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진
- 통일이 오면 -
최원현
nulsaem@daum.net
아버지가 가신 지 어언 71년이다. 한 사람의 일생 길이만큼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흔적이 내겐 오직 사진 한 장뿐이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두 동료와 찍은 아버지의 누렇게 바랜 사진, 아버지는 그때 경찰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 돌 달에 돌아가셨다. 그러니 내게 아버지의 기억이 있을 리 없다. 뿐인가 동란 중 어머니는 친정인 나주에서 나를 낳았으니 그 긴박한 때에 아버지라고 나를 몇 번이나 보러 왔겠는가.
1945년, 해방이 된 기쁨도 잠시 나라는 둘로 나뉘어 한 순간에 오갈 수 없는 남과 북이 되어버렸고 그것도 잠시, 5년 후엔 동족상잔이라는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도 있을 수 없는 부끄러운 피 흘림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 전란 속 치안을 담당했을 텐데 전시였으니 전투가 더 중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목포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이기도 한 사진에서 내가 아버지를 빼닮은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래선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상상하는데도 큰 위안이 된다. 그러나 나나 아버지 모두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희생자였음은 분명하다.
오래전에 속초 청호동 아바이마을에 갔던 적이 있다.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 몸만 간신히 피해 나온 그들은 잠깐 그렇게 피했다 금방 돌아갈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 그 많은 세월이 흘러버렸음에도 언제건 통일만 되면 제일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상시 배를 준비해 놓고 통일의 날만 기다리며 산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세월이 30년 50년 60년 70년이 넘어버려 대부분의 피난 1세대들은 그 꿈을 이루지도 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고 이젠 자녀세대들이나 부모님의 뜻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얼마전 아내와 속초에 다녀왔다. 예정되어 있던 여행이 아니라 마음 가볍게 한 바퀴 돌아오자고 나선 걸음이었다. 그런데 속초엘 가니 아바이마을이 궁금했다. 마침 등대박물관에 오르게 되어 개발되어 변해버린 그쪽을 바라보니 마을은 없어지고 영업집인 듯싶은 몇 집만 보였다. 평일이어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지 갯배가 오가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년 전 이주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반대하던 모습을 화면으로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었다. 반백년도 훨씬 넘게 한 자리에서 살아왔으면서도 여전히 부초 같은 인생들이다. 뿌리를 내리고 살만도 했으련만 마음이 떠나온 고향에만 가있어 허락지 않았을 테니 마음속에 생겨나는 뿌리조차 잘라내곤 했으리라. 그래도 세월은 세월인지라 자식새끼 낳고 사는 동안 잔뿌리들이 생기고 그 뿌리들이 얽혀 마을도 이루게 하고 그렇게 서로 정도 붙이고 한 곳에 머무르게 된 삶이었다. 그럼에도 눈엔 오직 떠나오던 날의 고향만 아른거려 그 고향에 다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는 유일한 꿈과 희망으로 버텨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루지 못할 꿈으로 대부분이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자유로를 달려 임진각에 갔던 날 더 이상 갈 수 없는 다리의 이편에서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리본들을 보았다. 통일의 염원을 담은 글귀들이었다. 나도 그곳에 리본을 하나 달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들의 마음에 동조하는 것 같고 또 그래야 통일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올 것 같아서였다. 이 많은 염원들이 모였으니 분명 통일도 언젠가는 이뤄지리라. 그러나 분단의 역사는 너무나도 많은 슬픔과 아픔을 주었다. 영화 국제시장을 본 많은 국민들의 공감도 바로 그런 슬픔과 아픔과 절망이리라. 하지만 그것들을 딛고 넘어서 우린 새 역사를 열었다. 그게 우리의 힘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린 통일도 확신한다.
2023년은 분단의 역사 70년째이다. 그저 통일을 바라고 그려오기만 했지만 이젠 현실화 시킬 때도 되었다. 하지만 요즘 상황을 보면 더욱 요원하단 생각만 든다. 내 생전에 볼 수나 있을까. 그런데 막상 통일이 오면 나는 무엇을 무엇부터 하게 될까.
난 아버지의 묘소에 찾아가 묘를 없애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남은 육신도 훨훨 날려 보내드리고 싶다. 6.25라는 상흔이 우리 가족을 말살해 버렸다. 내가 그리움으로 평생을 가슴 아프게 살았다지만 핏덩이 같은 자식 하나 달랑 남겨두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 했던 부모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영혼은 떠난다 해도 남은 육신이 품어야 했던 안타까운 갈망에 결코 자유롭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래 두 분의 남은 육신이 흙이 되어버렸다 해도 그 흙이라도 태워 가볍게 해 훨훨 날려 보내드리고 싶음이다.
아바이마을 마지막 남은 피난 세대들이 고향으로 떠나는 걸 뜨거운 박수로 축하도 해 주고 싶다. 뿌리조차 내릴 수 없던 마음은 피멍으로 옹이가 되었겠지만 그래도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는 기쁨을 어디다 비할 수 있으랴. 그리고 임진각 더 이상 갈 수 없던 다리 앞에 묶여있던 수많은 리본들을 풍선에 달아 하늘 높이 날려주고 싶다. 그런 후 북으로 가는 기차를 열 번째쯤 타고 고향 땅을 찾아간 이들이 감격해 하는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 그러면서 내가 아는 이들의 귀향을 통일의 노래를 부르며 맘껏 축하해 주고 싶다.
분단은 둘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이면서 하나일 수 없는 숨막힘이요 아픔이요 슬픔이었다. 그 아픔과 슬픔의 세월 70년, 역사는 그렇게 세월이 되었고 세월은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세월과 역사 속에서 슬프고 고통스럽고 아팠던 사실들은 이젠 삶의 역사로 남겨져 오늘 속에서 진주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아는가. 오늘이나 내일이라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큰 힘이 우리가 그토록 소원하고 열망해 온 그 일을 너무도 쉽게 이뤄내 버리는 건 아닌지. 그럼 우린 제각기 자기 역할을 따라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내리라.
사진 속 아버지가 나를 아는 체 한다. 아바이마을로부터 쏜살같이 북쪽으로 향하는 작은 배가 하나 보인다. 건너 갈 수 없는 다리로 사람들이 너나없이 건너고 있다.
나는 카메라를 챙겨 그들 역사의 한 부분들을 사진으로 담기에 바쁘다. 오 통일이다. 비로소 온전히 하나가 된 우리는 감격으로 환호로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친다. 보드랍던 손이 거칠 대로 거칠어졌고 주름 하나 없던 얼굴엔 주름만 빼곡해도 비로소 맞이한 기쁨으로 삼천리가 마구 흔들리는 감격을 어느 누가 막을 텐가. 그 날 나는 목이 터지고 너무 울어 눈은 뻘겋게 충혈 되고 다리는 하도 걸어 힘이 빠져 있으리라. 그래도 기쁜 날 나는 뛰고 노래하고 춤추리라. 통일의 날, 분단 70년의 장벽을 허물고 남과 북의 사람이 하나로 손을 잡고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는 날 나는 카메라의 셔터를 마구마구 누를 것이다. 아버지의 한 어머니의 슬픔 그리고 내 그리움을 온통 풀어헤친 감격의 그날.
반명함판 크기의 누렇게 변한 사진을 들여다본다. 모르는 두 사람을 빼고 아버지 모습만 큰 사진으로나 초상화로 만들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 또한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세 분이 같이 있는 것이 그나마 더 서로 위안이라도 될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쏘아대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조차 둔감해져 가는 요즘인데 동강 난 우리 국토의 한 중앙에 살며 문득 70년도 더 지난 아버지의 빛바랜 사진을 보고 있는 내 마음은 그래도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최원현 nulsaem@hdaum.net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월간 한국수필 발행인 겸 편집인⋅재)국립세계문자박물관 이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역임),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현석김병규수필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펜문학상⋅대한민국예술문화공로상 수상 외,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누름돌》《고요, 그 후》등 18권, 문학평론집《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 중학교《국어1》《도덕2》중국 동북3성 《중학생작문》등에 수필 작품이,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등에 수필 이론이, 대입 모의고사 문제집 등에 수필이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