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한 가운데 있는 하중도. 지리적으로 서울특별시 중심부에 위치하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이다. 폭파 이전의 행정구역은 마포구 율도동.
원래는 서울특별시와 가깝기도 하고, 표고도 꽤 있는데다 땅 자체도 넓어서 사람이 많이 살았던 섬이었다.[1] 조선시대에는 뽕나무를 많이 심어서 '서잠실'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오히려 지금의 여의도는 서부 지역에 동산과 벌판이 있는걸 빼면 그저 모래톱이었을뿐이다.
그런데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한강의 흐름에 방해된다고 여겨진 밤섬은 1967년 2월 10일 폭파되어 사라지고 만다. 이 때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키는데, 이 섬에 살던 사람들은 죄다 희귀 성[2]을 가진 서민층이었다. 즉 조선시대 이래로 주류사회와는 약간 동떨어진 희귀 씨족의 구성원들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집단 군락을 이루며 살아오던 곳이란 것. 이 때문에 현재의 도심 재개발에서 볼 수 있는 집단이주로 인한 공동체의 해체가 일어났고, 80년대 운동권 문학이나 만화 등에서 여의도 개발과 엮어서 이 사건을 다루는 경우도 있었다.
밤섬이 폭파되어 사라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일반적으로는 윗 문단에 써 있는 것처럼 "모래톱이었던 여의도에 윤중(둑)을 쌓고 터돋움을 하니 병목 현상이 생겨버린 한강의 물흐름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디테일을 따져보면 전후 인과관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당시 서울특별시장 김현옥은 불도저라는 별명에 걸맞게 서울 지도를 통채로 바꾸는 굵직한 토목공사들을 밀어붙였다. 특히 서울에 난립했던 무허가 판자촌과 도심 재개발 구획정리 때문에 이주민들이 살아야 할 공간이 필요했는데,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한강 백사장 매립을 생각하게 된다. 공유수면 매립이었기 때문에 광주대단지와 달리 토지나 입주권 분쟁도 없다시피했고, 무엇보다도 서울시 재정이 거의 바닥나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김현옥의 눈에 여의도가 처음부터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1966년의 홍수 때문에 한강대교부터 영등포까지 제방을 정비하고 도로를 개설해놓고 보니 수십만 평의 택지가 새로 생겨버린 것이다. 현재의 노량진역-신길역 인근 자투리 땅이 이 때 얻어진 것.
초기에는 여의도 개발을 두고 2가지 안이 제시되었다. 첫째는 샛강을 완전히 없애고 여의도를 영등포에 붙여 매립하는 안으로 이 경우 새로 얻어지는 택지 면적이 무려 100만 평을 상회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처럼 샛강을 두고 여의도에 둑(윤중제)을 쌓아 매립하는 안이었다. 샛강의 존치 여부는 한강의 주기적인 홍수에 대한 대책 때문이었는데, 지금과 달리 한강 수계 정비계획 자체가 없었고 소양강댐도 완공되기 전이어서 홍수는 꽤나 골칫거리인 문제였다. 애초에 여의도 정비사업의 단초가 된 것이 1966년의 서울 물난리[3]였기 때문에 건설부(현 국토교통부)에서는 서울시의 계획안에 대해 "여의도를 매립할 시 한강 흐름이 나빠지며, 특히 100년 정도마다 한 번씩 오는 대홍수에는 대비할 수가 없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4] 서울시와 건설부는 협의 끝에 대안을 마련했는데 개중 하나가 건설부의 주장대로 한강 폭을 1300m로 하여 대홍수 시의 유수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밤섬의 존재가 문제시되었다. 건설부의 한강너비 1300m 확장안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밤섬을 폭파하여 없앨 수밖에 없었던 것. 당시 서울시 당국은 이주민 문제라면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었는데 밤섬에는 아예 조선시대부터 집성촌이 득실대고 있었다 밤섬은 폭파하고, 샛강은 매립하지 않고 살려서 홍수조절 기능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초 계획보다 좀 줄어든 현재의 여의도 면적인 87만 평의 택지가 조성되게 된 것이다.
또한 밤섬 폭파는 서울시의 바닥난 시 재정 상황에서 여의도 윤중제의 자재를 조달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다. 바위섬이었던 밤섬은 폭파하는 즉시 석재로 사용할 수 있었고 여의도와는 부교[5]로 연결되어 있었다. 밤섬의 바위들은 석재로 둔갑하여 여의도 윤중제에 쌓였고, 남은 토사도 퍼다가 매립하는 데에 부어버렸다. 김현옥 시장은 아예 여의도 공사 현장에 퀀셋 막사를 짓고 이동식 시장실(...)을 설치하여 눌러앉았고 힘 좋은 젊은 총각들(...)로만 이루어진 인부들이 3교대로 투입되어 불과 110일만에 윤중제 공사가 완료되었다.
21세기인 지금 시점에서 보면 (한강종합정비사업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밤섬을 없애버리지 않았어도 되었을지 모른다. 북한강과 남한강 수계에 홍수조절이 가능한 댐이 여럿 있어서 소양강댐, 춘천댐, 청평댐, 팔당댐 등에서 미리 수위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에 밤섬의 존재 여부가 수류에 영향을 덜 주기 때문.
또한 서울시 입장에서는 이것이 건설부의 체면을 살려주는 타협안이기도 했는데, 관선 시장 시절에 일개 시 행정이 중앙정부의 말을 묵살하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즉 밤섬 폭파는 일종의 어른의 사정이 끼어 있는 면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는 여의도와 밤섬의 처지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지금은 여의도가 번성한 반면 밤섬은 무인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람이 없어진 곳에 철새들이 오게 되어서, 현재는 철새도래지로 지정되었다. 이 때문에 밤섬을 지나는 서강대교는 야간에 조명을 제한한다.
밤섬에 사람이 표류한다는 내용의 김씨표류기라는 영화가 있으며, 과거 밤섬 이주 당시 벌어졌던 개발독재 당시의 내용을 담은 단편만화가 발표되기도 했다. 모바일 게임 도시를 품다의 2부 스토리 중에서도 밤섬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나온다.
밤섬 원주민들의 후계자인 2인조 해적이 숨어 살면서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인 여의도를 공격하려고 한다.
첫댓글 나름 모험이었습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