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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이지신을 생각하며 지리의 미싱 링크를 찾아 나선 길
1. 일자 : 2011. 5. 28(토)
2. 장소 : 지리산(1915m)
3. 행로 및 시간
[거림 탐방센터(11:05, 세석 6km) -> 천팔교(12:00) -> (북해도/찬물샘) -> 전망대(13:11) -> 세석대피소(13:40, 장터목 3.4km) -> (중식-14:20) -> 촛대봉(14:44) -> 삼신봉(15:36) -> 연하봉(15:50, 1730m) -> 장터목(16:08, 1653m, 중산리 5.3km) -> 유암폭포(17:06, 중산리 3.7km) -> 홈바위교(17:16) -> 너른 소(17:45) -> 출렁다리(17:54) -> 천황봉/장터목 갈림(18:07) -> 중산리(18:37)]
4. 동행 : 성우
< 다시 지리산 산행을 준비하며 >
근 2년 만에 다시 지리산을 찾으려 한다. 재작년 8월 무박 종주 산행에 도전했다가, 어둠과 새벽 습기와 한낮 고온을 이겨내지 못하고 맥 없이 거림으로 하산한 후 스스로 의 한계를 직감했다. 이후 마음 속으로는 늘 지리산을 꿈꾸고 있었다. 그 동안 작년 설악 공룡종주, 한라산 돈내코-영실-어리목 코스 1박 2일 산행 등 나름 지리 종주에 다시 도전할 준비를 해 왔다.
지난 달부터 성우가 지리산에 가자고 노래를 한다. 머리 속으로 여러 코스를 그린다. 금요무박으로 종주에 다시 도전할까? (성우까지 같이 가는데 잘 해야 재작년 ‘거림’의 재판이 될 확률이 높다.) 금요무박 차를 타되 코스는 백무동-한신-세석-장터목-제석봉-(천황봉)-중산리 코스를 택할까? (현실적 대안으로 한신계곡 오르막만 견디면 미답봉인 세석-연하봉-장터목 코스를 경험해 볼 수 있고, 이후 몸 상태를 보아가며 장터목/천황봉 하산 길을 선택할 수 있으니 실현 가능하다.) 내심 백무동-세석-연하봉-천황봉-중산리 코스를 마음 속에 정하고 새로운 한 주를 맞는다.
월요일 오전 성우에게 일정을 확인하고 버스 예약을 하려는데,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제안을 한다. 심야버스를 타지 말고 토요일 새벽, 차를 가지고 출발해서 등산을 하고 저녁 무렵 남원에 있는 대식이와 합류해 회포를 풀고 다음 날 귀경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능한 최상의 코스는 거림-세석-장터목-중산리가 된다. 역으로도 가능하다. 내 생각만 할 수 없고 오랜만에 대식이도 보고 싶어 그러자고 승낙을 해 버린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될 수 있을 것이고, 긴 운전시간이 걱정되지만 코스 난이도의 부담은 줄어든다.
차분히 시간 계획을 세운다. 걷는데 7시간, 휴식과 식사를 고려하면 총 7시간 30분의 산행이 될 것이다. 아침 6시 30분 분당 출발, 10시 산행 시작, 5시 30분 하산이 대략적인 산행일정이다. 불확실성이 제거되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지리산 산행지도를 구하러 산악회 사이트를 뒤적이다 보니 공교롭게도 네팔산악회에서 주말 지리산 종주 산행을 예고하고 있다. 아! 네팔과는 인연 닿기가 참 힘들다.
< 희망사항 >
온고이지신 이란 말을 좋아한다. 그 말 뜻이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창조’ 하는 잘 알려진 것이든, ‘예전에 알고 있던 사실을 더욱 발전시켜 진보된 것을 만듦’이라는 새로운 해석이든, 과거의 지식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는 일맥상통하다. 등산에서도 온고이지신은 중요하다. 늘 새로운 산을 찾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이미 다녀온 산에서 과거에 느끼지 못한 새로움을 목격하고 그것을 통해 색다른 감동을 얻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간 지리산을 4번 다녀왔다. 중첩된 코스도 있었지만 늘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번 산행에서는 그간 경험한 거림-세석 코스에 새로 걷는 세석-장터목, 장터목-중산리 코스를 더해 나만의 당일 지리산 등산 코스를 개발해 보고자 한다. 산은 늘 같으면서도 같지 않음을 계절과 시간, 코스와 날씨에 따라 다른 모습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이번 5번째 산행에서도 확인하고 싶다.
이번 산행에서는 두 가지 즐거움을 기대한다. 하나는 세석에서 장터목까지 그간 경험해 보지 못한 새 길을 걷는 설렘을 맛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등산을 마치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외지에서 술 한잔을 기울이고 밤을 보내는 것이다. 저녁 숙소에서 마실 요량으로 집에 있는 이강주 한 병을 배낭에 싣는다. 생각만으로도 알싸한 생강의 향이 코 끝을 자극한다.
이동거리가 만만치 않다. 분당에서 중산리까지는 318km로 3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고, 중산리에서 거림은 9.7km 이지만 택시 외에는 마땅한 이동 수단이 없고, 중산리에서 남원은 117km, 남원에서 김제는 78km 거리로 꽤 멀다. 등산거리와 시간도 녹녹하지 않은데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도 길어 과연 몸에 부담 없이 하루 만에 이 모든 것을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즐거움을 얻기 위한 당연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는다.
시기 상으로 세석평전의 철쭉이 한창일 것이다. 재작년 현충일 거림-한신계곡 코스를 등산할 때 계절이 지나 끝 물인 철쭉을 보고 아쉬워했는데, 이제는 긴 기다림의 보상을 받고 싶다. 사실 택시까지 불러 중산리에서 거림으로 이동하여 산행을 시작하려는 것도 세석평전에서의 ‘꽃의 향연’을 친구와 함께 보고픈 마음에서이다. 지리산 최고의 고원에서 분홍빛이 주는 감동을 받고 싶다.
인터넷에서 구한 성삼재에서 대원사까지의 길을 담은 긴 지도는 지리산의 너른 품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부분이 모이면 전체가 되듯이 이렇듯 구간 코스를 찾아 길에 익숙해진 후 올 가을쯤에 지리산 종주에 다시 도전해 보아야겠다.
< 중산리 가는 길에 >
전날 이동경로를 재점검하다 중산리에서 남원까지의 거리가 117km 나 되고 시간도 1시간 30분 가량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는, 남원에서 김제까지의 이동은 취소하고 숙소를 남원에서 잡기로 했다. 부지런한 성우가 콘도 예약을 했고, 난 대신 코펠과 버너를 추가로 챙겨 가기로 했다. 춘향의 고장에서 밤을 맞고 세석에서 음식을 조리해 먹을 생각을 하니 토요일 아침이 더 기다려진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신 새벽, 눈을 비비고 일어나 곧바로 배낭을 메고 분당으로 향한다. 소위 첫 차라는 것을 탄다. 버스에는 밤새 숙을 마시고 골아 떨어진 사람들의 냄새가 진동한다. 그들은 밤새 행복했을까? 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 본다.
6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성우 집 부근에서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선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성우의 흰색 새 애마를 타고 달린다. 길을 나서는 것은 언제나 즐겼다. 이러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천안 부근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을 놓쳤다. 별 심각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집중력이 부족해져 둘 다 네비게이션 길 안내에 안이하게 대처한 결과다. 때문에 먼 길을 돌아 가게 되었고, 엎친 데 덮친다고 도중에 2번이나 더 고속도로 진입로를 잘못 들어, 중산리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40분, 예정보다 40분 정도를 늦어 버렸다. 일이 꼬인다. 부랴부랴 택시를 불러 거림으로 향한다.
< 거림에서 세석 >
우여곡절 끝에 다시 거림탐방센터 앞에 섰다. 3번째이다. 주위에 보이는 대부분이 눈에 익다. 최근 비가 많이 왔는지 길은 초입부터 젓어 있었다. 가뜩이나 돌 길이 걷기에 부담스러운데 습기를 품은 바위와 진흙 범벅은 유쾌하지 않은 동반자로 다가왔다. 그래도 조릿대가 호위해 주고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를 벗 삼아 오르는 기분은 그만이다. 특히 물소리는 한 여름을 방불케 한다. 성우도 나도 컨디션이 좋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몸에는 분명 바이오 리듬이라는 것이 있고 내 경우는 보름 즈음을 경계로 몸 상태가 최악이 되고 점차 회복하여 그믐 무렵에는 최고조로 좋아지는 것 같다. 지난 한 달을 되돌아 보며 드는 생각인데, 오늘 이후 몸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여 이 가설이 정확한지 확인해 보아야겠다.
당초 5시 30분 중산리 하산을 목표로 계획을 잡았는데 시작이 40분 늦었으니 시간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1시 30분 세석 도착을 목표로 발걸음을 재게 움직인다. 12시 무렵 천팔교에 당도한다. 오르며 어느 순간부터 계곡의 물소리가 소음으로 들리기 시작했는데 다리를 지나며 길의 작은 변화가 걸음에 생기를 불어 넣어 준다. 기억은 예전에 이곳까지 1시간 소요되었다 하는데 오늘은 10분을 당겼다. 세석까지를 2시간 20분 만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길은 조금 더 가팔라 진다. 간간이 흐르는 물이 바위를 만나 돌아 들고 급기야는 작은 폭포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 거림게곡의 폭포의 장관 / 트인 하늘에서 바라 본 지리 >
고도가 점점 높아진다. 거림의 고도가 660m 정도였는데 1시 무렵 찬물샘을 지나 올라선 전망대의 고도는 1400m 수준이다. 전망대에서 바라 보는 지리의 봉우리들은 뒤 편으로 흰 구름의 호위를 받으며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성우도 나도 2시간 만에 열린 하늘에 기분이 업 된다. 앞으로 30분 정도만 오르면 세석에 도착할 것이다.
다 왔다는 안도감과는 다르게 길 사정은 여전히 발 딛기가 쉽지 않은 돌 길이고, 금방이면 보일 것 같은 세석산장의 지붕은 한참을 걸어도 감감 이다. 성우도 나도 말수가 줄어 든다. 내가 간간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하고 말해도 성우는 믿지 않는 눈치다. 경험한 길이라 전망대만 지나면 길 사정이 좋아질 것이라 말했는데 된비알에 흘러 넘친 계곡물의 질펀함까지, 나라도 ‘조금만’ 이라는 말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작은 발걸음은 너덜을 헤치고 물 길을 건너 고도를 조금씩 높였고 1시 40분, 드디어 세석에 당도하게 되었다. 고대하던 철쭉은 이미 다 저 버렸지만 모던한 이미지의 산장의 모습과 세석의 시원한 평전은 내가 늘 성우에게 자랑하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성우는 내 배낭을 메고 나는 코펠에 물을 길어 산장으로 향하는 비탈을 오른다. 음식을 먹는 다는 기대감에 발걸음이 가볍다. 늘 곁을 지나며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산장의 식사 테이블에 우리도 앉는다. 김밥이나 빵 조각이 아닌 뜨끈한 국물이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라면이 보글보글 끊고 있다. 작은 행복에 감동한다. 성우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역시 지리산이야’를 연거푸 읊조린다.
< 드넓은 세석을 배경으로 >
< 세석에서 장터목 >
다시 배낭을 멘다. 세석에서 식사 겸 휴식으로 40분을 보냈다. 산에서 끊여 먹는 라면은 최고의 진수성찬이었다. 배도 부르고 긴 오르막을 올랐다는 작은 성취감에 기분도 부풀어 오른다.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산장은 이정이 나뉘고 휴식을 취하고 새 길을 가는 플랫폼이다. 그로 인해 변화가 발생되는 만남의 장이자 정거장이다.
산장 앞 난간에 서서 주위를 둘러 본다. 드넓게 펼쳐진 평원과 능선 위 촛대봉은 세석의 가시적 정원이다. 이곳에 상주하는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다. 매일 이렇게 훌륭한 정원을 감상하며 근무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세석을 떠나 다시 길에 나선다. 몰입, 그 뜻은
이러하다.‘어느 순간 삶이 고조되어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시간과 공간은 물론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심리상태’. 지금의 내 마음은 완전히 산과 길에 몰입되어 있다. 자발적 몰입은 내가 매주 산을 찾는 이유이자, 산에서 정신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 촛대봉에서 >
촛대봉으로 향하는 능선에 서서 세석을 굽어본다. 밑에서 올려다 보는 것보다 훨씬 근사한 풍경이 펼쳐진다. 세석산장 뒤편으로도 넓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었고 능선은 길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도도한 물결에 할 말을 잊는다.
이제 길은 촛대봉, 삼신봉, 연하봉을 지나 장터목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난 여러 번의 지리산 등산 길에 걸어 보지 못했던 미답봉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 가벼운 흥분을 불러 온다. 촛대봉으로 향하는 길도 돌 길 이지만 거림계곡 길과는 차원이 틀리다. 가장 큰 변화는 하늘이 열려 있다는 것과 시원한 바람이 분다는 것이다. ‘좋은 경치에 시원한 바람이라’ 산꾼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다.
1704m의 촛대봉. 멀리 천황봉이 우람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지리의 정상부는 평평하고 그래서 육산이라는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제석봉을 넘어 낮게 꺼졌다가 다시 치고 오르는 산세가 험난한 악산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리는 전체적으로 보면 육산이지만 구간구간은 오르내림을 반복해야 하므로 결코 녹녹한 곳이 아니다.
촛대봉을 지나 맞는 첫 이정표. 장터목까지 2km가 남았다 한다. 시간은 막 3시를 지난다. 4시 장터목 도착을 목표로 길을 나선다. 산에만 오면 시간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데도 부지불식간 작은 목표시간을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아등바등 이다. 늘 아쉽지만 현실이다.
편한 능선 길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간다. 1650m에서 1750m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길은 변화무쌍하게 이어진다. 발은 고달프지만 머리는 맑아진다. 길가 비탈진 곳에는 어김없이 ‘바람난 여인’ 얼레지가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성우가 사진 찍는 것에 점점 취미를 붙여 가고 있다.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도중에 걸음을 멈추고 ‘한 장 찍고 가야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산-사진-야생화로 이어지는 산꾼들의 전철에 그도 예외일 수는 없다. 조만간 성우가 지금보다 더 사진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 삼신봉에서 >
삼신봉은 어디인지도 모르게 지나쳤다. 이정 표식을 보지 못했지만 3시 35분경 계단을 올라 서서 바라보던, 연하봉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빛 고운 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바위 부근이 삼신봉이었나 보다
< 고사목과 하늘 / 연하봉 부근에서 >
연하봉 가는 길은 오늘 목격한 풍경 중 가장 멋진 곳이다. 천황을 배경으로 뱀처럼 굽이치는 길은 걷는 재미와 더불어 보는 감동을 주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긴 평지 길과 구상나무 고사목, 푸르른 하늘과 구름의 조화, 그 길을 걷는 산꾼들의 무리 그 조화가 인상적이다. 그 풍경 너머에 고대하던 장터목이 있었다. 부지불식이란 말이 딱 들어맞게 장터목의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 장터목 산장을 배경으로 >
< 장터목에서 중산리 >
3년 만에 다시 찾는 장터목은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저녁 분위기가 난다. 골수산꾼들은 일찌감치 산장에 도착하여 술 한 잔을 걸치고 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나 보다. 언젠가 나도 저 분위기에 젖을 때가 있을 것이고 그날을 위해 오늘은 눈 길만 준다. 산장을 배경으로 만세 사진을 한 장 찍고는 중산리 방향으로 길을 튼다. 한 눈에 보아도 가파른 하산길이 시작된다. 초입에 샘이 있다. 다음을 위해 머리에 담아 둔다.
< 장터목에서의
만세 / 유암폭포의 기세 >
장터목에서 중산리까지의 거리는 5.1km, 지도에 표시된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 현재 시간이 4시 10분, 빠듯하다. 거림 오름 길에 습기 많은 돌 길이 이곳에서도 계속된다. 거림 길은 오름이라 위험하지는 않았는데, 이곳은 넘어지면 큰 부상을 입겠다. 일단 머리 속으로 유암폭포를 중간 이정으로 정하고 부지런히 내려간다. 계곡의 물소리가 역시 거세다. 세로로 된 국립공원 표지목이 4-8로 시작한다. 4km라는 이야기인데 장터목에서 본 이정표상의 거리 5.1km와 달라 의아해 한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4’로 시작되는 표지목은 칼바위에서 시작되는 중산리-장터목 코스의 고유 번호로 실제 중산리 대피소는 거기에서 1km 이상을 더 가야 했다.)
험한 길을 내려 가며 지리산은 오르는 길 보다는 내려 가는 길이 더 험난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오를 때는 몸에 에너지가 충분한 상태이고 하산 시는 그렇지 않아서 이기도 하겠지만, 예전에 천왕봉-중산리, 세석-한신계곡, 세석-거림 하산 길 모두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든 고행의 길이였고 오늘 역시 그렇다. 종주 길도 중산리에서 천황봉으로 올라 대세 내리막을 통해 성삼재로 하산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요는 ‘착수의 용이성’이냐 ‘끝이 좋아야 모두가 좋다’냐 인데 일반대중은 착수의 용이성을 더 선호하나 보다. 다만 지리산을 여러 번 다녀 본 사람들이라면 내 의견을 동조하는 사람들도 꽤 많을 것이라 믿는다.
5시가 넘어가고 있다. 길은 여전히 미끄러운 돌 길. 목이 없는 신발을 신은 성우는 더 힘겨워한다. 이 늦은 시간에 오르는 사람들도 꽤 있다. 여성 3분이 운동복 차림으로 산을 오른다. 가벼운 농담을 한다. 말을 하고는 ‘산에서 헛소리하면 산신령이 노(怒) 하시는데’ 하고 말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어 유암폭포 부근에서 성우가 자빠졌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큰 일 날 뻔 했다. 내 말 실수에 성우가 당한 것 같아 미안했다. 이후 나 역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찌었다. 다행히 배낭을 쿠션 역할을 해 주었지만 눈 아래 길에 보다 충실해진다.
5시 6분 유암폭포에 도착했다. 성우의 상처도 확인하고 몸도 추스를 겸 잠시 휴식을 취한다. 폭포의 물은 한 여름이다. 2단, 3단으로 내리 꽂는 기세가 놀랍다. 산이 크니 수량도 풍부하다.
< 망바위교 / 돌비석 지대에서 >
널리 지나온 길을 따라 눈을 돌리니 저 만큼 앞에 지리의 마루금이 보인다. 고작 1시간, 약 2km 정도를 내려 왔는데 아득한 느낌이다.
멋진 다리를 지난다. ‘홈바위교’라 명명되어 있다. 원근법을 이용해 찍은 사진은 나무의 푸르름이 소실점이 되어 멋진 구도를 만들어 낸다. 잠시의 인공(나무 데크/계단) 길이 다리의 피로를 풀어 준다. 관성의 법칙은 도처에 적용되어 긴 내리막 돌 길을 당연하게 여기다가 평소 같으면 힘겨워했을 계단 길을 보고는 편안함을 느낀다. 고난이라는 것은 분명 상대적인 것이리라.
망바위교를 지나자 돌 비석 지대가 나타난다. 누군가가 시작했을 작은 돌무덤이 다수의 자발적 창작자를 참여 시킨 모양새다. 여기 저기 창작의 의도가 다른 돌무덤이 산재해 있다. 무질서 속에서 자유로움이 묻어 난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사진 한 장을 찍고 잠시 숨을 고른다. 산에서의 사진을 찍는 것의 매력은 단순히 보이는 사실을 내 의도대로 담는 것 외에도 사진 찍는 순간 30초-1분 정도의 쉼과 여유를 준다.
고도는 900m 급으로 떨어졌는데 길의 사정은 여전하다. 무명의 커다란 소(沼)를 지나고 출렁다리를 지나고도 한참을 간다. 고도는 이미 700급으로 떨어졌는데도 변화 없는 길에 부모에 함께 지리산 등산을 온 학생들의 극에 달한 힘겨움의 끝은 어디인가를 생각할 무렵, 거짓말처럼 갈림길이 나타난다. 칼바위 부근이다. 중산리 기준 우측 길은 천황봉으로 직행하는 길이고, 좌측은 우리가 내려 온 장터목 길이다. 두 길을 모두 경험한 이의 길의 난이도에 대한 결론은 난형난제이다. 다시 오기 싫을 만큼 힘겨운 하산 길이었다.
< 이름 모를 깊은 沼 / 장터목 야영장에서 >
이후의 길은 중산리 야영장을 지나 탐방안내 센터로 이어진다. GPS 궤적 추적을 마치고 시계를 본다. 6시 37분. 거림 시작 7시간 30분의 먼 길이었다. 오늘 산행의 키워드를 정리해 보면, 계곡의 물소리, 능선의 장엄함, 미끄러운 돌 길 정도가 될 것이다. 힘겨웠지만 새 길을 걸어 좋았고, 친구와 함께 해 더욱 의미 있는 산행이었다. 자! 이제 춘향과 또 다른 친구가 있는 남원으로 가자.
< 남원에서의 밤 >
등산으로 지친 몸의 피로는 남원에서의 새로운 밤에 대한 기대로 잠시 잊혀진다. 120km 거리를 그것도 중앙 분리대도 없는 왕복 2차선 88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남원은 이미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도시 전체가 조용하다. 시끌벅적한 유원지의 밤을 예상했는데 의외다.
숙소에서 가볍게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한우 채끝살과 이강주 그리고 후식으로 먹은 냉면까지 전라도의 맛을 제대로 경험해 보았다. 산행의 뒷이야기, 대식이의 남원에서의 삶 등이 화제가 되었고, 다음 산행을 위한 지켜지기 않을 다양한 제안들로 밤이 무르익어 갔다.
타지, 그것도 남도에서의 토요일 밤은 이방인을 들뜨게 했고, 결국 노래방에서 한 잔 더 했다. 12시 무렵 콘도에 도착했을 때는 몸의 피로와 술의 수면 유도 작용이 어우러져 곧바로 골아 떨어졌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대식은 유럽 챔피언스 리그 축구 결승을 보고 있었고 성우도 일찍 일어난 눈치다. 비몽사몽 간 축구를 잠시 보다 다시 잠의 나락에 빠져 들었다. 꿈에 지나 온 지리의 능선이 보이고, 노래방에 가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든 기억이 어렴풋하다.
< 에필로그 >
오전 거림을 오르며 지리산은 그저 초록의 육중한 덩어리로만 느껴졌다. 계곡의 물 길이 거셌지만 잎새의 푸르름이 더해 가는 녹음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세석을 기점으로 드넓게 이어지는 능선의 장엄함은 이미 사진기에 담았는데 올라갈수록 더 좋은 구도가 만들어져 자꾸 또 찍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계곡 길 5시간과 능선 길 2시간으로 구성된 오늘 산행코스는 하산 길이 생각보다 미끄러웠다는 것 말고는 예상 그대로였다.
산행을 준비하며 머리 속에 그렸던 온고이지신 중 거림 길이 온고라면 이후 세석-장터목-중산리는 지신이었다. 깨달음이 있다면 계곡은 한통속이었으며 새로 경험한 세석-장터목 능선은 지리 종주능선 길의 새 아이콘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성우는 어떨지 몰라도 오늘 코스의 백미는 삼신봉에서 연하봉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바라 보는 천황봉의 원경과 뱀처럼 길게 이어지는 길의 풍요로움 이었다. 흰 구름을 배경 삼아 수 백 년을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구상나무 고사목을 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 이었다.
산행을 마치고 드는 생각은 지리의 품은 넓었으며, 깊고 후미진 계곡과 아늑하고 풍요로운 능선은 왜 이곳이 산사람의 로망인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