 있는 공동체와 우리가 세상에 갖고 살아가는 믿음의 바탕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교회가 그것이고, 죄의 용서가 그것이며,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내용이 포함됩니다.
그 내용을 이제 조금씩 자세하게 더듬어 나가지요.
4.1 성부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의 첫 번째 대상인 성부(聖父)에 대한 내용은 천지만물의 창조주로 언급하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사람은 자기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①내 귀에 들려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서 내 삶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②사람의 머리로 알아들을 ㅅ 없는 것이니, 우리 사람들의 생활에 간섭해도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존귀함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참 좋다고 여기는 이론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하고 받아들인 세계만 사로잡혀 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 시작은 참 좋아 보이지만, 그게 정말로 좋은 결과를 맺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은 세상에 살아본 경험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닌데,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세상에서 더 큰소리를 치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게 참 신기합니다. 어디까지나 세상은 인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겠지요?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 우리는 신앙에서 고백하고 받아들입니다. 창조(創造)라는 말은 ‘①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듦. ②신이 우주 만물을 만듦.’이라고 우리말 사전은 설명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의 설명은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창조를 살펴보고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행동은 ‘창조’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쓴다고 해도, ‘제작(製作)’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다른 재료나 도구가 있고, 그 배경을 통해서 뭔가 만들어 냈을 때,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의 행위인 창조를 기록하는 성경의 내용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옵니다. 천지만물의 창조모습입니다. 하늘과 땅, 큰 빛과 작은 빛, 나무와 동식물,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이 하신 일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기록입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이 하느님의 창조가 언제 실현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창세기라는 성경에 그 내용을 기록한 사람들도 성부이신 하느님이 움직이시는 모습을 옆에서 관찰하고 나서,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머리를 이용하는 학문연구에 의한 결론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구약성경의 창세기 1장과 2장은 지금부터 대략 3000년전과 2500년쯤에 쓰인 것이라고 합니다. 임금이나 역사의 때로 말하면, 구약시대에 해당하는 이스라엘 역사의 솔로몬 임금 때에 쓴 것도 있고, 이스라엘의 유다백성들이 기억하는 바빌론유배 때에 쓴 내용도 있다고 그럽니다. 창세기 1장은 지금부터 2500년 쯤 전에 쓰인 내용을 기본 줄기로 하고, 창세기 2장은 지금부터 3000년 쯤 전에 쓰인 내용을 기본 줄기로 한다고도 합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학문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시대적인 배경을 갖는 내용들은 만들어낸 것이니, 우리가 무시해도 좋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느님을 대하던 사상이라고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사람의 힘을 넘는 그렇게 놀라운 것들에 대하여 지금의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다른 모습과 자세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에 그렇게 등장하신 하느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사람들을 위하여 특별히 준비하신 일을 계획하기라도 하셨듯이 특별한 일을 이루신 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그런 모습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에게 선택되었다는 선민(選民)의식으로 똘똘 뭉쳐 그다지 점잖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성부 하느님의 창조를 말하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든 생명과 만물의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인 신앙에는 하느님이 눈에 보이는지 묻지도 않았고, 하느님이 내 삶에 어떤 이익을 가져오는 분인지 따지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회의와 협약에 의해서 만들어낸 신앙도 아니지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신앙 안에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완벽하게 이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4.2 성자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사도신경의 두 번째 요소로 나오는 성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차례입니다. 창조주라고 설명하는 성부 하느님과 더불어 구원자로 설명하는 성자에 대한 내용도 알아듣기 힘들고, 인간의 의심이 많은 것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유행했던 다빈치코드라는 소설과 영화가 있었습니다. 마치도 그 내용에 대해서 모르면 간첩이나 되고, 그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문명인이나 문화인이 된다고 할 수 없는 주장으로 한동안 혼란스럽게 했던 인간의 생각이 담긴 한 때의 풍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에 대해서 누군가가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다루었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우리가 성자요, 세상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으로 공경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신앙에서 주장하는 바처럼 부활한 적도 없고, 구원자도 아니면,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여인과 짜고서 부활을 꾸며내고 지금의 프랑스 지방으로 도망쳐서 거기서 목숨을 유지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있을 법한 일이지요? 가능하다고 우길만한 일이라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지구상에는 인간 예수를 조상으로 하는 후손이 살아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입을 열어 말한다고 모두 다 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빈치코드라는 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고......
예수그리스도는 지금부터 대략 2011년 전에 지금의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분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사회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던 ‘마리아’였고, 그의 아버지로 공경받는 분은 세상에 기원을 두지 않은 분으로 신앙에서는 성부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라는 여인은 이스라엘 역사의 아주 위대한 임금이었던 ‘다윗’임금의 후손이었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사이였고, 혼인을 앞두고 있던 사이였는데, 그들이 정식으로 혼인식을 올리고 함께 살기 전에 마리아의 태중에 아기요, 아들인 예수가 생겼으므로 관계가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 요셉을 가리켜서 ‘예수를 기르신 아버지, 한자로 양부(養父)’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때는 다윗임금으로부터 100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고, 그 당시 베들레헴은 로마의 유명한 장수 안토니우스가 기원전 63년에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에 합병해버린 로마제국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이집트 땅도 로마제국에 편입돼 있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태어났던 예수님의 그 이후 일에 대한 것은 성경에 근거해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라는 인물이 역사가들에게는 그다지 귀중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싶은 내용들이 모두 들어있는 기록을 남기게 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세상에서 통용되는 모습과 신앙에서 통용되는 모습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등장하는 예수의 모습은 그다지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동쪽 편, 이스라엘 지방이라고 하는 변방에서 볼품없이 살았던 인물이고, 다 커서는 로마의 행정장관이요 총독이었던 폰티우스 필라투스라는 사람에 의해서,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반역자의 하나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기록을 본 것은 아닙니다만, 로마역사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죄인은 모두 3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라는 이름이 제대로 된 역사서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을 찾으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대략 40년이 지난 다음에 태어나서 신변잡기(身邊雜記) 글을 남겼던 수에토니우스라는 사람의 기록에 남을 정도뿐입니다. ‘로마제국의 동쪽 변방에서 빌라도라는 총독이 다스리고 있던 때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십자가에 죽은 죄수가 있는데, 이 사람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했다는 믿음이 퍼졌다. 그의 부활을 본 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데, 그들은 크레스뚜스라고 불린다.....“는 내용입니다.
수에토니우스라는 사람이 이런 글을 남겼을 때는 네로라는 황제가 로마를 다스리고 있던 시기 전후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 이후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들이 신앙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척살(刺殺,칼 따위로 사람을 찔러 죽임)당합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국가종교로 인정되고, 로마제국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서 서쪽을 교황이 차지하게 되고, 이 그리스도교를 마지막으로 박해했던 380년경까지 말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기원전 4년경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대략 서른 살쯤 되었을 때,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 등장하여, 12명의 사도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시키면서 약 3년간에 걸쳐 이스라엘 땅의 남쪽과 북쪽을 돌아다니시면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편에 붙어서 그 지역을 대신 다스리고 있었던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모함과 질투에 연관되어, 기원 후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3시경에 예루살렘성에서 가까웠던 골고타 산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세상을 떠납니다.
물론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다시 그로부터 40일간에 걸쳐, 생전에 사도로 삼았던 12명 가운데, 자살의 길을 선택한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를 빼고, 다시 합류한 마티아와 더불어 다시 12명이 된 사도들을 중심으로 재교육(?)의 시간을 보내십니다. 그렇게 지내시면서 하느님나라와 하느님의 업적을 알리고 나서 하늘로 승천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10일 후에,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시고, 그 성령의 힘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가장 우선으로 하는 공동체, 희랍어로 쓰면, 에끌레시아가 탄생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의 요약은 우리가 묵주기도에서 기억할 수 있습니다. 특히 빛의 신비로 기억하는 내용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몇 몇 가지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예수님께서 세상에 가르치신 내용의 요약에 해당하는 하느님나라, 그리고 하느님나라의 영광을 미리 세 명의 사도들에게 보여주셨던 거룩한 변모, 그리고 인간의 세상에 하느님의 힘과 예수님이 영원히 이 세상에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남기신 성체성사에 대한 내용까지 빛의 신비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관한 것을 뭉쳐서 말하면, 하느님나라라고 설명합니다. 이 하느님나라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현실에서부터 만들고 그에 함께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다 마치고 난 다음에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그곳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자만심을 우선으로 한다면, 이 하느님나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내용까지 모두 말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과 삶의 본보기로서 우리도 모두 하느님나라에 합당한 시민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내용을 어떻게 배우느냐하는 문제만 남지요. 가만히 있어도 우리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하는 신앙공동체, 에끌레시아를 통해서 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에끌레시아는 한자를 써서, 교회 혹은 성당이라고 불립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올바른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4.3. 성령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성령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사람들의 오관에 감각되지 않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승천하시고 10일 만에 세상에 내려오셨고, 그렇게 해서 형성된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 살아계시고, 교회의 여러 가지 전례와 성사를 통하여 그 힘을 드러내시는 성령에 대한 것은 따로 길게 설명한 없습니다.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배우고 느끼고 알아차릴 모든 하느님에 관한 것은 이 성령의 힘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4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에 대하여
교회는 신앙공동체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지금 무악재성당에 들어와 있습니다만, 눈에 보이는 건물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건물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생활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올바른 정신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공동체요, 교회라는 말을 알면서도 하느님에 관한 삶의 정신으로 뭉치지 않고, 인간의 목소리만 높이는 곳이라면 그곳은 교회의 존재의미가 없는 곳이 될 것이고, 차라리 교회라는 말이나 신앙공동체라는 말을 버리는 것이 더 나은 곳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하고 보편된 것이 되려면, 하느님 성령의 힘이 올바로 드러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뜻은,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우리 사람들이 하는 일이겠지만, 그 일들을 통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이 하느님의 힘을 만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의미를 상실한 이상한 집단이 되고 마는 것이고, 그런 집단이 된다면, 우리가 고기를 먹을 대상으로 사육하는 동물들의 집단과 하등의 다를 바 없는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곳이나, 그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사람만이 아니라 하느님도 서글퍼하실 일입니다. 없는 것만도 못하는 곳이 되고 말테니까요.
교회의 역사는 2000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렇게 긴 역사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위기도 있었고, 기회도 있었겠지요. 잘못된 일도 했고, 그 잘못을 돌이켜 올바른 길로 돌아오려고 노력한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으로 하느님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지 않게 하려면, 올바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다가 얼마 후에는 그저 떠나면 되지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5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이 내용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완벽할 수 없듯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나아간 영혼들을 세상에 살아있는 기억하고 기도해주면, 세상에 사는 우리도 그분들의 도움을 입을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떠난 영혼들 가운데, 우리의 기도와 청원으로 하느님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하자는 것이 통공의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1930년대에 우리 신앙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요리강령이라는 그림책이 있었는데, 세상을 떠난 영혼들, 우리의 기도와 도움을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영혼들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었고, 그 힘이 도저히 닿을 수도 없고, 그 힘을 피하는 자들은 지옥에 있는 영혼으로 그려놓은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책에서 본 내용 가운데, 우리가 세상을 떠난 분들을 기억해서 하느님의 힘을 청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바로 미사를 통하는 방법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인간이 그 주도권을 쥐고 움직이는 듯하지만, 신앙의 일 특히 미사는 하느님이 힘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유일무이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고, 하느님의 힘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바로 미사라는 것입니다. 이 미사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함께 해야 하는지, 우리의 올바른 다짐과 자세가 필요한 일입니다.
4.6 죄의 용서...........
고해성사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죄가 좋은 사람 아무도 없고, 죄를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가 갖고 살아야 할 자세입니다만, 삶에서 우리 몸에 달라붙는 찌꺼기는 우리가 치울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 대표적인 찌꺼기인 죄는 하느님의 힘만으로 사라지는 것이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삶을 통해서 죄의 용서를 받을 방법을 알고 그와 더불어 사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종교나 신앙이 죄의 용서를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 죄의 용서와 죄 사함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준비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 내려오는 선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좌 용서를 위한 단계는, 먼저 자기 삶을 돌이키는 성찰, 돌이킨 삶을 진정으로 살피고 잘못된 것을 수정하려는 통회, 그리고 새로운 마음자세를 갖는 단계인 정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을 신앙공동체에게 드러내는 사제 앞에 와서 하는 고백, 그리고 고백한 죄에 대하여 세상의 삶에서 실천하는 최소한의 의무인 보속으로 나눕니다. 어떤 부분이라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있겠습니까마는, 이 죄 사함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단계인 통회입니다.
4.7. 육신의 부활...........
우리가 체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모두 몸을 이용해서 하는 일입니다. 영혼만이 하느님에게서 상과 벌을 받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정신이 따로 놀고, 몸이 따로 노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언제 부활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의식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활을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모든 의도가 완성되는 날, 즉 세상이 완성되는 날,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실 일입니다. 이 세상이 완성되는 날을, 신앙이 아닌 이 세상에서는 세상이 망하는 날이라고 알아듣습니다. 문제지요? 같은 일에 대해서 서로 바라보는 자세가 다르다면,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도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겠지요?
4.8. 영원한 삶.............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에게는 일주일이나 1년이 의미 없는 소리겠지요? 80년이나 100년 정도 살다가 이 세상의 삶을 마쳐야 하는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우리 입장에서 영원한 삶이나 영원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삶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육신을 남겨두고 영혼이 하느님께로 옮겨가서 그분이 마련해주신 축복을 누리며 산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았던 영혼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세상의 삶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했고, 그렇게 살았던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고, 우리 신앙인들은 모두 그 선물을 바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꿈을 꾸면서 살아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