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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은 1894년 7월~1895년 4월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을 배경으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벌어졌던 국제전이다.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했던 청군과 일군의 군사적 대립이 전면전으로 발전하며 발발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던 일본이 경복궁의 침탈과 강압으로 친일 내각을 구성한 후 청나라에서의 독립을 사주한데 이어, 7월 25일 아산 앞바다에서 일본해군이 청 해군을 격파했다. 이어, 평양성 전투와 황해해전에서 압승하고, 청나라의 랴오뚱 반도와 뤼순을 점령하면서 청군을 궤멸시켰다. 이 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으며, 일본은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어서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자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1905년 11월
덕수궁 증명 전에서 을사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을 근거로 한성에 일본은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초대통감이 되어 대한제국의 외교, 치안, 통상무역을 감독하게 되어 우리나라 국권은 허수아비가 된다. 이러한 일본 침략 전쟁에 항의하며 전국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물리치려 하지만 치안권력을 갖고 있는 일본 세력에게 저항에 한계가 있었다. 고종황제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던 제2차 만국평회회의에 이상설(李相卨)과 이 준(李儁)등에게 밀서를 보내어 국제적으로 대한제국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일본을 몰아내려 하였으나 일본의 훼방으로 실패하고 만다. 오히려 일본의 강요로 왕위를 순조에게 양위하고 말았다. 전국적으로 저항하던 대한제국 인들도 일본의 강압정책에 밀려 해외 만주, 연해주 등으로 옮겨 현지에서 민족해방 운동과 함께 전투를 치르게 된다. 1907년 만주 간도 지방과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 20여만 명이 동포들이 이주하여 살면서 천주교를 믿는 일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일에 앞장선 이가 바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이다.
고려말 원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자학을 전래해 온 안향(安珦)의 26대 손이다. 성균관 진사 안 태훈(安泰勳)의 맏아들로서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서문밖 백천 조 씨 어머니에게 태어났다. 2세 이후 부모를 따라 황해도 신천군으로 옮겨 살면서 부친에게 글을 배웠는데 신동이라 불리을 만큼 학습효과가 뛰어났다. 14세 때 모친의 뜻에 따라 당시 프랑스 성직자 웰헤름(Nicolas Joseph Marie Wilhelm. 洪錫九)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도마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부친께서도 한성에서 홍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홍신부를 황해도 신천군으로 모셔온 신부라, 안중근은 신부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프랑스 말과 신지식을 배우며 성장했다. 또한 사냥총으로 총 쏘는 방법을 익혀 총을 잘 쏘게 되었다. 홍 신부는 1860년 1월 24일 프랑스에서 출생,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한 후 1883년 2월 신품성사를 받아 신부가 된다. 그해 3월에 프랑스를 떠나 패낭 신학교로 가 교감으로 부임한다. 그곳 신학교에는 1881년부터 1884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유학 간 신학생이 21명이 있었고 1892년까지 공부를 하다 풍토에 맞지 않아 귀국하여 조선교구에서 세운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후 신품성사를 받았다. 홍신부는 그들과 5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하다가 조선교구로 1888년 배속되어 황해도 지방 전교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1894년 봄에 동학란이 일어나 관가를 습격하고 재물을 약탈하여 황해도까지 여파가 밀려왔다. 이에 부친께서 모은 수백 명의 의병대에 소속되어 관군과 함께 폭도들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그때 나이는 16세였다. 그 후 안중근은 한학을 익히고 우리나라 역사와 세계역사를 공부하며 20세가 되어서는 일본 배척 사상을 고취시키는 일간 신문을 읽으며 애국사상을 키워 나갔다. 이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눌러 1905년 을사조약을 맺고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보내는 것에 분노하여 부친의 허락을 받고 중국 청도, 상해 등을 다니며 구국의 길을 찾았으나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별세 소식을 접한 후 귀국하게 된다. 그는 교육에 뜻을 두고 홍 신부가 마련한 진남포 성당이 있는 진남포로 가 돈의 학교를 세우게 된다. 인재를 양성하고 강연회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켜 나갔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격분하여 한성으로 올라와 동지들을 규합하며 구국의 길을 역설하다 강원도로 가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한성에서 은방을 하던 우덕순이 의병을 일으켜 싸우고 있어 그를 의병대장으로 받들고 스스로 참모중장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고 무기를 사들였다.
저격 권총
저격당시 안중근 도마
1908년 7월에는 3백여 명의 독립군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慶興)으로 들어와 일본군과 교전하여 50명을 사살하고 회령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장을 공격하여 한때 그곳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반격을 당한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09년 3월 러시아 영토 가리로 가서 다른 동지 11명과 더불어 왼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 피를 사용하여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써서 각자 가슴에 품으며 맹세로서 다짐한다. 그해 10월 하순경에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제프의 하루빈에서 만난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그러한 정보는 하루빈에서 발행하는 요동보(寮東報)를 통해서였다. 때 마침 블라딕보스톡에서 우리말의 대동공보(大同公報) 신문을 발행하는 의병대장 우 덕순이 먼저 요동보 기사를 읽고 안중근에게 전보를 쳐 안중근을 불렀다. 곧 안중근은 우 덕순에게 달려가 말하기를 우리가 먼저 이등박문을 없애 버려야 한다. 하였다. 이들은 즉시 권총을 옷속에 품고 하일빈으로 가서 정세를 살피었다. 당시 그곳의 경비는 러시아 군대가 맡고 있었다. 하일빈에서 세탁업을 하는 강원도 원주 출신 조도선과 함께 10월24일 하일빈 남쪽 체가구역으로 가서 역장 러시아 군인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가 오는 26일 오전 6시 이곳을 통과하여 9시 정각에 하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파악한 안중근은 홀로 하일빈으로 가 정세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9시 30분 경 기적 소리를 듣고 달려 갔다 경비들은 이때 늦게 달려 온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막지 않았다.
안중근 도마 저격에 쓰러진 이등박문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이는 러시아 재무 대신 코코프체프와 함께 의장대를 사열 후 외교관들 사이를 걸어 나갈 때 안중근 도마는 군중 사이를 걸어 빠져 나와 이등박문 가슴과 복부에 총 3발을 쏘아 명중시켜 즉사시킨다. 그는 즉시 혈서로 적어 놓은 품 안에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독립을 외쳤다. 다시 또 러시아어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후 반항하지 않고 체포되었다. 우덕순, 조도선과 원산 사람으로 한 때 러시아 통역을 맡기로 하고 하일빈까지 갔다가 포기한 유동하외 9명의 동포들도 함께 체포되었다. 안중근 도마와 우덕순은 러시아 헌병대 사령부가 있는 장춘으로 압송되어 한 달 동안 억류된다. 그 후 일본 헌병대에 넘겨져 여순 감옥으로 이전되었다. 취조를 받은 후 혐의 없는 정대호외 16명은 석방되고 안중근 도마 등 4명만 재판을 기다리게 되었다. 안중근 도마의 의거 소식이 온 세계에 알려지자 우리 동포와 청나라 사람들은 감탄을 하며 안중근 도마를 돕기 위하여 앞장서게 된다. 그러나 일본 법원장이 지원하는 일본 변호사 변호만을 받으며 1910년 2월 7일부터 매일 재판이 열린다. 4번째 공판이 열린 날 검사는 안중근 도마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우덕순에게는 징역 2년, 조도선, 유동하에게는 징역 1년을 구형한다. 이에 대한 변론이 2월 13일 진행되었지만 2월 14일 재판장의 판결은 검사의 구형과 같았고 우덕순만 1년 형기가 늘어 모두 형이 확정된다.
심문받는 안중근 도마
한편 안중근 도마에게 세례를 준, 홍석구 신부는 여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면회를 가 위로하였다. 사형 판결이 내려지자 다시 찾아 가 교회법에 따라 종부성사를 주며 신자로서의 마지막 길을 가게 도와주었다. 안중근 도마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대한 독립과 동아민족들의 행복을 위하여 죽는다 라는 말을 남기고 한복으로 갈아입고 교수대에 올라 숨을 거두었다. 이러한 사실은 안중근 도마의 정신과 행동은 조선백성들의 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이에 반해 안중근 도마를 신부로서 도운 일을 조선교구장 뮈텔 민 신부는 정치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의견으로 징계처분을 내린다. 이에 홍신부는 교황청에 상소하여 자신의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소를 보낸다.
- 주님께서 부르신 한 인간의 영혼을 위로한 것이 어떻게 정치적인 행위인가? 종교와 정치문제의 한계는 외부로 나타난 일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안중근 도마가 일본에 대하여 역적죄를 지질렀다 하여도 그를 찾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의 행위는 그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닌가 ! 이런 일이 나의 조국 프랑스에서 났다면 그때에도 징계처분을 내렸을 것인가! 나는 안중근 도마의 영세 신부로서 종부성사를 줄 의무를 가진 신부인 것이다. - 이러한 홍신부의 변론은 교황청에서 3급 심리를 통하여 정당하다는 승소를 받는다. 이 사이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을 합병하고 조선총독부를 두고 무단정치를 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교구 내의 천주교는 크게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당시 신자수는 8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로마 교황청은 조선교구를 1911년 4월 두 개의 교구로 설정하게 된다 충청도 이북의 9도를 관할하는 경성교구와 경상, 전라 4도를 관할하는 대구교구로 분할 하였다. 황해도 지역을 사목과 전교를 담당하던 홍신부는 뮈텔 민 주교가 경성 주교 가 됨으로써 감독을 받게 되었으니. 징계처분을 내린 주교와 함께 근무가 불가능하여 본국 프랑스로 1914년 4월 22일 추방된다. 홍 신부는 프랑스로 가 81세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교적은 경성교구에 그냥 두고 있었다. 홍신부 다운 행동이었다.
한편 일본 제국주의 만행으로 나라를 잃은 민족은 애국운동과 함께 종교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하였는데 안중근 도마 의사의 영향도 많이 받는 현상이었다. 1911년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3천여 명이 늘어났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여 교황 비오 10세는 1911년 4월 8일 자로 조선교구를 서울교구와 대구로 나누어 서울교구는 뮈텔 閔 주교가 맡고 대구교구는 1906년 창간한 가톨릭 주간지경향신문사 사장 드망주 安(Demange) 安) 신부를 6월 11일에 주교로 승격시켜 관할을 하게 하였다. 이렇게 조선교회는 날로 발전하면서 1920년에는 242곳의 성당과 9만 명의 신자로 구성된 교회로 성장하게 도다. 조선교회는 또다시 서울교구에서 원산교구를 분리시킨다. 이미 독일에서 들어온 성 베네딕도 수도회(St. Beneddiet. 聖芬道會)의 사우에르(Sauer. 辛) 주교로 하여금 함경도와 간도지방을 포함한 교구를 만들어 원산에 본원을 두게 하였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뮈텔 閔 주교 요청을 받고 1909년 독일에서 입국하여 혜화동 동소문 성곽 아래에 광범위하게 잣골 토지를 매수하여 수도원을 세우고 직업학교를 세워 마차를 만들고 성당에서 사용할 제대 등 성물을 만들어 성당에 공급하다가 원산 덕원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이전하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 국내 입장이 있었는데 일본과 독일 관계관계가 악화되면서 총독부에서 모종의 압력이 생기는 등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보다 자세한 사실은 추후에 밝히려 한다. 원산 덕원으로 옮겨 간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신학교, 병원 등을 세워 지역사회를 개발하면서 1922년 7월에 원산교구에 포함시켜 관리하던 만주 연길교구를 분리한 후 스위스 출신 브레헤르 (reherb 白) 주교로 하여금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원산으로 이전하면서 남긴 혜화동 소재 건물과 학교 등은 파리외방전교회가 관리하고 있다가 후에 한국 천주교 서울교구에 편입시켜 신학교, 중고교의 교육기관으로 변모한 후 오늘에 이르게 된다.
또한 경성교구 뮈텔 閔 주교는 1927년 3월 17일 1923년 입국한 미국 메리놀(Mary Knoll ) 외방전교회 소속 번(Byrne , 方) 신부 관할로 평양대구목을 경성교구에서 분리시켰다. 뮈텔 주교는 기해교난(1839) 병오박해(1846) 때 순교한 순교자 79명을 복자위에 올린 결과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1일 로마교황으로부터 대주교 칭호를 받아 1931년 4월 최초 전국 주교회의를 경성에서 열고 천주교회 지도서를 개정하고 가톨릭 중앙 출판부를 만들고 운동부도 만들어 복음전파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1931년 대구교구 관할지역이던 전주지역을 최초의 조선인 감목대리구로 설정하였다. 또 그해 9월 26일 조선복자 축일에 일본 주재 교황사절단의 방문을 받고 경성교구 1백 주년 경축대회를 열었으며 요동 땅에 묻혀 있던 초대 주교 브뤼기에르 蘇 주교의 유해를 서울 용산 성직자 묘지로 이장하였다. 그때 즈음 일본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만주에 괴뢰 정부를 세운다. 그리고 1933년 1월 23일 43년간의 조선에서의 사목을 끝으로 80세로 선종하여 당시 부주교로 사목 중이던 라리보(Larriheau, 元亨根) 신부가 후임으로 선정된다. 이 당시 천주교는 경성, 대구, 원산, 연길 4대 교구와 평양, 해주, 전주, 3감 목대리구를 합하여 183명 성직자와 263명 수녀, 284명의 신학생, 7,600명의 신자들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로 교황청에서는 1937년 대구교구에서 광주교구를 분리시켜 1933년 조선에 진출한 성 골롬바노 (St, Slumban) 외방전교회 맥포린(Mepolin. 林) 주교로 하여금 초대 교구장으로 선출하여 사목 하도록 하고 1939년에는 평양교구를 주교구로 승격하여 미국 메리놀 전교회의 오쉐아(O' shea. 吳 주교를가 사목토록 하였다. 또한 경성 교구에서 춘천 감목대리구를 분리하여 성골롬바 전교회의 퀸란 구(Q'uinlan.具 신부를 초대 교구장으로 승격하고 원산교구를 함흥 교구와 덕원 수도원교구로 분리하여 독일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1941년 말까지, 프랑스 주교 관할은 경성, 대구 교구이고 독일 주교 관리는 덕원, 함흥, 연길교구이고 평양교구는 미국인 애란인교구장이 관리하며 더불어 광주, 춘천, 교구도 포함하여 관리하였다. 한국인 교구장이 관리하는 곳은 전주교구 하나였다. 9 교구에 5명의 주교와 4명의 교구장과 169명의 외국인 신부 139명의 한국인 신부 68명의 외국인 수녀 315명의 한국인 수녀와 279명의 신학생, 그리고 신자수는 18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대단한 성장 추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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