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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초천(蔓草川)은 무악(毋岳)에서 발원한다.
이 물길은 옛 서대문형무소와 서소문처형장
서울역 뒷녘과 청파로,원효로와 용산전자상가
도로, 용산역을 지난다. 그리고 새남터중죄인
처형장을 거쳐 한강과 합류하는 만초천이다.
만초천이란 이름은 이 냇가에 만초(덩굴져서
뻗어나가는 풀)가 무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만초천의 유로는 연장 7.7km이다.
넝쿨내 무악천 갈월천이라고도 불렀다.
고려 말의 학자 목은 이색은 용산을
지나다가 그 산마루에 올라 강과 산이
잘 조화된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시를 엮고 '용산팔경(龍山八景)'을 꼽았다.
청계산의 아침 구름(淸溪朝雲):
관악산의 저녁 안개(冠岳晩霞)
만천의 게잡이 불빛(蔓川蟹火)
동작나루에 돌아오는 돛배(銅雀歸帆)
밤섬의 지는 해율(栗島落照)
흑석동으로 돌아오는 스님(黑石歸僧)
노량진의 길손(露梁行人)
사촌(새남터)의 저녁 경치(沙村暮景)
이색이 용산 팔경으로 뽑은 만천해화(蔓川蟹火)는
만초천(蔓草川)의 게잡이 불빛을 말한다.
이경전의 눈썰매 이야기에서 마치 은하수
같다고 표현한 용산의 불빛 풍경이 바로
만초천의 게잡이 불빛이다.
당시 한양을 동서로 가르는 청계천만큼
이나 긴 하천이 바로 만초천이다.
1957년 복개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
이 만초천 유역은 바로 한양도성
서쪽 음기가 서린 곳이다. '골로 간다'는
말을 상징하는 고택골이다.
이 물길은 무악에서 출발해서
남진한다. 오른쪽에는 일제가
만든 서대문형무소가 자리한다.
지금 서대문독립공원이다.
서대문독립공원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과 3.1독립선언기념탑, 독립관
(모화관, 현충사), 순국선열추념탑,
이진아기념도서관, 서재필동상,
독립문, 영은문 주초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역사관이
되어버린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국권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1908년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경성감옥’이
그 시작이다.
1945년까지는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운영되 면서 민주화를
염원하던 많은 인사들이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다.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다.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로이
문을 열었다.
조선시대 소의문(昭義門) 밖은 죄인을 처형하던 곳이다.
소의문 밖은 죄인을 처형하고 시체 등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음기가 센 곳이다.
소의문 코앞인 만초천 백사장은 태종 16년(1416년)
처형장으로 지정된다. 그 후 신유박해(1801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황사영 등 100여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돼 천주교 성지로 지정됐다.
이곳에서 망나니 칼날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처형되면서 음기가 드센 터라고
구전(口傳)되고 있다.
만초천은 서소문을 지나 용산(龍山)을 동쪽을 감싸면서
용산미군기지를 관통하고 있다. 용산(龍山)은 산세가
용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본래는 만리동
고개로부터 마포로 뻗은 지맥의 남쪽 기슭을 가리켰다.
하지만 현재는 남산에서 한 강으로 남서진한 지맥까지
포함한 지역을 일컫게 됐다.
용산은 풍수상 남산과 안산을 두 개의
주산으로 삼은 '쌍용쟁주형(雙龍爭珠形)'
의 명당에 해당한다. 용산기지는 남산을
주산으로 삼은 용맥에 속하며, 이곳의
지맥은 몸을 땅 속으로 감춘 채 잠을
자는 지룡(地龍)으로 힘이 여러 가닥으로
분산돼 기세가 미약 하다.
여기에는 용산가족공원,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시설이 들어서야 땅의 성격과 부합된다.
이곳에는 현재 미군기지, 국방부 청사와
같은 군사시설이 넓게 자리잡 았다.
이것은 안정되고 편안한 땅의 성격과도
맞지 않고 마치 용의 머리에 총을 겨눠
용의 승천을 위협하는 식이다.
“왜인들이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구역에 멋대로 점(點)을 쳐서 군용지라는
푯말을 세우고 경계를 정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번번이 군용지라는 명목으로
땅을 빼앗아 갔다.”
구한말의 황현이 ‘매천야록’에 남긴 글이다.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1906년 용산에
2개 사단 규모의 조선주둔군 사령부를 설치해
무단으로 사용하던 시기의 일이다.
일제는 패망할 때까지 이 기지를 운영했고
1945년 광복이 된 후 그 자리에 미군이 주둔했다.
그 이전에도 용산은 외국군과 인연이 깊었다
.13세기 고려를 침입한 원나라 군대는 용산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16세기 임진왜란 때는
왜군과 명군이, 19세기 임오군란(1882년) 때는
청나라 군대가 주둔지로 이용했다.
용산은 북으로는 남산을 머리에 두고
남으로는 한강을 바로 앞에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 터다.
군인들도 이 점을 주목했다.
용산에 본거지를 틀면 남산의 보호막
아래 안전을 도모하면서도 언제든지
수도 서울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다.
또 한강이 가까워 수륙(水陸) 양면으로
물자 보급과 병력 이동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현재도 용산 미군기지에는 길이 300m 남짓한 만초천이 흐르고 있다. 이처럼 만초천은 남산과 한강을 직접 이어주는
혈맥(血脈)이었다. 용산은 경제적으로도 이용 가치가 큰 땅이었다. 조선시대 때 용산은 인근 마포와 함께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로
주목받았다. 조운선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세곡과 진상품을 보관하는 풍저창(豊儲倉),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자감의 강창(江倉·원효로3가), 빈민 구휼을 위한 진휼청 별고(別庫·원효로4가) 등이 용산에 설치돼 운영됐다. 이로 보면 용산은 권력과 돈을 모두 갖춘 부귀쌍전(富貴雙全)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용산역에서 전자랜드쪽 구름다리를 건너서 전자상가를 지나
e-편한세상 아파트 쪽을 향하다보면 신계역사공원 표지판이
보인다. 만초천을 끼고 있는 역사공원이다. 바로 용산 당고개
순교성지가 자리한 곳이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원래 사형장은 아니였다.
당시 피 냄새가 설 연휴 대목 장사에 방해된다는
상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당고개 순교성지에서
총 아홉 분의 성인(박종원, 홍병주 · 홍영주 형제
,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이문우, 최영이)
과 한 분의 복자(이성례)가 순교하였다.
특히 어린 자녀를 박해와 병으로 잃은 어머니들이
순교를 하신 곳이라 '따뜻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성지라고 한다.
한국에서 순교자가 세번째로 많이 배출된 장소로 용산전자상가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인 작은 언덕에 있다.
기해박해 때인 1839년 12월 27~28(음)일 이틀 동안 천주교 신자 10명이 처형당한 곳이다. 그 중에 아홉명이 천주교 성인으로
기려지고 있다. 최경환 성인(1839년 기해박해시 순교)의 부인이며 우리나라 두번째 사제였던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해박해 당시 이성례 마리아는 마카오로 유학을 가 있던 맏아들 최양업 신부를 제외한 다섯 명의 자식들과 함께 옥에 갇혔다. 부모와 함께 어린 아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맏아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외국에 유학 가 있던 이
집안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용도 베풀어지지 않았다.
결국 당시 세살짜리 막내가 빈 젖을 빨다가 옥에서 굶어죽고 말자 이성례 마리아는 나머지 네 명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일시 배교하고 옥을 나간다. 하지만 곧 아이들이 동냥 나간 사이 스스로 다시 옥으로 돌아와 갇히게 된다. 6세에서 15세까지의
네 형제는 부모들이 갇혀있는 옥에 찾아가면 자신들 때문에 부모들이 배교할 것을 우려해 동냥을 해가며 살아간다.
그 후, 어머니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가지고 희광이(사형 집행인)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어머니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단칼에 베어줄 것을 부탁하고 이에 감동한 희광이는 밤새 칼을 갈아 그 약속을 지켰다.
이렇게 순교한 이성례 마리아는 일시적이나마 배교한 사실때문에 성인으로 시성되지 못했다.
이러한 애절한 사연과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전망 때문에 당고개 성지는 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순교성지이다. 주변에 한국형 성당이며 순교 성지인 새남터 성당과 용산가족공원 등이 인접해 있다.
효창공원에서 남쪽으로 뻗어 가는 산줄기가 한강 용산강에 이른다.
그 용맥의 끝을 맺으니 바로 그곳을 용산(龍山 79미터)이다. 풍수상 용두(龍頭)에
해당하는 이곳 용산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초여름 한강에서 용 두 마리를 보았다.(夏四月,二龍見漢江)"
무악을 빠져나와 이곳까지 이른 용산의 기세는 오늘날 용산구의 뿌리이기도 했다.
만초천 근처의 효창공원은 예로부터 연화봉(蓮花峰)으로 불려졌다.
용산을 대표하는 동명은 용문동(龍門洞)이다. 용산의 용두(龍頭)에서 용(龍)자와 옛 마을 동문리(東門里)에서
문(門)자를 따와 만든 용문동이다. 용산구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용문동이다. 동문리는 용두동에서 불 때 동쪽입구
마을이라고 풀이한다.
풍수학자 장영훈은 용산은 외인지지이며 외세지지(外勢之地)라고 규정한다.
"임진왜란을 거쳐 구한말과 식민시대 때는 일본군 주둔지였고 6.25전쟁부터는 미군주둔지로 정착하여
오늘날까지 외세지지를 고수하고 있다. 외세지지가 무력지지(武力之地)로 요동을 쳤던 시절도 있었다.
이러한 무력지지 기세는 식민시대 용산 신도시 계획 때부터 형국론으로 들어났다, 일본이 용산 일대를
사용한지 15년 후인 1910년 제작한 용산시가도 지도를 보면 부설한 철도와 도로를 외곽으로 삼고서 그 안에
일본군 병영과 일인 거주지를 두었는데, 그 모양이 군화형국이다. 조선인은 군화로 밟아야 한다는 저들의
식민정책과도 맞아떨어지 식민풍수 형국론도 된다. 무력지지 형국은 대한민국 수립 후에도 되풀이 된 무력지세의
현장이기도 했다."-장영훈의 책 <서울의 풍수> 234쪽에서 236쪽에서
만초천은 남쪽 끝자락에서 한강을 만난다.
그곳은 기(氣)가 드센 곳으로 유명한 새남터이다.
새남터는 억새와 나무가 많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새남터는 한강의 모래사장으로, 풀과 나무를 의미하는 새나무터에서 유래한다.
한양도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한자로 음역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 군사들의 연무장이며 국사범들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1846년 김대건, 주문모 등의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순교한 장소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순교 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이 지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이다.
처음으로 이 땅에 들어왔던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신부, 聖샤스탕 신부, 기해일기의 저자 현석문 가롤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 알렉시오,
김면호(혹은 계호) 토마스, 김원익 바오로 등이 순교하였다.
이들 가운데 모두 열한 분의 순교자들이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성하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한국천주교회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1956년 이 거룩한 땅을 매입해서 ‘가톨릭 순교성지’라 새긴 현양비를 세웠다.
노들섬은 여의도 동쪽에 위치하고 한강대교가 통과하는 타원형의 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 302번지. 면적은 1만 6,000평이다.
본디 노들섬은 거대한 모래밭이었다. 풀등이라 불리는 거대한 모래언덕이 있었고,
그 언덕에는 물웅덩이와 갈대숲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물맛이 빼어난 우물이 있었다.
이 물은 물맛이 좋아 왕궁에 바쳤다. 모래가 많아 이 일대 마을을 ‘모래밭 마을’, ‘사촌’이라 불렀다.
특히 모래밭 쪽으로 지는 노을이 매우 아름다워 용산 8경 중 하나로 꼽았다.
조선시대 모래섬은 현재 여의도보다 규모가 더 컸다.
모래성이 높아 한강 물이 마을로 넘쳐나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모래언덕에 다리 높이만큼 흙을 쌓아 올렸다.
그래서 일제는 중지도(中之島)라고 불렀다. 모래섬 안쪽은 이촌동 주민들이 땅콩농사를 지었다.
바깥 강 안에서는 물놀이와 노를 저으며 고기 잡는 사람들로 붐볐다.
1917년 이촌동과 노량진을 잇는 한국 최초의 철제로 된 인도교가 설치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조선 말기까지도 모래벌판이었던 그곳에 마을이 들어선다. 한강변 좌우에 위치한 이촌동(二村洞)이다.
강 가운데 사는 이 마을사람들은 여름에 큰 장마가 지면 홍수를 피해 강변으로 옮겨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 네 이름이 이촌동(移村洞)으로 불리다가 일제 때 이촌동(二村洞)으로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지역은 본래 사평리진(沙平里津) 또는 줄여서 사리진(沙里津)이라 했다.
속칭 사리, 사촌, 사촌리, 사리마을이라 했다. 전에는 이촌동을 동부, 중부, 서부로 구분해서 호칭함에 따라
중부이촌동을 새푸리 마을로 불렀으며 이곳에 있던 나루는 1925년 대홍수 때 없어졌다.
한양은 어디를 가나 물을 볼 수 있는 도시였다.
인왕산에서 흘러온 물이 청파역 부근에선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만나 큰 하천이 되었고 이것을 용산강이라 불렀다.
태종은 집권 초반 인왕산 옥류천에서 한강으로 흘러가는 이 만초천을 기초로 운하를 계획했다. 그때 만약 한강에서 서울역까지
이어지는 운하가 건설되었다면 오늘날 서울의 모습은 참 많이 변했을 듯하다. 그러나 이름에서 보여주듯 덩굴 등이 어지럽게 널린
만초천을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운하로 만들려면 약 만 명이 동원돼 1년 동안 공사를 해야 하는데 당시 태종 초기에는 창덕궁을
비롯해 여러 관청 등 도시 기반 공사를 하느라 도저히 여력이 없었다.
“마땅히 경기의 군인 1만 명, 경중(京中)의 대장(隊長)·대부(隊副) 4백 명, 군기감(軍器監)의 별군(別軍) 6백 명,
모두 1만 1천 명을 징발하여 양어지(養魚池)를 파고, 숭례문(崇禮門)밖에 운하를 파서 주즙(舟楫 : 배) 을 통행하게 하소서.”
조선왕조실록은 태종의 최측근 좌정승 하륜이 용산강에서 숭례문 앞 남지(南池)까지 운하를 파자고 올린 내용을 기록했다.
태종은 대궐로 하륜 등 신하들을 불러 이 운하문제를 논의했다.
“우리나라의 땅은 모두 사석(沙石)이므로 물이 머물러 있지 않으니, 중국의 운하를 판 것을 본받을 수는 없다.
명일 내가 장차 면전에서 의논하겠다."
하루 전날 운하문제를 한번 신료들과 본격적으로 검토하여 보겠다는 뜻을 먼저 제시한 것이다.
그 다음 날은 운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와 함께 신료들의 의견을 구하고 있다.
"용산강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 돛을 달고 다니게 할 수만 있다면야 그런 꿈같은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허나 과인이 직접 땅의 흙을 집어 살펴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아보니 우선 모래 땅이라 물이 늘 고여 있지 못할 것 같소.
그래도 무릉도원같은 몽상적인 대역사를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시작해야 옳은가?"
"....."
전날에 이어 이번에도 태종은 지리적 이유를 들어 소극적 입장을 펼쳤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태종이 소극적인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신들이 “가(可)합니다”라고 답변했다.
할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좌정승 하륜이 대신들을 상대로 사전작업을 단단히 해놓은 모양이다.
"경들의 고집을 논리적으로 자세히 말하여 보오."
태종은 그치밀한 질문과 함께 하륜 등에게 재차 다그첬다.
신료들을 서로를 처다 볼 뿐 아무 대꾸를 못하였다.
그제서야 여짓거리고 있던 의정부 찬성사 유양만이 나섰다.
"용산강이 도성 가까이 있는 데 굳이 백성들을 고생시킬 필요가 있사옵니까?
용산강은 오늘도 돛단배들이 왕래하고 있아옵니다."
이에 맞서 조선 최고의 건축가 의정부 지사 박자청이 의견을 말하였다.
"전하!용산강에서 숭례문까지 의 땅은 모두 논이라 물은 틀림없이 새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땅을 파는 공력도 1만 정도면 불과 한 달 일을 넘기지 않을 것이오니
한번 시작하여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되옵니다.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대역사이오니 재고해 보소서."
"알았으니 물러들 가시오."
태종은 끝내 용산강에서 숭례문까지의 운하계획을 물리첬다.
“상께서 인력 동원의 어려움을 깊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안이 멈추었으며 실시되지 못했다.(深知用力之難, 故事寢不擧)"
태종실록이 고 전하고 있는 내용이다. 아직 민심을 확보하지 못한 국초의 조선으로서는 그 같은 대규모 공사를 실시하는 게
무리였던 것이다.
태종은 공론에 붙여본 끝에 결국 운하건설안을 백지화시켰다.
첫째 모래 땅이라 물이 차지 못할 것,
둘째 중국의 운하를 판 것을 본 받을 수 없고,
셋째 백성이 어려운 지경이고 더 이상 괴롭혀서는 안 된다
이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서 운하게획을 거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