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구 료오깐 <大愚良寬 1758-1831)
료오깐(良寬)은 월후국(越後國 ) 삼도군(三島郡) 사람으로 야마모또 가의 4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야마모또가는 그 지방에서 명문가였으며 또한 일가중에
학문과 문예에 뒤어난 사람들이 많았諧다.아버지인 야스오(泰雄)는 일본 고유 형식의
시인 와까(和歌)와 하이까이(俳諧)를 잘 했으며 특히 하이까이에 뛰어났다 .
그는 일생동안 황실(皇室)의 쇠약함을 개탄하다가 결국 61세 때에 투신 자살하고 만다 .
그의 둘 째 아들인 요시유끼(由之)는 와까에 뛰어났고 세째 네째 아들도 나중에
각각 석학과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료오깐도 11세부터 16세 까지 당시 일본에서 뛰어난
유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오오모리 시요오(大森子陽)의 밑에서 공부하였다.
아버지 야스오가 그 지방의 명주(名主) 였기 때문에 18세 때에 명주견습(名主見習)이
되었으나 천성적으로 자유인의 기질이 있던 료오깐은 세속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이를 동생 요시우끼에게 넘겨주고 약간 연분이 있던 근처 光照寺의 겐죠오 하료오에
가서 불교공부를 시작하였다 22세가 되던 1779년 비중국(備中國 )옥도(玉島)의
원통사(圓通 寺 )에 있던 다이닌 고꾸센(大忍國仙)이 이 광조사(光照寺)에 들렀었는데
이때 료오깐은 겐죠오(玄乘)의 권유로 고꾸센을 따라 가서 독도수계 하고
본격적으로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다.
도오겐(道元)으로 부터의 깊은 영향
료오깐은 고꾸센의 지도를 받으면서 이른 새벽 세시에 기상하여 죄선 ,예배,독경> 맡은
일 처리등 숨돌릴 틈도 없이 바쁜 하루의 수행을 마치고 다시 밤 아홉시부터인 취침시간
도 아까워하면서 경전과 조사 어록등을 탐독하였다.이러한 그의 수행 태도는 누가 보더라도
흠 잡을 데가 없는 것이었으나 스승 고꾸센만은 료오깐의 내면에 있는 치우친 부분을
예리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고꾸센의 선풍은 불교 경전의 연구보다도 실제적인 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어느날 저녁 설법 시간에 료오깐은 경전이나 종용록,벽암록 등의 강의는 전혀 하지않는
스승 고꾸센에게 물었다.
< 스님의 가풍은 어떤 것입니까?> 이에 고꾸센은
<하나에 돌을 지고 둘에 흙을 나른다.>라고 답하였다.즉 고꾸센은 좌선이나 예불 간경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실제적인 노동이 더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이론으로만 치우치려는
료오깐을 경계하였던 것이다.그 뒤 고꾸센은 도오겐이 죽은 뒤에는 세간에 잘못 유포되는
것을 우려하여 높은 누각속에 비장하고 있던 <정법안장>의 열람을 료오깐에게 허락하였다.
<정법안장>을 읽은 료오깐은 도오겐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그리하여 도오겐이
주창한 지관타좌 탁발행각 깊은 산속 암자에서의 수행등을 일생의 목표로 삼기에 이르렀다
또한 <전좌교훈>등을 통해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닌 실천 이라는 사실을 갚아 명심하였다.
정법안장을 읽고 커다란 감명과 충격을 받은 료오깐은 그 뒤 더욱 수행에 박차를 가하여
마침내 고꾸센으로부터 깨달음의 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이 때가 1790년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