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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과 기원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시 104:24, 30, 33~34).”
하나님 아버지, 우리 영혼을 살려주시고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님되심을 감사합니다.
이시간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령의 기도
롬 8장 24-27절
그동안 로마서 8장을 통해
우리는 성령님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고
우리를 부활시키며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자녀의 특권과
능력을 갖도록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한 가지 더 말씀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실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내가 기도하지 못할 때
내가 연약하여 쓰러질 때
내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오셔서
나의 부족한 것, 나의 연약한 것,
나의 믿음 없는 것을 아시고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기에 합당한
최대한의 역할을
그분이 하십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구원이 임하면
성령이 내게 임하면
우리는 놀라운 소망을 갖게 됩니다.
구원은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것입니다.
구원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구원은 완전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제 거룩해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영광스럽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 완전하게 변하는 과정을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라는 말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얻은 사람은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얻기 전에는
꿈이 없었습니다.
미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면
놀랍게도 소망이 생깁니다.
꿈이 생기고
미래가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천국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땅만 보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의 구원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구원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보게 됩니다.
땅의 구원만이 아니라
하늘의 구원을 바라보게 되며
내세의 구원까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볼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것은 현실입니다.
그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소망이란
아직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들을 수도 없는 것이요.
내 손에 있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자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미래가 보입니다.
미래가 내게 다가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미래의 위대한 비전을 보게 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것이 느껴지고,
이것을 알게 되고,
이것이 보여 집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을 바라면
누가 바라겠습니까?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
현실일 뿐입니다.
진짜 소망은
감추어진 미래입니다.
그 미래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에스겔과 사도 요한이 보았던
바로 그 하늘나라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게 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기다리고 대망합니다.
예전에 미처 갖지 못했던 천국의 소망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소망
모든 악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들림을 받는 이 소망
현재 받는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이 위대한 환상과 기대와 꿈을
구원받은 모든 백성들은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기대와 소망과
미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더 이상 좌절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천인이 내 곁에서 넘어지고
만인이 내 곁에서 넘어진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똑바로 섭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소망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소망적입니다.
환경이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암에 걸렸다고 할지라도
죽음이 눈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
영원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얼굴에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있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고달프고, 외롭고,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눈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중에
부정적인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남을 비판하고 좌절하게 하지 마십시오.
내가 잘되지 않았어도
잘된 사람을 축복해 주고
격려하며 좋은 말을 해주십시오.
같은 말을 해도
단점이 아닌 장점을 이야기 하며
다른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같은 것을 이야기 하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일까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약속이 있는 소망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구원받은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지 못합니까?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제일 큰 적은
조급함입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쉽게 결정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의 응답도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아주 믿음이 적은 사람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다려서 얻는 것입니다.
성숙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축복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정말 소망이 있는 사람은
진짜를 얻기까지는
가짜를 취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적당한 사람을 취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시간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를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 속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구원은
소망을 갖게 되며
참된 구원은
인내를 갖게 됩니다.
이 인내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신자는 환난이 오면
고난이나 박해가 오면
눈이 빛나고
몸이 신나게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란은 인내를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인내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기다림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 손에 가진 것은 없어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없어도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 안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련이 없으면
인내가 없습니다.
고통이 없으면
인내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을 아십니까?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달콤하고’ 라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참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화도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한 남자가 있습니다.
한 여자와 결혼을 해서 같이 사는데
이 남자의 성격과 습관이 나쁩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당장 고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기다리고 참아주십시오.
그래야 그 사람이 변합니다.
그 사람이 좋아서 결혼 했다면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좋아서 결혼했다면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인내하고 참고 기다리면
축복이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구원받은 사람들은
소망을 가지고
인내와 기다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떤 역할을 하십니까?
나는 소망과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면서 참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는데
성령님은
어떤 역할을 하시는가?
26절을 보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내가 약할 때
누군가가 도와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부족함도 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사실은
인간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며
병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도
이 착각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나도 부족하고
너도 부족합니다.
완전한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에게 완전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부족한 인간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고 난 이후에
죽음이 왔고
사망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땅은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령님께서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보완해 주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으로
다 끝난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현재적으로도
구원을 받아야 하며
미래의 구원을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완성을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를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26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탄식’ 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이 탄식하십니다.
그것이 26절의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통곡으로,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신음하시는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 고통스러우면
말을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서
이렇게 신음하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지 못할 때,
기도하지 않을 때,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
성령님은 말할 수없이
여러분 안에서 근심하십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나가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하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누가 대신 기도합니까?
성령님이 기도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몸부림을 치며, 신음하며
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답답합니다.
성령님이 탄식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영혼이
기뻐 뛰어 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기 시작하면
성령님이 기뻐 춤을 추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찬양하고
영으로 기도하면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축복해 주시고
기름을 부어주시고
기적을 계속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님이 나를 위하여
탄식하며 중보기도를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으면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까?
성령님은 오늘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십니다.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친구가 병이 들었을 때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내 자식이 병들었을 때도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생명을 거두어 가도 좋으니
제 자식을 살려주십시오.
내 친구나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죄를 짓고 있을 때
그를 위해
웃으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잠도 잘 수 없고,
밥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상하고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 내 아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 친구를 건져주십시오.”
이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중보기도를 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친구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하나님과 성령의 생각은
100% 일치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때
완전한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며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되며
여러분이 성령님과 일할 수 있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믿고
소망을 가지고 기다림 속에서
적극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의 이름을 높여 드립니다.
이 시간에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기도를 하게 하옵시고
능력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봉헌기도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들판의 꽃들을 입히시는 하나님,
형언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감사드리오니 받으소서.
평범해 보이는 일상 모두가
주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순간임을
발견하는 마음을 허락하소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입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은총의 샘을 보고
은총의 표적을 깨닫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의 갈망은
주님을 찾는 갈급함이 되게 하시고,
쉴 만한 풀밭과 시냇물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로 부족함 없게 하소서
이시간 하나님을 예배하며
우리의 삶과 물질을 구별하여 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 되게 하시고,
드리는 물질들도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생명을 지으시고
생명의 길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길이 되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우리의 순례길을 동반하시고
안내자가 되시는
성령의 친교가,
하나님 나라의 여정 중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