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사단 신남법회 110501]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부처님이 주신 선물]
며칠이 지나면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을 환영하고 기뻐하고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법우님 오신 날'은 언제입니까? 법우님 오신 날도 있습니다. 법우님 오신 날에는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법우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을 환영하고 기뻐하고 기념하고 축하합니다. 하지만 '법우님 오신 날'은 달력에 표시되지 않습니다. 공휴일로 지정해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나누도록 되어있지 않습니다.
왜 '법우님 오신 날'은 다 같이 기념하지 않는데 '부처님 오신 날'은 공휴일로 지정하고, 다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법우님은 오셔서 법우님 가까이 몇몇 분들에게 기쁨을 선물했다면, 부처님은 오셔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큰 선물을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만도 수억 명의 사람들이 부처님 덕분에 행복해 하고, 부처님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지난 2600년 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덕분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법회에서는 부처님이 주신 선물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그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부처님 오신 날을 진정으로 환영하고 기뻐하고 기념하고 축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주신 선물은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의 이치일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바로 알고 이치에 맞게 살면 행복할 것이고, 잘못알아서 이치에 어긋나게 살면 괴로울 것이라는 당연함에서 세상의 이치라는 선물은 행복 그 자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선물하신 세상의 이치는 어떤 것입니까?
저는 두 가지로 그 선물을 이해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보(報)의 원리입니다. 그간의 설법을 통해 모두들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착한 행위에는 행복한 결과가 따르고 악한 행위에는 괴로운 결과가 초래됩니다. 그리고 과거의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는 지금 나의 삶에 괴로움이든 행복이든 영향을 미칩니다.
부처님은 소금덩이의 비유를 설합니다. 한 줌의 소금을 작은 그릇의 물에 던져 넣으면, 그 물은 짜가워져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줌의 소금을 한강 물에 던져넣으면, 그 물은 소금의 영향 때문에 짜가워지지 않습니다. 한 줌의 소금은 과거의 행위에 의해 초래된 영향력이고, 물은 지금의 행위를 말합니다. 과거의 행위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소금의 양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현재의 행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어떻게 행위하는가에 따라 물의 양은 적어질 수도 있고 많아질 수도 있습니다. <소금덩이 경(A3:99)>
부처님은 또 메추라기의 비유를 설합니다. 낡고 다 삭은 노끈이 있는데, 작은 메추라기 한 마리가 이 낡고 다 삭은 노끈에 깔렸습니다. 그런데 메추라기는 낡고 다 삭아 보잘 것 없는 노끈에 눌려 벗어나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아주 강하고 질긴 노끈이 있는데, 왕의 코끼리가 이 노끈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왕의 코끼리는 힘찬 몸짓으로 이 강하고 질긴 노끈을 끊어버리고 제 갈 길을 갑니다. 노끈은 과거 행위의 영향력이고, 메추라기와 왕의 코끼리는 지금 그대의 삶입니다. 지금 그대의 삶이 초라하면 아주 작은 과거 행위의 영향력에도 묶여서 큰 고통을 당하게 되지만, 지금 그대의 삶이 무량(無量)하면 과거 행위의 영향력이 아무리 크다해도 그대의 삶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메추라기에 대한 비유의 경(M66)>
과거 행위의 영향력은 업장(業障)입니다. 지금의 행위, 지금의 삶을 무량하게 만드는 방법은 오계(五戒)와 보시(布施)와 수행(修行)으로 구성된 세 가지 공덕행입니다. 계를 지키지 않고, 보시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는 삶은 그대의 지금을 작은 그릇에 담긴 물처럼, 작은 메추라기처럼 초라하게 만듭니다. 이때 업장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대의 삶을 치명적으로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오계를 지키고, 보시에 힘쓰고, 열심히 수행하는 삶은 그대의 지금을 한강 물처럼, 왕의 코끼리처럼 무량하게 만듭니다. 이때 업장은 아무리 거대한 것이라도 그대의 삶, 그대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업장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고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업장소멸(業障消滅)의 바른 방법입니다.
보(報)의 원리는 이렇게 업장소멸로 이어집니다. 현명하게, 세 가지 공덕행으로 무량하게 살아가는 그대, 법우님에게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법회에서는 법당을 가득 메운 병사법우님들과 함께 큰 소리로 외쳐 보았습니다. '과거는 작은 것입니다! 현재는 큰 것입니다! 과거는 작은 것이고, 현재는 큰 것입니다!'
부처님이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은 '중간의 것[중(中)]'입니다. 나와 나 아닌 것들 사이에 중간의 것이 끼어있는 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워 죽겠는 저 인간이 본질적으로 미워죽겠을 존재는 아닙니다. 예뻐 죽겠는 저 사람도 본질적으로 예뻐죽겠을 존재는 아닙니다. 나에게는 미워죽겠는 저 인간도 누구에게는 예뻐죽겠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예뻐죽겠는 저 사람도 누구에게는 미워죽겠을 인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본질이 그러한 것이 아니고, 다만 나에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기에, 보는 내 마음이 바뀌면 내게도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인식의 문제입니다. 내가 인식하기에 따라 그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인식합니까? 우리가 그의 본질을 인식하는데, 우리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보는 나와 보여지는 그 사이에 중간의 것이 있다고 합니다. 중간의 것이 어떤 상태로 끼어드느냐에 따라 그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들 아시겠지만, 이 중간의 것이 욕심-성냄-어리석음[탐진치(貪嗔癡)]입니다. 욕탐(欲貪)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이 보여지는 그와 보는 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중간의 것에 의해 왜곡된 그의 인상[상(相)-nimitta]을 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부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까? 우리의 삶이 괴로움이기 때문입니다. 미워죽겠는 저 인간 때문에 내 삶이 괴로운데, 만약 미워죽겠는 모습이 그대로 그의 본질이라면, 그와 함께 하는 삶은 미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이라는 어떤 것이 본래는 미울 턱이 없는 그와 나 사이에 중간의 것으로 끼어 있다면, 현명한 사람은 그 중간의 것을 제거하여 밉지 않은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의 창조입니다.
예뻐죽겠는 저 사람 때문에 내 삶이 기쁜데, 만약 예뻐죽겠는 모습이 그대로 그의 본질이라면, 그와 함께 하는 삶은 언제까지나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여유롭지가 못합니다. 예쁜 그가 미워지기도 하고, 그가 늙고 병들고 죽을 때 괴로워집니다. 그런데 예쁨이라는 어떤 것이 본래는 예쁠 턱이 없는 그와 나 사이에 중간의 것으로 끼어 있다면, 현명한 사람은 그 중간의 것을 잘 관리하여 그의 변화 마저도 수용하며 언제나 예뻐죽겠는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이 오래 지속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예쁨 마저도 중간의 것이고, 더 큰 행복에 장애되는 줄 알아 제거하는 것이 궁극의 행복, 궁극의 목적이라는 것도 참고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꼿티따 경(S35:232)>에서는 나와 그가 그대로 족쇄가 되어 연결되어있다면[중간의 것 없이 직접 연결되어 있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지만, 나와 그가 아닌 욕탐이 족쇄이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처님에게도 눈이 있어서 형색을 보지만 욕탐이 없어서 마음이 잘 해탈하신 분입니다.'라는 말로써 '중간의 것에 의해 왜곡된 그의 인상[상(相)-nimitta]'이 아닌 그의 존재 자체를 보는 부처님에 대해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줄 알아야 합니다. 나와 그 사이에는 중간의 것이 끼어 있습니다. 그 중간의 것의 작용에 따라 미워하기도 예뻐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괴롭기도 기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간의 것이 제거되어 나와 그가 존재 자체로서 만날 수 있으면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기쁨도 사라집니다. 그 대신에 훨씬 훌륭하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 생겨납니다<여러 가지 느낌에 대한 경(M69)>.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고, 부처님의 제자들이 추구해 가는 목적입니다.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게 설하신 최초의 가르침에서 이 중간의 것을 제거하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선언합니다. 중도(中道)입니다.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가 바로 중도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선물이야 말로 세상의 이치입니다. 인류 역사상 부처님 말고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오직 부처님께서만이 발견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치인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 오신 날을 진정으로 환영하고 기뻐하고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한 주제로 진행한 오늘의 설법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함께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은 이러한 세상의 이치에 더하여 '나와 그'라는 존재의 실상을 바로 알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본질적 존재로서의 나와 그가 이런 이치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와 그 조차도 실상은 본질 없음 즉 무아(無我)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제 며칠 후면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뜻을 바로 아시어 행복한 날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해피[解彼 & happy] 하십시오!
원불사한국불교개혁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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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테라와다불교의 해피스님, 멋진 법문 입니다.!
부루나합장.
정확한 말씀 감사합니다
좋은법문 참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