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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집회.
1장 1절-8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절-5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왜 물질세계를 만드셨을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다. 이게 물질계를 만든 목적인데, 이 성경을 보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이것만 알면 다 된 거냐? 구원은 그 폭이 매우 넓어서 하나님께서 물질계를 만든 것에서도 우리가 구원적으로 생각할 게 많다.
일반적으로 누구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을 준다. 그러면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걸 받을 때 어떤 마음이 드느냐? 고마운 마음이 든다. 감사한 마음이 든다. 사랑을 하면서도 뭔가를 주지 않는다면 자기가 사랑을 하는지, 안 하는지를 상대가 모른다. 줌으로써 받은 사람이 준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나오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목적으로 세상을 만들었는데, 믿는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들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고 싶어지는 거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천국은 물질세계보다 더 좋은 곳인데, 믿는 우리에게 물질세계를 주어서 우리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했는데, 이는 당신이 인간들로부터 영광을 받으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감사를 하게 되면 이 감사한 마음이 숙달이 되고 성장이 되는 것이니, 우리로 이렇게 되도록 해서 최고의 더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해서다. 즉 천국을 주되 그 세계를 마음 것 다스리고 통치하며 극치의 쾌락 가운데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서다.
인간 자기는 인격을 가졌는데, 인격자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그리고 인격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자기는 어떤 존재인지? 자기가 인격자로 존재한다면 인격적인 면에서 지혜지식성, 도덕성, 즉 선, 사랑, 거룩, 진실, 그리고 능력성, 즉 의와 주권 면에서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온전하게 자라야 하겠는데 우리가 이 면에 결여성이 많다. 지식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이 없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사랑을 하면 줄 줄을 안다.
그리고 줄 줄은 모르고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이 있고, 줄 줄도 모르고 받기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건 겸손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지 않겠다는 말이 되는 거다. 이러면 외톨이가 된다. 그런가 하면 자기는 받지는 않고 자꾸 주겠다고만 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이런 사람은 성격에 어떤 결함이 있는 거냐? 고집이 세고 자기 주관이 강한 거다. 인격자의 세계는, 사람의 세계는 인긴 간에 주고 받는 수수관계다. 서로 주어서 기쁘고 받아서 기쁜 이게 사랑의 사람이다. 거지들은 줄 줄은 모르고 받을 줄만 안다. 그러니까 이 거지는 죽을 때까지 거지다.
우리는 도덕성적인 면에서 이런 걸 잘 생각해야 한다. 지혜롭게 생각하지 못한다거나 폭넓게 생각하지 못하게 되면 쭈그러진 사람이 돼버린다. 사랑에는 부담성이 없는 거고 자유롭고 기쁜 거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의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말을 안 해 주면 남이 나의 속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의사소통이 안 되니 오해를 사는 일이 많게 된다. 인간은 이렇게 사는 게 아니다.
믿는 우리는, 사랑의 사람은, 축복의 사람은 남을 저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 그러냐? 성경에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게 있는데, 핍박을 하는 속에는 저주도 들어있고 악담도 들어있는 거다. 그렇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고 한다. 이 기도는 축복의 기도를 말하는 거고, 참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말하는 거다. 상대가 이 기도에 응답이 안 이뤄지면 그 축복은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거다. 이룰구원의, 진리신앙의 노선은 생명의 노선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입에 저주를 담으면 안 된다. 저주를 담고 있으면 네가 저주의 사람이다. 사랑이 결여다.
그러면 저주는 누가 하는 거냐? 내 입으로 저주를 내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아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람이 저주를 하니까 그 저주가 그대로 임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누구의 저주냐?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저주다. 그럼에도 아닌 말로 자기가 남을 저주한다면 자기는 저주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 자기가 저주받을 것이 많은데도 다른 사람을 저주한다면 그 저주가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저주에는 이런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한 면으로는 자기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좋은 것을 남에게 안 주면 받아야 할 그 사람에게는 저주가 되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의 것은 누가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데 주지를 않는다면 그걸 받을 사람은 저주가 돼버리는 거다. 사람이 죄악 세상에 빠져있는데 생명줄을 던져서 이 사람을 건져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대로 죽는 거다. 그러니 이 사람에게는 말하자면 저주가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 물질세계를 창조를 하셨는데,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단수가 아닌 복수로 표현을 했다. 복수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그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들어있는 거다. 즉 글자적으로는 우리 인간이 듣기에 하나님 한 분으로 되어있는데 그 안을 보면 성부 성자 성령님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자들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것을 보면서 그냥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산천초목 천체 모든 만물을 만드셨다’ 이렇게만 생각을 하고 만다. 물론 이방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조차 못하지만.
이방 우상치고 세상만물을 지은 신은 없다. 그러니 이런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한 거냐? 자기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만물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이방 우상까지 섬기고 있으니 얼마나 미련한 거냐?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다. 귀신도 하나님이 아니다. 귀신이 천지창조를 했느냐? 그런데 왜 귀신 우상을 섬기느냐? 이런 사람은 자기도 귀신처럼 사는 거다.
우리는 사람의 말로 귀신이 따라 붙을 그 어떤 근거를 자기 마음 속에 남겨두면 안 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런 우상성적 정신을 가지고서 점쟁이 집에 가 봐라. 뭐라고 하겠느냐? 분명히 ‘등에 누구를 업고 다니느냐? 네 등 뒤에 누가 따라온다’ 그럴 거다. 믿는 우리가 왜 그런 자들의 미끼가 되고, 그런 자들의 말에 코가 꿰여서 살 거냐? 그런 자들을 저주를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 수 있는 이 좋은 신앙을 가지고 왜 그런 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싹싹 손을 비비며, 왜 코가 꿰이고 정신이 꿰이느냐? 이건 못 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만드실 때 삼위의 하나님의 의지세계 속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마음을 깔아놓고 만물을 만드신 거다. 말이나 글로 표현은 안 됐지만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들기 전, 사람을 만들기 전 당신의 의지세계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바탕으로 하고, 근거로 하고 만물을 만든 것이니, 이 근거란 말하자면 수면 위에 하나님의 신이, 즉 성령님이 활동을 하신 걸 말하는 거다.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날까지 성령님이 역사를 안 하는 곳이 없다. 언제 어떻게 역사를 하시던 하나님의 신이 역사가 되는 곳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설계를 놓고 움직이는 거다. 그래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한 거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말해주는 거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 믿기 전의 인간의 마음을 가르치는 거다. 지금도 이방인들의 마음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는 상태로 있는 거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의 깊이를 말하는 건데, 사람의 마음의 깊이는 끝이 없다. 이런 상태의 마음의 깊이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공급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생명의 공급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지 이방인들의 마음속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하나님의 생명조달이 되는 것은 없다.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여기에는 이런 무한한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 건데 오늘날 기독자들이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만 아느냐? 왜 껍데기밖에 모르느냐? 기독자들아, 너를 위해서 세상을 만드신 그 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느냐? ‘천지창조 때부터, 네가 세상에 나기 전부터 내가 너를 생각하고 너를 위해서 세상을 만들었다’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느냐?
세상을 창조한 이 사실을 아담으로 성령에 감동 감화를 시켜서 기록케 한 것이 아니라 몇 천 년이 지난 후에 모세에게 기록을 하게 한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그 때 당시에 아담에게는 공책이 없어서 그랬느냐? 연필공장이 없어서 그랬느냐?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권으로 이렇게 하게 한 것이지만 또 한 편으로 생각을 해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종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받았느냐? 빛이 없이 살던 그 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생각해 봐라. 이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요, 구원의 손길도 없고 막막하고 캄캄한 상태였다.
이럴 때 하나님의 손길이, 성령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신의 역사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모세로 통해서 한 가닥의 빛이 되어서 내려왔다. 구원의 빛의 역사가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애굽의 고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끄집어 낸 거다. 이것도 일종의 창조다. 이런 이유로 해서 고난과 고통이 가장 극심했던 시대를 산 모세로 통해서 세상창조를 기록하게 한 거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절실히 깨닫게 하는 거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 모세로부터 사도시대까지를 합치면 근 4천 년의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건 환난 존재 활동을 4천 년 동안 자료를 모아서 성경에 기록케 해서 지금의 나에게 준 거다. 이 생각을 못하느냐? 어느 부모가, 어느 스승이, 어떤 훌륭한 사람이 나의 구원을 위해서 4천 년 동안 세상만물을 다 들어서 그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존재가 있느냐? 없다. 있을 수 없는 거고, 불가능이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다. 우리가 늦게나마 진리신앙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하신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자기의 마음 속에 영감성이 머무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다. 마귀의 역사는 이런 법은 없다.
‘혼돈’이 뭐냐? 혼돈은 무질서요, 제대로 놓인 게 없는 상태를 말한다. 있기는 있는데 뭐가 뭔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것도 혼돈이다. 뚜렷하게 아는 게 없는 것도 혼돈이다. 그러면 지금 땅의 세계를 쳐다보면 혼돈스럽느냐, 정립이 딱 되어 있느냐? 지상에서는 정립 정돈된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우리가 세상기준을 가지고는 세상을 정관할 수가 없다. 정확하게 볼 수가 없다. 세상기준을 가지고는 절대로 정립이 되지를 않는다.
세상은 절대 정확한 것은 없다. 하나님만이 절대 정확하다. 목사님이 절대 정확하냐? 목사님이 하나님이냐? 공부를 제일 많이 한 사람이 하나님이냐? 유명한 사람이 하나님이냐? 절대 정확하고 절대 공의로운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성경에 이것이 제시되어 있으니 성경을 보는 우리는 부정확하고 사이비스럽고 이단스럽고 거짓적인 것을 따르면 안 된다.
세상의 많은 지식은 정확도가 없다. 그래서 절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를 주신 거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절대 정확하고 공의롭다. 하나님의 것은 다 절대다. 이 절대성을 건드리면 네가 죽는다. 하나님의 절대성을 말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를 놓고 자꾸 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마치 물건처럼 돼버린다. 삼위일체를 말하기 위해서 세 잎 크로바니, 해의 본체가 있으면 이 해에서 빛이 나오고 열이 나오고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하려다 보면 이상하게 하나님이 물질 식으로 돌아가 버린다. 하나님을 말하려면 그 인격을 말을 해야 되겠는데 물질 시로 돌아가 버린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배우다 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의사성을 물질로 돌려서 축복의 개념을 물질로 생각을 하고 있다.
‘금’ 하면 세상에서 최고의 보화 보물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이 금은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다 통한다. 그러면 이 금이 천국에서도 최고냐? 천국에서 제일 좋은 게 뭐냐? 예수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그 천국에 갈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취하겠느냐, 하나님 한 분을 취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또 없애버리기도 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 분이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었고, 또한 예수로 통해서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는 분이신데, 우리가 이 분을 취하게 되면 최고로 좋은 것, 하늘나라에서 최고로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를 위해서 믿는 거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데, 이 두 분 중에 누가 나에게 오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편할까? 당신이 오시는 게 마음이 편할까, 아니면 아들을 보내서 당신 대신 죽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할까? 아버지가 직접 오시는 게 아버지의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우리들에게 보냈다.
그러면 아들을 보냈다는 말의 의미가 뭐냐? 말하고자 하는 뜻이 뭐냐? 왜 당신의 아들을 당신 대신 보내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게 한 거냐? 우리가 여기에서 그 분의 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거다. ‘아들’이라고 하면 천국을 상속받는 의미가 있는 것인데,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서 날 위해 죽게 했다고 할 때 보내신 그 분의 마음을 느껴봐라. 이걸 못 느낀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무뎌서 틀렸다. 그러면 어떻게 진정한 참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이기적인 사람이 돼버린다.
땅이 혼돈하고, 그 다음에 ‘공허’가 뭐냐? 텅 빈 것. 텅 빈 게 보기 좋으냐? 하늘에는 새가 날아다니고 구름이 떠 있고 한 게 보기가 좋다. 땅에 큰 집을 지어놓고 마당에 연못을 만들고, 이 연못을 그대로 놔두면 물이 썩고 모기가 생기지만 잉어도 키우고 분수도 만들어 놓고 하면 보기도 좋고, 모기가 연못물에 알을 까놓아도 붕어가 다 잡아먹으니까 모기가 새끼를 못 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계획하신 대로 우리의 구원을 근거를 하고 하나님의 신이 활동을 하니까 둘째 날, 셋째 날로 죽 가면서 점점 보기 좋은 세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몹쓸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의 활동이 들어가니 사고발상이나 언행심사 등 모든 것이 영적 활동 면에서 창조가 돼 나가는구나. 쓸모가 있게 되어 나가는구나.
성경에 보면 우리 주님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을 지나가면서도 보면 고쳐놓고, 귀신들린 자도 고쳐놓는다.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고쳐놓는다. 이게 진리의 역사고 성령님의 역사다. 이 정신이 구원운동이라. 이게 천국복음 운동이라.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게 아닌 거짓 것을 받고 이단성적인 것을 받은 마귀가 보낸 종들의 소리를 듣게 되면 진리이치를 못 깨닫고, 교회를 보면서 ‘이 교회는 예배순서가 다르구나. 주기도문도 안 하는구나. 그러니 이단이다’ 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예배를 드리다가 헌금시간이 되면 도망가 버린다면 이게 누구냐? 가룟유다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따랐고, 마가복음에는 주님의 제자요 사도라고 했다. 그러니까 가룟유다는 이방인들 속에서 찾는 게 아니라 교인 속에도 있고 사도 속에도 있는 것이니, 오늘날 가룟유다와 같은 정신을 가진 사람을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거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어느 신학교 총장이 신학생들에게 몇 억을 빌린 후에 갚지를 않아서 갚으라고 하니까 ‘내가 언제 너에게 돈을 빌렸느냐? 하나님께 헌금한 게 아니냐?’ 라고 했다고 한다. 이게 뭐냐? 이게 누구냐? 가룟유다다.
교회도 잘못 걸리면 그 교회 목사가 너의 충성봉사를 다 빨아먹고, 너는 신앙사기 다 당하고, 이용만 당하는 거지 말씀을 깨닫고 만들어지는 게 있느냐? 하나님께서 창조 첫 날부터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이미 뚜껑을 여셨는데 수 년 수십 년을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걸 몰랐느냐? 너에게는 성경이 없느냐? 너는 성경을 안 읽었느냐? 그러니 누구 탓을 할 거냐? 자기가 좋아서 자원적으로 충성봉사를 한 것인데 어느 법에 가서 걸 거냐?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이 창조 속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는 것도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는 이것을 먼저 생각을 하면 빛을 왜 만들었는지 그 답이 나오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생각을 못하고 빛을 만든 것부터 생각을 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빛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빛은 해와 달과 별빛이 아닌 무슨 빛이냐? 물질을 비취는 것처럼 표현이 되었지만 그게 아닌 하나님을 아는 빛이요, 말씀으로 된 빛이다. 다른 날에 만든 해와 달과 별빛은 따로 있는 거다.
‘하나님을 아는 빛’이라고 한다면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건 뭐냐? 하나님을 모른다면 ‘이 사람은 첫째 날에도 안 들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다. 하나님을 모른다면 ‘이 사람의 마음 속에 첫째 날의 역사도 안 돼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다. 안 돼 있으니 이 사람의 마음은 혼돈스럽고 공허하고 어둡고 생명적 조달도 없이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죽는 거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을 모르는 국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이들은 어둡다. 그럼에도 본인들은 이 사실은 모른다. 성경은 말을 하고 있는데,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자기는 이걸 모른다. 그러니 이런 딱할 노릇이 어디 있느냐? 그렇다면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예수 믿는 자기는 알고 있었느냐?’ 하는 면에서 한 번 생각을 해 봐라. 아마 거의가 본 절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연물을 창조하신 것만 알았을 거다.
자연물은 지구가 없어지면 다 없어진다. 하나님께서 첫 날에 뭘 만들었던 없어지는 것을 가지고 그걸 만드는 순서나 과정을 비유로 비사로 해서 영원히 가는 것, 영원히 가는 이치를 우리로 깨닫게 하시려는 거다. 그래서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때도 영원성이 아닌 임시성적인 것으로 전한다면 이건 하나님의과 의사 단일성이 아니다. 진리본질이 아닌 이질이다. 이걸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 이치를 모르면 목사님들이 어떤 말을 해도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이니 좋은 말을 하겠지’ 하게 된다. 아니다. 성경은 밝혀놓았다.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시대에 교회라는 이름이 없어진다. 이게 무슨 말이냐? 교회란 주님의 기본구원을 얻은, 즉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중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백성들을 말하는 건데, 그런데 이런 이름들이 없어진다는 거다. 이름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믿는다고는 하는데 믿음의 실상이 없다 그 말이다. 간판은 달려있는데 교인들의 마음이 전부가 세상성이라 그 말이다.
오늘이 설 명절인데, 아마도 이런 날 우리교회처럼 말씀잔치를 하는 교회가 거의 없을 거다. 그러나 설 명절이라고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일반세상에서 풍습 습관적으로 내려오는 윷놀이는 할 거다. 이런 곳에는 사람이 가득 찬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느냐?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시대에 여자가 해를 입고 있고 있다고 했는데, 말세의 모든 교회가 해를 입는 거냐? 아니다. 진리본질에 적중성으로 가는 성도가 해를 입은 여자인데, ‘예수님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듯이 극소수의 참 옳은 성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성도들이 세상으로 가는 거다.
계시록에 바벨론 음녀가 나오는데, 이건 교회를 말하는 거다. 교회란 교인을 말하는 거다. 이 교회 안에는 많은 왕들, 많은 장사꾼들, 많은 귀신의 떼들이 들어있는데 이게 다 불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이련 표현도 교회인 우리들이 자신의 신앙을 판단하라고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는 거다. 믿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런 게 깨달아져야 하는데 평소에 늘 듣고 생각하는 게 물질적 가치판단을 놓고 그 기준으로 움직였으니 이건 타락된 사람이다. 귀신들린 사람이다. 믿는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이 이방인들의 눈에는 멀쩡하게 보이겠지만 성령의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귀신들린 교회로 본다. 타락으로 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한 이 말씀을 성경 66권이 딱 받쳐주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성경구절을 해석을 해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목적에서 벗어난다면 이건 마귀가 파고 들 수 있는 허점이다. 성경 어디를 봐도 나쁜 사건이건 좋은 사건이건 다 하나님의 주권섭리와, 성도의 사랑과, 구원의 이치가 나오는 거다. 성경 어디를 해석을 할지라도 이게 받혀져야 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만일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이게 아닌 세상을 가지라고 가르친다면 어느 성경이 그걸 받혀주느냐? 하나도 안 받혀준다.
예수님 앞에 왔던 부자청년처럼 세상부자도 되고 천국도 갈 욕심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주님을 자기의 종으로 이용하는 사람이다. 주님을 자기의 종으로 삼은 거다. 이 이치를 아느냐? 교인들이 이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신앙 좋다. 열심 있다’ 이렇게 보는 거다. 이런 사람이 ‘나는 주님의 종이니이다’ 라고 할지라도 입술에 붙은 말일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자기가 주인으로 사는 거다. 자기의 소원 목적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세상 것이면 다 내버리고 주님의 소원 목적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주님의 자녀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로 통해서, 애굽 땅에서 아무 희망도 없이 어두운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말씀을 근거한 하나님의 신의 활동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임하므로 모세로 통해서 어두움에서 해방이 되어 나온 이것이 첫째 날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안 믿던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려고 교회에 나왔다면 현재 이 첫째 날을 경험을 했느냐? 예수로 말미암아 자기 속에 한 가닥의 구원의 빛이 내려왔느냐 그 말이다. 이게 첫째 날이다.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 속에서 세상을 만든 하나님의 신이 역사가 됐는지, 안 됐는지를 모르고 있다면 이걸 어떻게 하나?
자기가 처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암에 있었는데 말씀을 근거로 한 성령님의 활동의 빛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첫째 날을 맞은 자의 체험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빛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돌려서 말하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 이 사람은 빛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하나님의 신의 빛을 받은 예수 믿는 자기가 아직도 혼돈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자답을 해 봐라.
빛 앞에서는 다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빛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세상만큼, 하나님을 하나님만큼, 물질을 물질만큼 알게 되어서 정리정돈이 빨리빨리 들어간다. 내가 늘 말했지만 빛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다음에 인간, 인간 다음에 물질의 순서로 놓고 산다. 그런데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는 것은 말세의 교인들이 이걸 거꾸로 뒤집어서 물질 다음에 인간을 놓고, 하나님은 자기의 종으로 부려먹는다는 거다.
교회에서 사람을 많이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하기 보다는 교회에 들어왔느냐? 그렇다면 마음이 변화가 되어야 정화가 될 게 아니냐? 정화가 되면 이 사람은 앞에서 말한 정리정돈이 잘 되는 거다. 사람이 마음부터가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다면 어떻게 정리정돈이 되겠느냐? 오히려 자꾸 어질러 놓는다.
현재 예수 믿는 자기가 ‘예수 믿는 게 뭐가 뭔지 모르겠다. 구원이 뭔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뭔지 모르겠다’ 하면서 혼돈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느냐? 하나님을 아는 빛을 가진 교회의 인도자들은 교인들로 이걸 바로 알게 해서 신앙을 정리정돈을 시켜야 한다. 지극히 거룩한 것을 배우고 터득하는 교회 안에 세상 것을 가지고 들어오면 정리정돈이 안 되는 거다. 이런 교회는 굉장히 혼돈스럽다. 집사 장로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교회의 주인행세를 하며 막 싸움이 붙는다. 이게 혼돈이지 정리정돈이냐? 예수를 믿는 사람은 생각과 마음이 정리정돈이 잘 돼야 하는데 서로 붙잡고 싸운다면 이건 물질적 개념으로 들어가 있는 거다. 물질적 개념 속에는 돈이 들어있는 거다.
교회에서 특히 돈 때문에 싸움이 많이 생기는데, 재정을 관리하는 부서를 만들어서 통장은 재정관리 집사가 가지고 있고, 도장은 목사가 가지고 있고 이런 식으로 관리를 하는 것은 교인들 보기에 정직하게 한다는 의미다. 이걸 좋게 보면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직하게 하려는 거겠지만 교회가 꼭 이런 식으로 해야 만이 재정이 바로 관리가 되는 거냐? 이렇게 하면 우리의 구원 면에서 깨달을 것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에게 재정을 맡겼다. 차라리 만능의 능력자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면 부정도 없고 더 정확할 텐데 가룟유다가 돈을 좋아한다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왜 이 가룟유다에게 재정관리를 맡긴 것일까? 우리의 구원 면으로 깨달을 것이 없다면 예수님 당신이 다 하면 될 것인데 우리의 구원에 어떤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가룟유다에게 맡긴 거다. 천지만물이 다 주님의 것인데 코 묻은 헌금이 욕심이 나서 주님이 그 돈을 가지고 천국으로 달아나시겠느냐? 다만 우리들에게 구원적으로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가룟유다에게 재정을 맡긴 거다.
오늘날 가룟유다와 같은 정신을 가진 목사는 교인들 모르게 땅을 사놓기도 하고, 외국으로 돈을 빼돌리기도 한다. 이러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교인들이 힘들게 번 돈으로 헌금한 것으로 중동으로 성지순례를 가기도 한다. 아니, 성지순례를 안 가면 이 사람은 믿음이 없는 거냐? 그곳에 안 다녀온 목사들은 믿음이 없는 거고, 다녀온 목사들은 믿음이 있는 거냐? 이왕 그곳에 갔으면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속을 뒤집어 씻고나 오지. 그러니 교회가 뭐가 되는 거냐?
현재 자기가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 예수 믿기 전의 자기와, 예수 믿은 후의 자기를 비교해 보면 뭔가 다르냐, 똑같으냐? 똑같다면 빛의 역사가 없는 사람이다. 어둡다 그 말이다. 예수를 믿으면 밝은 빛이 비춰져야 하는 건데 진리의 빛의 역사가 없다 그 말이다. 빛이 없으니 깨달음도 없고, 옳은 것을 아는 것도 없고, 세상을 구하며 ‘주여 주여’만 했지 가치판단 평가가 안 나온다.
사마리아 성 수가 여인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단 둘이 예배를 드렸는데, 그 때 예배순서가 뭐가 있었느냐? 대화는 ‘물 좀 달라’ 이것뿐이었는데, 예수님이 그 물을 받아먹었느냐, 안 받아먹었느냐? 안 먹었다. 그러니까 물을 먹을 목적으로 그곳에 간 게 아니라 이 여자에게, 우리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려고 간 거다.
그 우물을 누가 판 거냐? 조상 야곱이 파서 준 거다. 계시적으로 영적으로 말하면 이 야곱의 신앙사상은 물질로 응답을 받고자 하는 물질적 신앙사상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얍복강가에서 모은 물질을 다 내어놓은 거고, 사람농사를 잘못 지어서 속을 얼마나 썩였느냐? 사람이 속을 썩일 때는 기가 뚝뚝 떨어진다. 살 의욕이 없어진다. 야곱은 물질성적 신앙사상임을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예배를 드리면서 밝혀준 거다. 이 물질성적 정신 사상이 예수를 믿은 후에는 바꿔져야 하는 거다.
첫째 날에 되어진 성령의 역사를 알겠느냐? 예수를 믿고 보니 첫째 날에서 빛의 자녀가 있고, 어두움의 자녀가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겠느냐? 인간은 과거적, 현재적, 미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이걸 밝히고 있으니 자기를 두고 판단을 해 봐라. 예수 믿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햇수가 늘어갈수록 점점 고상한 존귀 영광자가 되어가는 건지, 늘 그대로인지? 이런 면도 이어지는 창조에서 다 나온다.
6절-8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는 거다. 그리고 생각하신 대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어 놓았다. 사람이 나누어 놓은 게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주권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 주권은 절대다. 띠라서 하나님께서 나누어 놓은 것을 인간이 섞으면 안 된다.
그러면 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었을까? 물과 물이 있는데 왜 이 물을 나누어 놨을까? 같으니까 나눌까, 다르니까 나눌까? 다르니까 나누는 거다. 그러면 같은 물인데 다르다면 뭐가 다른 건가? 쓰이는 용도가 달라서 나누는 거다. 용도를 다르게 쓰려고 위의 물과 아랫물을 나누어 놓았다. 하나님께서 나누어 놨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 물이 근원적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을 깨우쳐 주려는 거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놓은 것을 인간이 들어서 ‘비슷하네. 똑같네’ 라고 해서는 안 된다. 비슷한 것은 똑같은 거냐, 서로 다른 거냐? 서로 다른 거다. 여기서는 비슷한 게 아니라 다른데, 근본적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거다.
그러면 물은 어디에 쓰는 거냐? 물로 자기의 몸을 깨끗이 씻는다. 더러운 물로 자기 몸을 씻는 사람은 없다. 이걸 영적으로 말하면 비진리를 가지고 사람의 죄가 씻겨지느냐? 안 씻겨진다. 오히려 더 더러워진다.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라. 자기의 생각에 따라 지옥과 천국이 나눠지는 거다. 그리고 물은 생물들을 기르고 살리는 데 쓴다.
그런데 인류 제 1차적 심판 때, 즉 노아홍수 때에 땅의 물을 솟아오르게 하고, 하늘 위에 있는 물을 퍼부어 버렸는데, 물을 들어 붓는 것은 그 분의 마음의 표현이다. 이렇게 들어 부을 때는 인정사정이 없다. 누가 조금 더 큰 죄를 짓고, 누가 더 작은 죄를 짓고 이건 볼 것 없다. 다 쓸어버리는 거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 놀러가서 왜 강가에 텐트를 치는 거냐? 그곳에 텐트를 치는 사람 중에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있고 적게 지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한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홍수가 나게 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걸 봐 주시느냐? 아무리 의인이라 할지라도 이치를 어기고 장마철에 그런 곳에 텐트를 치면 그냥 쓸려 내려가는 거다.
물은 위의 물이 깨끗해야 아랫물도 깨끗하다. 그리고 사람이 오염된 물을 먹으면 몸에 병이 든다. 영적으로 보면 교회 지도자가 바른 교훈을 주지 않으면 교인들의 신앙에 병이 든다. 그래서 물은 반드시 위의 물과 아랫물을 갈라야 한다. 진리교훈과 비진리 교훈을 갈라야 한다. 이치적으로 이걸 알겠느냐?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목사님들의 설교가 이치가 분명해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부터 생수가 내려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세상 운운’ 하거나 ‘종교적 일, 사역 운운’ 한다면 교인들이 이게 더러운 물인 줄을 알까?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주면 아래 것은 다 드러나는 거다. 가치판단 평가성이 높고 낮은 것,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다 나오는 거다. 그런데 교회의 교훈이 이런 것을 알 수 없는 가르침이라면 이건 빛도 아니고 더러운 물을 먹이고 있구나. 그러니 교인들은 썩은 정신을 가지게 되는 거다. 아무리 성경을 들고 말을 하고 유창하게 말을 할지라도 이치적으로 틀리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진리 생명수, 위의 물을 먹어야 하는데 이게 아닌 땅의 물을 먹으면, 영적으로 말하면 땅의 지식만 먹으면 그 다음에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 그 정신이 황폐해진다. 세상을 봐라. 이방 물질세상을 봐라. 그 이치가 다 틀렸다. 그러니 그 정신이 다 황폐해졌다. 예수를 믿으면서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둘째 날에 해당이 되는 사람이다. 둘째 날을 맞은 사람이다.
자기가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가지고 있으면 구별이 되는 거다. 뭔가를 하려고 하거나 뭔가가 되려면 먼저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구별이 안 된다면 이 사람이 이단을 아느냐? 영적으로 빛을 못 받은 사람이 이단을 아느냐? 이걸 안다면 이 사람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거다.
우리의 이 진리에 대해 이단이라고 해 봐라. 죽는지, 사는지? 공갈이 아니라 우리가 전에 우리 집 방에서 장애인들 몇 명과 다른 교인들 몇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니까, 그리고 우리는 명절이 되면 의례히 말씀집회를 하니까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서 하는 말이 방에서 예배하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했단다.
그러냐? 그러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 예배당부터 지어놓고 교회를 했느냐? 예배당이 교회냐? 예배당은 집일뿐이다. 살림하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곳이 교회다. 시골에서 사랑채를 내놓는다든지 해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게 교회다. 그리고 로마황제 때 교회에 대해 핍박이 얼마나 심했느냐? 산으로, 누구 집 다락방으로 다니면서 숨어서 예배를 드렸다. 이 때 교회간판을 달고 십자가를 붙이고 했느냐? 그래도 그게 교회가 아니냐? 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간판이 있었느냐? 그 때 십자가나 교회간판을 붙였다가는 금방 잡혀간다.
우리교회를 이단이라고 한 사람들 다 죽었다. 공갈 협박이 아니다. 예수를 핍박하니 어떻게 되었느냐?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소경이 돼버렸다. 주님의 부탁으로 주님을 믿는 성도가 안수를 해서 눈을 떴다. 교회를 볼 때 ‘간판을 달았다. 목사가 박사다’ 이런 걸 보는 게 아니다. 가슴에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그런 걸 보는 게 아니다. 교회를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예수 믿는 실속, 실상을 모르는 거다. 껍데기만 보고 사람을 논한다거나, 예배당 큰 것, 덩어리 큰 것을 가지고 ‘진짜다. 가짜다’ 해서는 안 된다.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시대의 큰 음녀 바벨론이 건물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안에 왕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얼마나 부자인지? 그럼에도 그게 진짜였느냐? 진짜인데도 하나님께서 그 바벨론을 다 불에 태워버린 거냐? 옳은 이치는 불에 타지 않고 영원히 가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