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번암시문고에 쓰다〔御製御筆 書樊菴詩文稿〕
호걸스러운 기상으로 써 내려간 필력 굳세니 傑氣驅來筆力勍
그대의 초상화를 대하고 있는 듯하네 七分如對畫中卿
치달리는 곳에는 거센 파도의 기세가 있고 奔騰處有浪濤勢
비분강개한 때에는 비장한 내용이 많도다 慷慨時多燕趙聲
북극의 풍운은 만년의 계합(契合)에 빛나고 北極風雲昭晩契
창강의 갈매기와는 예전 맹약으로 미루었네 滄江鷗鷺屬前盟
호주 이후로 모범이 남아 있어 湖洲以後模楷在
다시 동산이 낙생영을 읊는 것이 기쁘구나 更熹東山詠洛生
신해년(1791, 정조15) 봄
[주1] 북극(北極)의 …… 빛나고 : 북극은 임금, 풍운(風雲)은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것을 가리킨다. 채제공이 58세 되던 해에 정조가 즉위하였으므로 만년의 계합이라고 한 것이다.
[주2] 창강(滄江)의 …… 미루었네 : 구맹(鷗盟)이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갈매기와의 맹약이란, 자연에 은거하여 갈매기를 벗삼아 지내겠다는 뜻이다. 창강은 특정한 강 이름이 아니라 맑은 강을 일컫는 일반명사로 사용되었다. 송(宋)나라 육유(陸游)의 시 〈숙흥(夙興)〉에 “학의 원망은 누굴 의지해 풀거나, 갈매기와의 맹약 이미 식었을까 염려되네.[鶴怨憑誰解, 鷗盟恐已寒.]”라고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서는 채제공이 노년에 은거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정조를 보필하기 위해 그 뜻을 잠시 미루어 두었다는 의미이다.
[주3] 호주(湖洲) : 채유후(蔡裕後, 1599~1660)로,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이다. 인조 대부터 현종 1년(1660)까지 벼슬하여 예조 판서, 이조 판서, 대사간,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인조실록》, 《선조수정실록》,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저서에 《호주집(湖洲集)》이 있다. 채유후가 채제공의 종고조(從高祖)이기 때문에 정조가 언급한 것이다.
[주4] 동산(東山)이 …… 것 : 동산은 동진(東晉) 때 일찍이 동산에 은거했던 사안(謝安)을 가리키고, 낙생영(洛生詠)은 낙하서생(洛下書生)들의 시 읊는 소리가 무겁고 탁한 것을 가리킨다. 동진의 사대부는 대부분 중원(中原)의 구귀족(舊貴族)이었는데, 이들의 시 읊는 소리가 무겁고 탁했다. 《世說新語 輕詆》 사안은 본래 비염이 있어 시 읊는 소리가 탁하였으므로 그 소리가 마치 낙하서생이 시 읊는 소리 같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