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무대왕의 유언
< 내용> 소답자한 제73호(2015.5.)
1. [시] 감은사지, 이재익
2. 문무대왕의 유언
3. [시] 대왕암, 고유섭
4. 동해구 비문
5. 이견대와 만파식적
1
감은사지
이 재 익
어느 때 동아시안게임* 출연 학생들이
푸르고 큰 천 밑에서 파도를 일렁였듯이.
신라의 국운이 푸르던 날
감은사엔 석가탑보다 더 큰 삼층쌍탑이 우뚝섰다.
탑과 학생은 환희를 떠받쳤지만,
바다를 지킨다는 뜻이 엄숙했다.
신문왕*은 통일 문무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감은사感恩寺와 이견대利見臺를 짓고
해중릉 대왕암을 추모하였다.
추령 모차골 함월산을 넘어
기림사와 감은사에 유숙한
대왕의 호국추모행차길*그 3일을,
오늘은 단 하루에 답사한다.
동해바다 바라본 父子대왕 그 마음같이
바다와 빈 절터를 1300 여 년간 한결 지켜온
저 우람한 탑을 위해
풍경風磬소리 다시 들려줄 지어다.
---------
* 제2회 부산동아시안게임 ; 1997년 5월, 식전행사 역동力動 연출.
* 신문왕 ; 신라 제31대 왕. 재위 681~692.
* 감은사 ; 신문왕이 문무왕의 유지를 받들어 감포 동해 어귀에 세운 원찰願刹
* 이견대 ; 대왕암을 바라보고 추모하던 정자. 문무왕 혼령이 바다로부터
신문왕에게 만파식적萬波息笛 피리를 전했다는 정자.
* 호국추모행차길 ; 함월산 → 기림사→ 감은사→ 이견대→ 대왕암
2.
▣ 文武大王 유언遺言
가을 7월 1일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고, 군신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東海口의 큰 바위위에 장사하였다. 속전에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 하고 그 돌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한다.(1)
왕이 유언하시기를 " 나는 국운이 마침 어지럽고 전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쳐서 능히 강토를 평정하고,(2) 반역하는 자는 치고 협조하는 자는 불러들여 드디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두루 편안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이 돌보아 주심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아비와 아들의 오랜 원한을 갚아 주었고, 살아 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널리 상을 주고, 내외의 관직을 고루 나누어 주었으며,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리게 하였다.
또 조세를 가볍게 하고 부역을 덜어주니, 집집이 넉넉해지고 사람마다 풍족해져서 백성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어졌으며, 창고에는 곡식이 산처럼 쌓이고 감옥은 텅 비어 풀이 무성해 졌으니, 남이 보지 않는 데서나 보는 데서나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벼슬아치와 백성들에게도 저버림이 없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스스로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드디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리고 정치와 교화를 위하여 걱정하고 애쓰다가 다시 깊은 고질에 걸렸다. 명운命運은 가더라도 이름이 남는 것은 고금에 한결같은 법칙이니 문득 죽은 들 무슨 유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덕을 쌓아 오래도록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들에서부터 아래로는 뭇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가는 사람을 잘 보내주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있는 사람을 잘 섬기는 예절을 잃지 말라. 그리고 나라의 임금은 잠시라도 비워 둘 수 없으니 태자는 곧 내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또 산골짜기가 바뀌고 세대도 변해 가니 저 오왕吳王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으며, 위주魏主 서릉西陵을 바라봄도 세월이 흐르면 오직 동작대東雀臺(3)의 이름만을 듣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 나라를 다시리던 영주英主도 마침내 한무더기 흙무덤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여우와 토끼들은 그 곁에 구멍을 뚫고 사니,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비방을 서책에다 남길 뿐이며(4) 헛되이 사람만을 고되게 하고 죽은 사람의 넋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고 아픔이 그지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나의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임종한 후 열흘이 되거든 곧 고문庫門의 바깥 뜰에서 서역西域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喪服의 경중은 스스로 정해진 법이 있거니와 상례의 제도는 힘써 검소하고 절약함은 좋은 일이다.(5)
변방의 성읍城邑을 지키는 일과 주州와 현縣에서 세를 부과하는 일에서 요긴한 것이 아니거든 모두 마땅히 요량하여 없앨 것이며, 율령律令과 격식格式(6)에 불편한 것이 있거든 곧 고치고 원근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할 것이며 주관하는 이는 이를 시행하라" 하시었다.
[출처] ; 三國史記 권 제7, 문무왕 21년
1990년 8월 20일
齊山 崔世和 근역병서謹譯竝書(삼가 번역하고 글씨를 쓰다)
석굴암 연구회/ 성보 문화재단 건립
----------
(1) 문무왕 21년 681년에 문무왕 붕어함.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경주시 감포읍 일대 동해바다 입구 문무대왕 해중릉인 대왕암에서 그 유골을 장사지냄.
(2) 부왕 김춘추 태종무열왕을 도와 660년 백제를 멸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문무왕 8년 668년 고구려를 멸하고, 문무왕 16년 676년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삼국을 통일대업을 이룩한 위대한 공로를 세운 대왕이다.
(3) 춘추시대 오왕 합려를 호구산(북산)에 장사 지낼 때 무덤속에 연못을 만들고 황금 주옥으로 오리 기러기를 만들어 띄웠다는 고사. 동작대는 204년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가 초기 도읍지 동허난성 린장현 서남쪽에 있는 업도(업군)에 있는 유적지. 조조가 동작대를 세우고, 신료들과 연회를 베풀며, 승전을 축하하고 여흥을 돋웠던 장소. 건설과 파괴가 계속되다가 북주시대 파괴 됐다. 북제의 돌사자상 등이 남아 있다. 위나라 조조가 죽으면서 매월 삭망(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동작대에 올라서 나의 서릉의 무덤을 바라보며 주포를 올리도록 하라고 유언했다 한다. 조조 아들 조비가 위나라 황제가 되면서 수도를 뤄양(낙양)으로 옮겼다.
(4) 영화도 허망함을 말함, 조조와 문무왕이 유언이 비교됨. 조조는 초하루와 보름 삭망에 자신에게 제사지내라고 하였으니, 그 번잡스런 제사를 유언했다. 그러나 문무왕은 화장이라는 간소한 장례를 명한 것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변방일이나 조세징수에서도 불필요한 것을 개혁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 검약한 정신이 잘 나타나서 비교가 된다. 위나라는 조조 사후 45년만에 멸망됐고, 신라는 문무대왕 사후 254년이나 더 지속됐다.
(5) 화장은 불교식 장법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화장법이 늘어 가면서 상례는 간소화 되어 가고 있으나 결혼식을 번잡한 면에 많다. 2015년 4월 22일자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성가족부가 고비용 결혼식의 폐단을 인식하고 작은 결혼식 문화를 확산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불교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4 대종단과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6) 율령격식律令格式 ; 중국에서 수·당대에 완성한 국가적 성문법 체계이다. 율律은 형법, 령令은 공사간의 제도에 관한 규정, 격格은 율령을 수정 증보한 명령, 식式은 율령의 시행 세칙이다.
엄격한 구분을 하지 않고 법률과 제도 전반의 정비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율령 국가 또는 율령 반포는 백제는 3세기 고이왕 때, 고구려는 4세기 소수림왕 3년(373년), 신라에서는 6세기 법흥왕 7년(520년)에 반포되었다.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 때에는 신라의 율령격식이 완성되었다. 통일신라의 관료 체계가 정비되었던 것이다.
3.
대왕암大王巖
우현 고유섭 (1940년 작)
대왕의 우국憂國 성령은
소신후燒身後 용왕龍王 되사
저 바위 저 길목에 숨어 들어 계셨다가
해천을 덮고 나는
적귀賊鬼를 조복調伏하시고
우국지성이 중코 또 깊으심에
불당에도 들으시다
고대에도 오르시다
후손은 사모하야
龍堂이요 利見臺라더라
영령이 환현幻現하사
주일야이晝二野一 간죽세竿竹勢로
부왕부래浮往浮來 전해주신
만파식적萬波息笛 어이하고
지금에 감은感恩 고탑孤塔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
대종천 복종해覆鐘海를 오작烏鵲아 뉘지마라
蒼天이 무심커늘 네 울어 속절없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뜻있어 운다 하더라.
---------------
* 문무대왕이 왜적을 물리치고자 화장하여 대왕암에 장사지내 용왕이 되어, 지하의 물길 따라 감은사에도 나타났다는 설화, 당시 감은사앞은 거의 바다였다.
* 영령이 환현幻現하사
주일야이晝二野一 간죽세竿竹勢로
부왕부래浮往浮來 전해주신
만파식적萬波息笛 어이하고~
대나무가 낮에는 둘로 쪼개지고 밤에는 합쳐졌다는 만파식적이 전해지던 삼국유사 설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 대종천의 까막까치야 누비자 마라
하늘도 무심한데 울어도 소용없다
그래도 미물은 우리들은 뜻이 있어서 울어요.
대종천은 감은사지 앞을 흐르는 시내물.
* 대종천은 몽고군이 황룡사종을 약탈해가다 바다에 빠뜨린 곳이란 의미다.
4.
▣ 東海口
이곳 바다와 땅은 신라 으뜸의 성역인 동해구이다.
통일의 영주 문무대왕이 왜병을 진압코자 창건한 감은사와 승하 후 호국룡이 되기를 유언하여 뼈를 묻은 해중릉 대왕암과 아들 신문왕이 사모하여 해안에 쌓은 이견대 등 세 유적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바다는 문무대왕과 김유신 장군이 함께 전하여 준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 설화의 현장이요, 또 그 후 효성왕이 이 곳에 산골散骨하니 경덕왕은 김대성으로 하여금 전세 부모의 복을 빌어 토함산에 지금의 석굴암인 석불사를 세워 거기 모신 동양 제일의 대불로 하여금 똑바로 굽어살피게 한 바로 그 땅이요 바다이기도 하다.
(화장 산골한 왕이 문무대왕 외도 효성왕이 또 계셨네!)
5.
▣ 이견대와 만파식적
♣ 원본 일연의 삼국유사 / 권제2, 기이편 / 고운기 번역
만파식적萬波息笛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政明이고, 金씨다. 개요開耀 원년(681)은 신사년인데 7월 7일에 왕위에 올라, 돌아가신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 가에 感恩寺를 지었다. 다음 해인 임오년 5월 그믐께 였다. 해관인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쪽 바다 가운데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 쪽으로 오고 있는데,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다닙니다."
왕이 기이하게 여겨 일관 김춘질을 불러 아뢰게 하였다.
"돌아가신 임금께서 지금 바다용이 되어 이 나라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게다가 김유신 공은 33천의 한 아들이라 이제 내려와 대신이 되시고, 두 분 성인께서 덕을 같이 하시어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주려 하십니다.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가신다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 달 7일 가마를 타고 이견대利見臺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신하를 시켜 살펴보도록 하였다. 산의 모양새가 마치 거북의 머리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신하가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에 가서 잤다. 다음날 정오, 대나무가 합쳐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로 어두워지는데, 7일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왕이 바다에 나아가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쳐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왕은 영접하고 함께 앉아 물었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쪼개지기도 하고 오므라지기도 하니 어쩐 일이니까?"
"비유컨데 손바닥 하나로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훌륭한 임금이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 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날 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놀라 기뻐하며 다섯가지 색깔이 칠해진 비단이며 금과 옥으로 제사를 드렸다.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잘라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어느덧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자고, 17일에 기림사에 이르러 서쪽 시냇가에서 머무르며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 효소왕)이 궁궐을 지키다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 경하하였다. 서서히 살펴보더니 왕에게 말했다. "이 옥대의 여러 구멍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구멍을 하나 떼어 물에 담가 보시지요." 이에 왼쪽 두 번째 구멍을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땅이 연못을 이루자 이 때문에 용연龍淵이라 불렀다. 왕은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문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고가 잔잔해 지는 것이었다.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고 국보로 불렀다.
효소왕 때인 천수 4년은 계사년(693)인데, 부례랑이 살아 돌아온 기적 때문에,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이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