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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버지의 강” 노래를 듣다가 아버지의 살아생전 옛 모습이
떠올라 눈물 나게 한다. 이경용의 지난 삶을 돌아본다.
2023. 1. 16일 씀
건물 업무차 남양주 가는 승용차 안에서 “아버지의 강” 노래가 흘러나와 듣는데 아버지의 살아생전 옛 모습이 떠올라 울컥하여 눈물나게 한다.
학교에 못 보내고 식당에서 일만 시킬 수 없다고 “자동차정비 공장에 가자며 14살의 어린 아들 경용이 손을 잡은 57세의 아버지 심정”을 헤아려보니
그 당시 57세의 아버지 보다 11살이 많은 68세가 된 아들 경용은 그 예전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난다.
43세에 경용을 낳으시고 그 밑으로 4명을 더 두어 막내를 52세 때에 9번째 자식까지 낳으셨던 아버지였다. 경용 밑의 딸 순옥(1958년생)이를 7살 때, 급성 뇌염으로 하늘로 보낸 아픔(크게 우심)도 가지신 아버지이다.
➀아들. ➁딸, ③아들, ④아들, ⑤아들(경용), ⑥딸, ⑦아들, ⑧아들, ⑨아들: 참 많이 낳으셨다. 아버지는 아내와 금슬도 좋으시고 아내는 임신, 출산도 잘하십니다.
아버지는 자식 욕심도 많으셨고, 아들 7명과 한울타리 안에서 살것이라며 정미소 공장 뒤편에 “큰 기와집을 지으셨고 상량식때 너무 기뻐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나주에서 정미소. 과수원. 큰 기와집을 가져 잘 살았던 과거는 흘러갔고
학교도 못 다니고 식당에서 일만 하던 어린 14살(만13세)의 아들 손을 잡고 기술을 배워 주려고 정비공장에 가셨던 아버지의 가슴 아팠을 심정이 이 노래를 듣다보니 헤아려져서 눈물이 난다.
1969년 초봄에, 정미소 공장이 부도가 나서 망하자, 명문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아들1명만 전남 광주에서 학교에 다니게 하고, 아들 2명(만12세, 만8세)은 학교를 중퇴하고 2명(만5세, 만3)세)은 미취학 아동이었다.
학교를 못다니게 된, 경용이는 1969년도에 아버지의 아내와 둘이서 작은 식당인 나주집(간판)을 운영하였다.
대가족의 생활비 등의 지출이 너무 많아서 작은 식당(간판 나주집)이 조금만 장사가 안되어도 쌀값을 외상하고, 특히 광주의 셋째 아들 앞의 하숙비와 학비 때문에
➀. 비싼 일수 돈의 사채를 써야했으며
➁. 이웃 쌀가게, 복송 여인숙 등에 돈을 빌려달라고 애걸해야 하는 키가 작은 아버지의 아내가 불쌍하였습니다.
③. 그리고 월세의 초라한 주막 식당에 시골 빚의 채권자(이웃집 광호 엄마 등)들이 찾아와서 빚 독촉을 받았던 어머니는 수중에 돈이 없어 이웃 경기 쌀집(이덕선) 등을 찾아가 또 급전을 빌려서 일부 빚을 갚아야 하였습니다.
자식 중에 경용이만 겪었던 슬프고 괴로운 일은 “시골 빚을 받으러 찾아온 채권자와 상계동의 식당 빚”에 시달리는 불쌍한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었다.
대가족이 먹고 사는 돈도 벌기 어려운 주막식당에서 특히 “셋째 형의 광주 하숙비와 학비” 때문에 돈이 없으면 “비싼 일수 돈”을 상호신용금고와 개인 사채업자한테 빚을 내야 하였다.
매일, 일수 돈을 갚으면 일수 받는 사람은“일수 날짜 종이”에 도장을 찍었다.
※. 셋째는 이런 처참한 상황을 거의 모르던지, 또한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경용이는 ➀.주막식당에만 매달릴 수 없어서 ➁.“기와공장, 검도장갑 공장을 다녔지만 돈벌이가 안되어 ③.무거운 짐 자전거 배달 3년(1973~1976년)”을 해야 하였다.
동생 경용이가 자전거 배달에 나서지 않았으면 하숙비 등의 지원이 끊겨서 형은 광주의 제일고등학교를 그만 못 다녔을 것이다.
훗날, 이 도움을 웬수(너만 고생했냐 등등)로 갚듯이 동생 경용이에게 3년간,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준 형이다.
자전거 배달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경용이는 술취한 오토바이에 부딪치는 큰 사고를 당한 보상비로 20만원의 큰 돈(1973년도 집값 70만원의 약 30%)을 받아서, 빚을 갚는데 전부 써버렸다. 경용의 몸에는 현재도 “큰 흉터”로 남아 있다.
3년 동안, 휴일도 없이, 새벽에 일어나 무거운 짐(막걸리8통,160kg)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오를 때 마다 자전거에서 내려 앞으로 끌어당기면서 수없이 다니다보니
발가락이 전부 휘어져버릴 만큼, 어린 나이에 너무 힘들었어도 아버지, 어머니, 형들을 한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다.
돈이 없어 “1973년 여름”에, 대학병원에서 쫓겨나 초라한 월세 식당 방안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시며, 62세로 세상을 뜨기 전에 12살 아래의 50세 아내에게 죽은 후에 여자. 남자로 바꿔 환생해 다시 만나 살자고 했던
아버지의 아내는 이제 99세로 정비공장에 갔던 14살의 그 아들 경용이가 모시고 삽니다.
아버지는 “17년 동안 9명의 자식을 낳을 만큼 아내를 사랑”하셨습니다. 9번째 막내 아들에게 “젖을 먹이던 모습”을 보고 있던 정미소를 찾은 손님이 “아줌마는 해마다 아기 젖을 먹이거나 아니면 배가 불러있다”고 하셨다.
경용이가 10살이던 초등학교 3학년 때에 그 옆에서 들었던 생생한 기억이다.
아버지! 지금 살아 계시면 111살로 여자. 남자로 바꿔 환생하기를 49년이나 기다리시다가 지쳤을 아버지!
아내를 이제 포기하십시요!
걷지도 못하던 “아기 경용이를 등에 업고” 영산강에 낚시를 가셨을 정도로 자식 사랑이 크셨던 아버지!께서
병원에서 쫓겨나, 병세가 깊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한 아버님께 매일 매일 “자전거 배달한 노동 일당의 현금”을 갖다 드리면 너무 좋아하시던 그 모습이 선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바로 전에 자전거 배달하던 넷째 아들 경용(만17살)이에게 “저 어린것들이 불쌍하다 하셨던 동생3명과 어머니. 외할니까지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집안의 가장(경용)”이 되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50년 가까이 되어버린 아득한 세월이 흘렀건만 가끔 그리워지기도 하는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19살이던 1932년도에 일본에 혈혈단신” 건너가서 온갖 고생 끝에 “오사카에서 고무신 공장의 사업 성공”을 이루셨고 조국이 해방되자 귀국을 하여
1947년도에 늦은 나이인 35세(그 당시 20대 초반에 결혼함)에 결혼하여 얻은 “큰아들을 황제”처럼 애지중지 잘못 키우다보니,
정미소가 망하게끔 돈을 훔쳐 마구 써버렸고, 나중에는 마지막 재산인 과수원을 팔은 돈까지 챙겨서 탕진하였던 큰아들이 아버지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 때에
아버지는 자전거 배달 일당과 월급을 갖다주는 제일 믿음직한 넷째 아들 경용이게만 유언을 하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시기 전에
➀. 어린 자식 3명이 불쌍하다고 하셨으며,
➁. 내 죽거든 돈이 없으니 공동묘지에 나무 말뚝을 깊게 박아야 한다.
③. 내가 1974.5.6일에 죽는다고 여러번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그날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시신을 붙잡고 “이 많은 자식을 놔두고 나혼자 어떻게 살라고”...하는 어머니(50세)의 슬픈 통곡 소리가 초라한 식당을 울렸다.
아버지는 초라한 주막식당 안에서 동년배의 단골손님(복덕방 류씨, 송씨, 채소 가게 진씨 등)과 술잔을 나누며 지나간 삶을 이야기하셨다.
①. 너무 가난했지만 “공부를 잘해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중학교를 사비”로 보내줬고
➁.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는 큰형님집의 소를 팔아 일본에 건너가 성공한 뒤에 큰형님께 “소, 밭, 집”을 장만해주셨고
③. 일본에서 돈이 많이 벌리자, “11살 아래의 막내 남동생을 일본에서 학교까지 보내주셨다”는 이야기 등을 “식당 보이”처럼 일만 하던 15살(1970년)의 경용이가 듣게 되었다. ※. 육상 달리기 1등, 6.25 전쟁 이야기 등은 생략한다.
복덕방 류씨(키 170센티도 안됨)는 “고장난 기차를 혼자 힘으로 밀어서 움직였다”는 젊은 날의 힘자랑 이야기에 옆에서 술, 안주를 심부름하던 어린 경용이는 “속으로 허풍이다고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난에 빠진 주막식당 주인(아버지)이 자신의 젊은 날 등에 “공부, 고무신 공장. 비싼 선박 구입, 정미소 사업 및 서울로 쌀 도매 사업 등”의 자수성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을 때에,
학교도 못 다니며 “술, 안주, 밥, 국, 반찬을 나르고 치우고 닦고, 연탄불을 갈고, 밖으로 음식배달을 다니던” 나이 어린 15살의 경용이는 이런 처지가 서글프고 아버지가 불쌍하였다.
부자 소리를 들었던 정미소, 기와집 등의 생각이 스치면 더 현실이 참담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1969년도에 정미소가 망하여, 57살의 아버지는 “정든 고향을 버리고 45살의 아내와 어린 14살의 아들 손을 잡고서 상경”하여
서울 변두리의 상계동에 “스레트 지붕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주집 주막식당”을 차린 지 5년 뒤에 세상을 뜨셨다.이런 글을 쓰면 눈물(68세 경용)이 흘러내린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2년 후인 1976년도에 무거운 중노동의 막걸리 배달을 그만두고 1달 공부하여 국세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주막식당에 달려가서 어머니께 합격소식”을 전하니, 어머니는 감격하여 우셨습니다. 장하다. 장하다. 내 아들이 정말 장하다고 하셨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군대면제 판정”을 받았으나 청량리 세무서에 근무하고 있는데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했다고
군대영장(주막 식당에 들러 어머님께 큰 절을 올리며 군대 잘갔다 오겠습니다. 돈이 없으니 절대로 면회 오지 마십시오. 하였다.)이 나와 약3년의 군복무를 하였다.
자기가 돈을 벌어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재명씨. 경용이 친구들. 국세청 동료들)과 다르게 경용이는 냉정하게 대가족에 대한 부양을 외면할 수 없어서 대학을 포기했습니다.
아버님이 1974년도에 돌아가신 후에, 그 오랜세월을 아버지의 아내를 모셨습니다.
넷째 아들 경용이에게 시집을 와서 32년간, 아버지의 아내를 모시며, 대가족의 명절 음식과 아버지 제사를 지내준 아내에게 한없이 고맙고 죄스러울 뿐입니다.
윗형이 명문중학교2학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5년간을 넷째 동생 경용이의 도움(식당. 공장. 배달하여 뒷바라지 함)이 없었으면 절대로 야간대학교를 거쳐 고위공직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런 도움을 준 동생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었다.
서울 상계동에서의 13년간의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경용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장만(은행 대출 받고, 방1개를 전세 줌)한 집 등에서 32년(1982~2014년)간 사시던 90세의 어머니를 형이 모시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고위 공직자로 정년 퇴직한 형 집에서 4년을 보내면서, 어머니를 모시는 일때문에 여러 사건 등이 발생하였다.
※.노모를 형집에 안 모시게 했어야 했는데..후회막심!이었다.
➀. 노모 생일 때 불효막심한 창동 식당 사건(2017.4.2.일)이 일어나고
➁. 노모의 구안와사(입이 삐뚤어짐)병의 침 때문에 벌어진 사건(2018.10.22.일)과
③. 요양원만을 주장하며 대화를 거부하는 1년(2019.2월~2020.2월)을 보냈고,
[요양원에 바로 보내면, 안 된다는 글을 2019.2.28일 단체 카톡(8명: 4형제 부부)에 올렸더니. 두 동생은 동의한다는 글을 본 셋째 형은 경용이에게 전화해서 온갖 성질을 내고. 곧바로 단체 카톡을 나가버렸다]
④. 2019년 추석과 2020년 설명절을 보낸 경용이 집에 계신 노모도 찾아뵙지 않는 상황을 겪으면서
3년간 동생 경용이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었지만 세월이 흘러가니, 옛일이 되어버려 그 고통도 사그라져 간다. 형제 1명 때문에 괴로울 일인가? 싶다.
이메일로 편지도 여러번 썼지만 소용없었고 안보고 사는게 최선책이다.
94세의 입이 삐뚤어진(구안와사 병) 노모의 흙침대(장윤정 광고선전의 고급 침대이며, 경용 부부가 사줬음)를 만져보니 너무 차가웠다. 옆에서 흙침대가 고장났다는 형님 부부의 말을 듣고 나서 자세히 살펴보니 전기 코드가 빠져있었다.
고장이 아니었고, 3년 동안 흙침대의 “차가운 돌판”에서 늙은 노인이 잠을 주무셨으니 입이 삐뚤어지는 병이 생긴 것이었다. 정말, 94세 노모가 추워 죽든지 말든지, 전혀 관심이 없는 형님 부부였다.
세상에! 세상에!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에게도 차가운 돌판에 안 재울 것이다. 불효가 극심한 차가운 돌판 침대 사건이었다.
차가운 돌판 침대 사건이 있기 전에 경용이는 노모의 녹내장 수술후의 치료 때문에 10년 넘게 해마다 아산병원 등에 노모를 승용차에 모시고 다녔으며, 형집에 4년 계실때도 경용이가 병원에 모시고 다녀야 하였다.
형한테 아산병원에 같이 가자고 하니, 약속이 있다면서 거부하였다. 형의 말투, 표정을 보면 “아 이사람은 효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 전에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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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어려서 풍이 걸려 “머리가 나쁘고 똑똑치 못한 친누나(어렸을 적에 어떤 형은 친누나를 칠칠이, 칠뜨기라고 놀림: 어린 경용이는 싫었음)가 자식 4명을 데리고 찢어지게 살았어도 단 한푼도 도와 주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탐욕하고 이기적이다고 이미 판단하였다.
현재 “①. 형집의 아파트 58평은 1억원을 들여서 인테리어 공사했고, ➁. 자기 아들한테는 집도 사주기 전에” 불쌍한 누나(길거리에서 좌판 장사도 했음)를 오랜세월 도와주고 싶지 않을까?싶다.
경용이가 투자하게 해준 “과거 안산 땅 등의 부동산 수익도 많건만”....
경용이는 “어머니 쓰시고 싶은 데로 쓰시고 모자라면 언제든지 돈을 주겠다”하였고 항상 “어머니 수중에는 일부 현금과 예금 3천만원이 넘는 돈”이 있었다. 친누나와 외사촌 누나가 오면 돈을 주라고 어머니께 몰래 미리 말해주는 경용이다.
그런데 셋째 형집에 계실때에 어머니한테 친누나와 외사촌 누나에게 돈을 주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 형집에 갈때인 2014.12월에 자유입출금의 용돈 통장 외에 별도 정기예금 2건의 3천만원을 셋째가 “정기예금을 해약하여 찾은 돈이 3164만원”이었다.
8만원(2018.5.21.일)을 남기고 3156만원을 찾아서 셋째가 전부 써버렸다.
2018.11.7일에 편지를 보냈건만, 잔액이 8만원으로 변동이 없었고, 편지를 써봐야 소용없었다. 요양원에 보낼 수 없다고 경용이가 주장(2019.2.28.일)하자, 4일 뒤에 갑자기 1천만원을 입금(2019.3.4.)하였고,
경용이가 잘못을 지적하자 1년 뒤에 1천만원을 또 입금(2020.2.11.)하였는데, 나머지 1천만원은 어머니를 위한 베란다 확장비 등에 썼단다.
경용이는 과거 수백만원, 수천만원, 1억원도 넘는 돈(여섯째 동생)을 형제들에게 수없이 그냥 퍼준 이력이 있고, 작년 2022년에도 1억원의 목돈을 마련하여 가난한 형제 등에게 그냥 준 사람이다.
어머님 앞 3천만원을 가지고 따지는 게 아니라 “어떻게 90살이 넘은 노모의 돈을 아들 자식이 함부로 쓰고, 어머니는 못쓰게 하냐는 것”이다.
정말, 돈에 미치지 않고서야...
정년퇴직하여 직업도 없으면서 단 한번도 녹내장 병원에 간적이 없었다. 이런 불효 마음을 가진 자식이어서 차가운 돌판 침대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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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미사 아파트를 취득하게 해주어서 경용아 고맙다(돈 많이 남게 투자 잘해주었다는 뜻)고 전화 하였다. 그로부터 1~2달이 지난 2018. 10. 22일날 점심때,
구안와사 병으로 입이 삐뚤어진 노모의 얼굴 상태가 안좋아서 형에게 전화하여 한의원 침을 맞냐고 물어보니, 동생 경용에게 온갖 성질을 내며 큰소리로 3분 동안, 퍼부었다.
네가 모실때는 노모가 건강하고 젊었다. 힘들다. ➀.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모시냐. ➁. 구안와사 병은 1년 뒤에도 안나을 거다면서//// 왜 화를 내냐고 해도 소용없었다. 형제들 중에, 제일 많이 배우고 고위 공직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형제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위치에 있건만, 전화로 온갖 성질을 부리는 큰목소리때문에 “옆에 있던 노모, 경용의 아내, 딸과 장모님한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2018.10.22일날, 노모를 모시기 싫어서 온갖 성질을 내더니 약 2달 뒤인 2019.1.1일에 노모가 넘어져서 엉덩이 고관절이 부러지자
수술 후에, 형네 집에는 절대로 갈 수 없으며 “노모를 무조건 요양원에만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형”이었다.
형이 고위공직자가 될 수 있었던 “명문 중고등학교를 뒷바라지를 해준 노모와 동생”을 배신하는 이기적인 처신에 치가 떨렸다.
형 자신은 명문 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시 공무원으로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동생 경용이게는 야간대학을 가지 말고 돈이나 벌라 하였다.
초등학교 졸업장과 고졸 검정고시 합격증밖에 없는 동생 경용은 그저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이기적이다.
경용이는 만 20세부터 국세청 공무원을 시작하여 본인이 돈을 벌어 스스로 야간대학을 갈 수 있었지만, 외할머니, 어머니, 나이 어린 동생 3명의 생계부양을 동생 경용이에게 전부 맡겨버려서 야간대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019. 1. 1일날, 아버지의 아내가 화장실을 가다가 넘어져서 엉덩이 고관절이 부러지자 수술 후에는 광명시 천사요양원(어머님 모르게)으로 보낸다고 동생들에게 통지해버렸다.
“동생 경용이가 95세인 아버지의 아내를 요양원에 안보내고 집에 모셔준다는데도, 심한 반대와 고통을 주었다”. 고맙다하면 끝날 일인걸!
요양원에 안가고 재활치료 병원을 거쳐 경용이 집에 다시 모신지가 4년(2019.10월~2023.1월)째다. 4년 전보다 건강이 더 좋아지셨다.
99세로 잘 걸으신다. 4년 전에 고관절 엉덩이 뼈를 수술한 후에는 자기 집에서는 단 며칠도 모실 수 없다면서 요양원만을 고집하였고 28년을 모시고 살았던 동생 부부(경용)가 다시 모시는 것은 자신의 위신을 깎아먹어서 적극 반대하였다.
★.“셋째 아들 한명은 초등학교 졸업후에, ”재수 과외“까지 시켜서 명문중학교에 합격”시켜 훗날 고위 공직으로 출세하게끔 기초를 만들어주셨던 어머니였다.
★.넷째 아들 한명(이경용)은 “초등학교만 졸업”시켜 식당에서 일을 시켰다. 집안이 망하여 자식 차별이 아닌 차별로 경용이를 식당에서 일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명문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하숙비, 학비를 뒷바지해준 어머니와 동생 경용이를 생각해서라도, 노모를 모시고 살 수 없을까? 그렇게 모시기 싫을까? 싶었다.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 형 가족의 삶이 피폐해진단다. 정말, 이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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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를 푸대접(요양원. 차가운 돌침대 사건)하면 안된다.
식당 집에서 일어난 도둑사건으로 이경용의 자서전에 실린 글로 어머님의 슬픔이 담겨있다.
①. 어머님이 식당에서 밥․ 안주․ 술을 팔아 매일 그날의 푼돈을 조금씩 모을 수 있었다. 후일과 급한 일을 대비하고자 하여서 “가난한 집의 금고 격인 하얀 양철 옷장에 남모르게 깊이 저축하여 넣어둔 돈”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돈을 도둑이 몰래 들어와서 훔쳐가 없어진 것을 알고 나서는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 이렇게 가져가 버린답니까?” 하면서
그 옷장 앞의 방에 앉아 “방바닥을 손으로 치시며 대성통곡”하시는 어머님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서 나도 소리 없이 울었다.
그날 밤에 잠자리에서 어머니도 혼자 우시기에 만 14살이었던 나도 소리 없이 옆의 잠자리에서 울었다. 정말 얼굴도 모르는 도둑은 어머님의 처참한 생활을 짓밟는 양심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1970년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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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90세 넘은 부모를 모시는 가정이 거의 없다. 혼자 거동이 힘들면 거의 요양원에 보내버린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이걸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요양원 안보내고 형제 중에 누가 집에서 모시겠다는데 반대하면 안된다.
95세의 늙으신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낼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남몰래 우는 남편을 보고서 다시 모시고 살자는 경용의 아내였다.
늙으신 어머니를 다시 모시고 사니, 경용이는 마음이 너무 편하다.
99세의 어머니가 훗날 돌아가시면, 어머니 때문에 생길 갈등도 없어진다.
형들 3명 때문에 너무나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경용이가 짊어져야할 사주팔자의 운명으로 압니다. 20년 전인 2003년도에 점을 보니, 장남 역할을 손해보고 해야 한답니다. 형들 운도 없답니다.
국가에서 중고등학교를 보내주는 고아원 아이들보다 못한 환경이었던 이경용은 나이 만13세부터 만20세까지 즉 1969년도부터 1976년도까지 7년 동안을 식당, 공장, 짐자전거 배달을 하여, 정식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짐자전거 배달 노동일을 그만두고 1달 공부해서 국세청 공무원 시험(1976.10월)에 합격한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으며,
토지개발과 상가. 창고. 주택 등을 건축하여 돈을 벌고, 부동산 책을 쓸 정도로 능력과 자질을 물려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입니다.
이경용은 “초라한 간판(초등졸, 고졸 검정고시)의 하위직 공무원 출신으로 2달 공부”해서 공인중개사(1997년)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졸, 고위공직자 출신이어도 2달 공부해서 합격하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 많지 않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왔어도 공인중개사 시험이 어렵다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세청 시험에 합격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7년 동안, 대가족의 생계에 매달려서” 학교를 제대로 다닌 적이 없고, 책을 거의 읽지를 않아서 공직 근무를 시작하니 국어실력이 부족하여 “보고서 하나” 제대로 쓰기가 어려웠다.
창고에 몰래 들어가 “남이 쓴 보고서, 기안문 등을 읽고 외우고 하니 처량하기도 슬프기도 하였다.”
매일 남보다 사무실에 “최소 1시간 이상 먼저 출근”하여 공부를 하였다. 그후에 전직원 150명 앞에서 “일을 제일 잘한다는 찬사”를 들었고, 직원들로부터 “실세(결재 잘 받음)”란 소릴 들었다.
상가와 주택 건축을 하면서 건축사와 시청에서 안된다는 “대지분할, 지붕의 가중평균 높이“를 이경용의 주장대로, 민원 글을 써서 대지 분할을 시키고, 지붕의 평균 높이를 더 높일 수 있었다.
건축사로부터 건축사보다 일을 더 잘한다는 말도 들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좋은 대학에 합격할 자질과 능력이 있었지만 어머니와 형제들을 위해서 대학을 진즉에 포기했기 때문에 “대학 간판. 고위 공직. 대기업 임원” 같은 것들이 전혀 부럽지도 않았다.
부동산, 세금, 건축 등의 복잡한 일을 하다보면, 실력이 나타난다. 대학을 졸업하고“고위 공직, 대기업 임원”을 했어도 이경용보다 모르는 경우가 많다.
대학교를 못 나온 경용이 대신에 딸 아들이 대학교를 나와 사회생활을 잘하니 큰 복입니다.
부동산 사업 등으로 돈이 들어오면, 가난한 형제에게 집 마련하라고 도와주고 잘살게끔 베푸는 것도 낙(樂)이고 큰 복(福)입니다.
노모를 모시면서 형제들을 도와준 이경용에게 막내동생(식당 자영업)은 승용차를 사주었고, 다섯째 동생(택배 노동자)은 1달 월급의 반을 봉투에 담아 주었다. 사양했으나 고맙게 받아야 하였고, 위의 형들보다 나은 동생들이다.
아버지의 강이란 노랫말을 듣다가, 아버지의 옛 모습이 담긴 이것저것들이 많이 떠올라 눈물이 났습니다.
누구나 헤어지는 게, 필연이고 자식으로서 볼 수 없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뿐입니다.
만13살의 어린 나이부터 만20세까지의 7년 동안을, 사회 밑바닥의 천한 일인 식당, 공장, 짐 자전거 배달을 하면서 못배운 약자들이 겪는 “가난, 천대, 설움”을 당하였기에
경용이는 스스로 다짐하고 실천해야 하는 아래의 인생관이 생겨났다.
인생살이 중에,
➀. “이기적이고 탐욕한 마음으로 ”가족과 모든 사람들에게 가슴 아픈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며”,
➁. 돈 없고 힘 없는 늙은 부모를 공경(공손히 받들어 모심)할 줄 알아야 하고,
③. 가난하고 못배우고 능력이 부족한 형제. 누나 등의 모든 약자들에게 배려하고 베푸는 마음으로 실천하며 살아야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복을 만들고 복을 받는 일이다.
훗날 죽어서도 좋은 이름을 남기고 후손들로부터 덕담을 듣는다.
현재, 고금리 때문에 “너무 많은 은행대출 부채”에 대한 이자가 많아져서 어렵지만 작은 상가건물을 임대하면서 세입자들에게 임대료를 10년 넘게 인상하지 않는 것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간사랑, 베풂이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아내를 4년 전(2019.1.1.일)에 “부러진 엉덩이 고관절 수술 후”에 형의 강력한 주장대로 “요양원에 곧바로 모셨으면 벌써 세상을 뜨셨을 것”이다.
수술 후에 보행기를 잡고, 잘 걷는 동영상을 올린 다섯째 동생에게“넷째 경용이가 이 동영상을 보면 방방 뛰며 좋아할텐데 하면서” 크게 화를 낸 형이었다.
요양원에 보내려 하는데 방해하는 다섯째 동생이 미워서 화를 낸 것이었다.
경용이의 주장대로 요양원에는 안보냈으며, 재활치료 병원의 병실에서 승강기까지 걸어서 형 부부를 배웅까지 해준 어머니였고 병실에서 “네가 어떻게 나를 요양원에 보낼 수 있냐며 형 부부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간병인한테 들었다.
재활치료 병원(재활시설과 간병인: 비용 많이 듦)과 요양병원(의사, 간호사 상주함)도 아닌 간호사도 없는 돈 적게 드는 요양원만을 고집하는 형을 경용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수술병원의 비용을 혼자 납부한 형은 자기가 반대하던 “재활치료 병원비”는 일체 납부를 거부하였다. 1달 병원비는 400만원(간병비 1일 9만원 포함)으로 “7개월간 병원비 2800만원을 3명(경용이와 두 동생)이 부담”하였다. 참 인색하기는?
아버지의 아내가 재활병원을 퇴원(2019.10.11.)하기 며칠 전에 경용이는 노모에게 “형(셋째 아들)을 재활병원에 불러들여 동생 경용이와 화해”하라고 부탁하였는데 셋째 아들은 노모의 부탁을 거절하고, 2020년의 설명절(2020.1.25일)에 노모가 계시는 경용이 집에 오지도 않았다.
요양원에 안보내고 동생 경용이가 모셔주니 화해를 거부하는 불효막심한 자였다. 설명절을 지낸 뒤에 1달도 안되어 “형은 딸의 결혼 청첩장”을 가지고 경용의 집에 노모를 찾아왔다.
경용이는 “설명절에 청첩장을 벌써 가지고 왔어야지” 하니, 동생에게 “싸가지 없이 말한다. 돈 받으러 구걸(청첩장 준 것. 지칭)하러 왔냐”고 하여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졌고, 노모가 계시는 자리라서 참아야 하였다. 지금 99세의 노모가 훗날, 세상을 뜨면 이런 형은 절대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형은 20년 넘게 오랜 외국생활(외교관)을 하면서, 노모를 모시고 명절과 제사를 지내준 동생 경용에게 해마다 전화해서 고맙다하였고,
정년 퇴직하면 노모를 모시겠다는 약속을 하여 노모를 모셔간 뒤로 “2년이 지나가자 노모를 모시기 싫어서 동생 경용에게 엄청난 화풀이”를 해버렸다.
이런 마음 심보(차가운 흙침대의 돌판에서 3년 넘게 지내니 입이 삐뚤어지고, 건강이 나빠질 수 밖에, 화장실 가다 넘어져 엉덩이 고관절이 부러지는 사건도 발생함) 때문에 노모를 모시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래서 요양원에 보내버리려는 형이었다.
요양원에 안보내고 경용이 집에서 4년째 매일 아침, 오후에 아버지의 아내를 모시고 다니며 주간보호시설(하남시 행복케어) 차량에 승하차 배웅을 해드리는 경용이다.
배웅 때에, 갑자기 형의 막말(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노모를 모시냐? 경용이 너는 젊고 건강할 때 모셨다 등등)이 떠올라 스쳐지나가면, 그 연상 뒤에 그렇게 모시기가 지옥일까? 싶어진다.
현재, 95세부터 99세의 늙으신 노모를 4년간 또다시 모시는 68세의 동생은 막말했던 형의 나이 65세 보다 3살이 많아져서 할말이 없다.
형제를 떠나 자기 생전의 나쁜 업이다.
형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다보니, 2019년도에는 머리 상태와 건강이 너무 안좋아 병원에 갔더니, 치매 전단계라는 진단까지 받아야 하였던 경용이었다. 경용의 건강을 해치고 고통과 피해만 주는 이런 형은 멀리해야 한다.
어린 날에, 짐 배달의 중노동을 했던 아픔도 모자라, 68세의 노년에는 척추장애인(나사못 4개를 박은 대수술)이 되어 다리가 저리고 아픈 증상을 안고 살아가는 이경용이다.
많은 것을 이루고 살아가는 낙(樂)과 복(福)으로 다리 아픔을 상쇄시켜 좋게 생각해버리면 경용의 마음은 편해진다.
형 집에 4년을 안모시게 했으면, 현재 32년을 모시고 있는 경용이에게 이런 좋지 못한, 건강에 안좋은 막말들이 연상되지 않을 걸 싶었다. 운명인걸 어쩌겠나?
안 마주치지고, 세월이 오래 지나면 다 잊혀져 사그라진다. 큰형처럼...
집안을 혹독한 가난에 빠뜨린 사건(과수원 팔아 탕진함) 등을 일으키며 불효와 형제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큰형을 용서하였기에 “안양 평촌 신도시 아파트”까지 사주었건만 전혀 개과천선이 안되었다.
경용의 아내는 큰형의 아파트 분양대금의 큰돈을 계좌송금해주었다.
아버지의 아내를 모시면서도 아무런 반대없이 남편 경용의 형제들을 수없이 그냥 도와준 아내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하기 그지 없다.
이런 경용의 아내에게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주는 손위 동서가 있으니? 참 안타깝다.
은혜와 고마움을 웬수(고통과 피해를 주는 사람)로 갚는 배은망덕한 인간(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잘하고 베푸는 마음이 없음)이 되면 안된다.
가난한 친구들(장모씨 등)에게도 잘 살게 해주었건만, 경용에게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러 큰 실망과 허탈감을 받기도 하였다.
이경용은 도와준 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개과천선이 안된 큰형 등을 오래동안, 안보고 사니 마음이 편하다.
동생 경용 부부가 딸과 함께 돌잔치를 앞둔 손자를 안고서 형님댁을 2번이나 방문(2018년)했는데, 형님 부부는 동생의 손자를 아예 보지도 않았고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큰 아빠는 아기를 전혀 예뻐하지 않네요. 딸의 말에 경용은 침묵했다.
누구든지 이웃집 아기를 보고서도 예뻐해주는데 동생의 손자 아기를 외면(형님네는 손자가 없어서 그런가? 질투. 시기? 별 생각이 스쳐감)하는 형님 부부의 모습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94세의 노모만이 아기를 보고 너무 예뻐하셨다.
동생사랑, 조카사랑, 아기 사랑이 없는 형님 부부인지라 경용에게 3년간 고통을?줄 수밖에...축하의 마음이 없는 이런 사람은 돌잔치, 결혼식에 초대하면 안된다.
어린 초등생 조카를 문전박대(경용의 딸 아들에게 큰집을 부모도 없이 왜 왔냐 하여, 딸이 화장실에서 울었다 함/큰 엄마한테 당한 어린 날의 깊은 상처임)한 일산 사건도 있었다. 그저 어쩌겠나? 싶다. 해탈해야 경용의 마음이 편해진다.
30여년 전(1990년대)에 셋째 형 앞으로 “돈 1천만원(그 당시 큰 돈임)을 대가없이 그냥 계좌송금”해주었는데, 손위 동서가 말하길 “서방님(경용) 돈을 왜 동서(경용 아내)이름으로 보내는 거야, 그 돈이 동서 돈”이야!
경용의 아내는 속이 상하고 괴로워도 지금까지 참고 지냈다.
돈 1천만원을 주면 고맙다고 말해야지, 손 아래 동서한테 갑질을 하였다. 이것보다 더한 갑질(아내를 자기 집에 불러 혼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줌)도 있었다.
1. 경용의 자식들에게 상처(문전 박대)를 주고, 2. 경용의 아내에게 상처(갑질)를 주는 “이런 형님 부부 댁이 그래도 잘 살라고”
하남 미사지구 아파트를 사게끔 만들어 2억 넘는 큰 이익을 남게 해준 동생 경용이다. 참말로 속창아리 없는 경용씨! 크게 깨우치길.
경용은 이런 형에게 “그전에도 좋은 부동산(안산 주택지의 1986년 분양, 묵동 이수아파트 2001년 매수 등)을 취득하게” 온갖 노력을 해주어도 고마운 줄을 모르는 형은 너무 인색하여 경용에게 지금껏 한번도 한턱 쏠줄도 모른다.
➀. 형이 1986년에 취득한 안산의 주택지 80평의 취득 가격은 약 1240만원으로 경용의 경우에는 “6배 이상의 이익”을 가져다 준 좋은 물건이었다.
투자의 핵심은 4년(1986년~1990년) 뒤에 4호선 안산선(상계역)이 개통이 된다. 1986년에 평당 16원만원대에 취득해서 1990년에는 평당 100만원 이상이 되니, 1990년 이후에 팔라고 형에게 알려줬다. 엄청난 투자 이익을 주는 물건이었다.
1990년에 팔면, 약 8천만원 이상으로 1990년의 분당 신도시 32평 분양가격이 5800만원으로 아파트를 분양 취득하고도 남을 큰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경용이는 이런 투자 수익을 올려서 큰형에게 평촌 아파트를 사주게 되었다.
안산 주택지로 팔아서 큰 이익을 봤을 셋째 형(함구함)이 얼마에 팔았는지? 동생 경용은 전혀 모른다. 큰이익을 봤다면서 “술 한잔을 사줄 도량”도 없는 형이다. 남만도 못하다.
서울시 중랑구 묵동에서 안산까지 갈려면 그당시에,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로, 투자 분석 등으로 수없이 다녔다. 동생 경용이가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어 얻은 고급 투자정보를 형에게 주었지만, 훗날 도움이 전혀 안 되는 이기적 처신만 한다.
➁. 묵동 이수아파트 2001년도 취득가격은 약1억9천만원인데 4억7천만원에 팔아서 약 “2억8천만원의 이익”을 본 형이다.
③. 미사 아파트는 취득가격이 약 6억원인데 2019년도에 8억5500만원에 팔아서 “2억5500만원”의 이익“을 본 형이다.
급급매로 8억5500만원에 최고로 싸게 팔린 아파트가 있다고, 학사 부동산에서 알려줘서 알게 되었다.
④. 구리시 조합아파트 토지관련 소송 건으로 3500만원 투자 금액이 1억500만원으로 소송이 끝날때까지 너무 많은 소송 글을 써준 동생 경용이다.
소송 글을 쓰기도 힘들었고 동생 경용이의 건축 공사 일과 겹쳐서 셋째 형한테 변호사도 있으니, 그만 쓰겠다고 하였더니,
”너와의 인연을 끊고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막말을 하던 셋째의 처신에 한동안 너무 괴로웠고 소송 글을 계속 써주었는데 정말, 도움이 전혀 안되는 셋째 형이었다.
경용이는 공치사를 들으려고 하는게 아니라, 상기와 같은 물건을 취득하게 해주려면 엄청난 고생(정보 수집, 물건 분석, 현장 답사, 비용 수반 등)이 뒤따른다.
남에게는 그냥 공짜로 상기와 같이 수익이 좋은 부동산 취득을 도와주지 않는다. 오로지 동생이 형을 잘살게 도와주려고 ”한푼의 수고비“도 안받고 했던 일이었다.
경용은 행당동 한신아파트와 묵동 이수 아파트 정보를 준 이순섭씨에게 고맙다고 정보비를 2번이나 주었다. 돈을 벌게 해주었는데 공짜로 입 닦으면 안된다.
동생때문에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었건만 ”노모를 모시기 싫어서 동생 경용이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막장드라마와 같은 이기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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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아내인 어머니를 28년(1986.6월~2014.12월)간 정성을 다해 모셔준 경용의 아내였다. 노모는 셋째 형네 집에는 절대로 안가겠다고 하였으나,
경용이 보다 2살 많은 형은 노모를 ➀.최선을 다해 모시겠다. ➁.요양원에는 절대로 안보내겠다. 면서 노모를 형집으로 2014.12월에 모셔갔다.
모셔간지 2년이 지나자 모시기 싫어서 ”2년에 걸쳐 동생 경용이에게 화풀이“(2가지 사건 등)를 하였다.
갑자기 노모가 넘어져서 고관절 엉덩이 뼈가 2019.1.1.일에 부러지자, 형은 요양원만을 주장하였으며, 요양원에 안보내고 경용이 집에 다시 모시고 있던 2020.2월(형의 딸 청첩장 사건일)까지
“1년간을 경용이와 대화를 거부”하면서 “총 3년간을 괴롭히며 고통과 상처”를 주었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동생 경용이가 ➀. 5년 동안 형의 중고등학교 뒷바라지를 해주고, ➁. 형이 부자가 되라고 많이 도와주고, ③. 형이 고위공직을 정년퇴직할때까지 노모를 모셔준 이런 동생에게 “3년에 걸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하여 완전히 질려버린 경용”이다.
이런 형(절대로 고칠 수 없는 고착화된 이기적 성품)은 안보고 살아야 ➀.마음이 편하게 ➁.행복하게 ③.건강하게 살 수 있음을 경용이는 깊이 깊이 3년에 걸쳐 처절하게 깨달았다. 이런 불효 자식은 성품 자체가 늙으신 노모를 모시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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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아내는 자식이 불효, 큰 죄를 지어도 자식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성품입니다. 성군이신 세종대왕께서도 천하의 불효자식인 수양대군처럼 자식은 마음대로 안됩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 운이 없는 경용이의 운명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형제간에 분란은 반드시 있으며 불효자도 있기 마련이다.
※. 신분이 낮은 천민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어린 시절.
“천민의 자식, 종의 자식도 겪지 못할 고생을 어린 나이부터 7년(만13세~만20세)동안, 심하게 겪었다.”
만13살의 어린 나이부터 학교를 다닐 희망도 없이, ①. 수도가 없어 주막 식당에 쓸 물을 밖에서 물통으로 나르는 중노동(양손에 물통 2개)에 시달렸고
➁. 음식배달, 청소, 계산, 설거지까지 해야 하였다.
손님들이 “식당 뽀이”로 알고 심하게 반말하여 “아버지가 옆에서 내 자식인데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이웃의 쌀가게, 사과가게, 생선가게 등의 부자가 아닌 자식들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 자식들보다 신분이 낮은 천민”같은 생각이 들때가 있었다.
어린 날의 슬픔이고 괴로움으로 이경용의 마음 밑바닥에 먼지처럼 가라앉아 남아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니, 사그라져 간다.
식당, 공장의 4년을 거쳐 짐 자전거 배달 3년의 중노동(양손에 20킬로의 2통을 들고 다님)에 시달리다보니, 양팔은 너무 길어지고 키는 만15살에 멈추어버렸다.
7형제 중에 키가 가장 작은 170센티이다. 창동 식당에서 ①키가 작다고 ➁또 다른 트집을 잡아 개망신을 주는 형이다.
그 형의 중고등학교 5년을 뒷바라지 해준 동생에 대한 아주 못된 대접이었다. 경용은 이런 막말에 대하여 “말 못할 괴로움”을 받지만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참아야 하는 운명(노모를 모시는 동안)이다.
형의 간판은 ①명문 중학교, ①명문 고등학교, ③야간 대학교, ④일본의 명문대학교 2년 유학, ⑤고위공직을 정년 퇴직하여 고위공직자(부동산 업소에 고위공직을 꼭 말하고 다님)라고 초청받아 “주례사”도 한다.
※. 간판이 좋은 셋째 형이 입장이 반대로 바꿔져서 “동생 경용이 같은 간판(초등졸. 검정고시)에 처한 환경”에서 ➀. 1달 공부하여 국세청 시험에 합격하고 ➁. 2달 공부해서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동생의 간판은 ①초등학교 졸업, ➁고졸 검정고시 ③하위 공무원으로 내놓을 것이 없어서 동생을 함부로 대한다.(창동 식당 사건 등으로 무시 및 막말함)
동생 경용이는 천민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린 날에 학교 다닐 희망도 없이 고생을 하면서 형의 학교 5년을 뒷바라지 해주느라 중고등학교도 못 다녔다.
이런 동생한테 야간대학도 가지 말란다. 동생 잘되라고 지원을 안해주니 형의 간판은 화려하고 동생의 간판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한국 문단의 거목 서정주 시인은 애비는 종이었다고 고백(안해도 됨)하였다. 경용이의 가까운 바로 위 7대조 할아버지는 호조판서(경제부 장관격)였다.
가문, 신분의 높음(고위 공직)과 낮음(하위 공직)을 떠나 사람(참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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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에 재활 병원을 나오셔서, 그후 3번이나 설명절에 자식들과 손자 며느리들한테까지 세배를 받으시는 늙으신 99세의 아버지의 아내를 보면 감개무량이다.
아버지의 아내가 99세인데도 소고기 육회를 너무 좋아하셔서 매주 2번씩 육회를 해주는 경용의 아내이다. 매일 저녁, 60대의 아들 며느리와 셋이서 고스톱(치매 예방 차원)을 치시는 아버지의 아내는 고스톱하면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신다.
50년 전인 1973년도에 매일 현금으로 들어오는 막걸리 배달일당 500원(1통 5원Ⅹ 하루 100통 배달)과 배달 월급 54,000원[1통 18원(13원에서 인상됨)Ⅹ100통Ⅹ30일]을 병들어 누워계신 아버지께 갖다드렸더니,
넷째 아들 경용이에게 2년만 배달해서 돈을 벌면 집을 사겠다고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행복한 추억으로 스쳐지나기도 한다.
※. 1973년도에 서울 상계동에서 호떡 1개는 5원이고, 짜장면이 30원할때였다.
50년 전인 1973년도에 상계동의 집값은 70만원으로 이경용의 배달 1년 수입은 65만원이고 2년 수입은 130만원으로 집을 사고도 남을 돈을 벌었다. 1973년 봄에 팔았던 과수원의 매도 금액이 105만원이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만18세도 안된 경용이는 형 3명이 있었건만 혼자 돈을 벌어 아버지의 약값과 형의 명문 중고등학교 하숙비, 학비와 나이 어린 동생3명의 학교까지 책임을 져야 하였다.
아버지 살아생전의(50년 전)일로 아련한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살아생전에 못 갚았던 아버지의 빚(정미소 공장 부도)을 이자 쳐서 전부 갚아드렸습니다.
경용은 아내와 함께 빚 받을 사람을 찾아내어 1992년(안산 땅을 1990년에 팔아서 큰돈이 생기자, 아내와 상의해서 큰형 아파트를 사주고, 부모님의 빚을 갚게 됨.)에 갚았고, 마지막 한사람(국제 양화점, 서씨)까지 2006년에 찾아냈습니다.
37년(1969년~2006년)만에 갚게 된 마지막 빚은 이자를 후하게 계산하여 ”원금 2만원의 50배인 100만원“을 갚았더니, 아버지의 아내는 발 뻗고 잘 수 있다면서 우셨습니다.
초라한 주막 식당에서 빚 독촉에 시달렸던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려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가 57세(1981년)일 때, 상계 시장 안의 주막식당(밥.술.안주 팔음)을 그만 못하게 하고 편히 쉬게 해드렸습니다. 나주 정미소 공장이 망하여, 1969년에 서울로 올라와 12년간의 주막 식당 고생을 끝내드린 넷째 아들 경용이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경용이를 돌봐주셨는지, 짐 자전거 배달 일을 그만두고 독서실에서 1달 공부하여 국세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좋은 자질과 능력을 물려주시어 부동산 사업 등으로 돈을 벌어 가난한 형, 누나, 동생들이 잘 살게 도와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모님이신 경용이의 외할머니를 1987년도인 90세까지 모시면서 매달 용돈을 드리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경용이의 아들은 후에, 부모님의 도움을 한푼도 안받고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경용이 수중에는 여유 돈이 없어 빚내어, 도와줘야하는데 아들이 정말 고맙고 복 받은 일입니다. 옷과 구두도 사주고, 해외.제주도 여행도 시켜주는 아들입니다.
만13살부터 지금 68세까지의 파란만장했던 경용이의 삶 속에서 크게 속을 썩이는 형들을 대신하여 아들이 잘 해주니, 큰 복으로 여깁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시기 전에, 큰아들은 자식이 아니다”고 유언하셨습니다. 1973년도에 과수원을 팔은 ”105만원으로 집을 사는데 70만원을 쓰고, 나머지 35만원은 아버지의 병원비 등“으로 쓰려고 했는데,
그 ”105만원을 전부 탕진한 큰아들이 세상을 하직(1974.5.6.일)하기 전인 유언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자, ”자식이 아니라는 유언을 남기신 불쌍한 아버님“이셨다.
아버지의 유언이지만, 그래도 ”큰아들과 동생들이 우애하며 아버지의 아내에게 효도하는 화목한 집안“을 만들기 위하여, 큰형을 용서해주는 마음으로 집이 없는 큰형에게 32평 아파트를 동생 경용 부부가 사주었습니다.
큰형은 1996년 추석 때에 형제간의 불화(넷째 동생에게 집을 공짜로 받은 것도 부족하여 셋째 동생에게 도와 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시비를 걸음)를 일으켰고,
그후 수없이 분란(명절마다 제때에 안와서 노모를 화나게 하고, 동생 부동산 사무실 일 등)을 일으켜 ”동생 경용이가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자 큰형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15년 넘게 발을 끊었습니다.“
개과천선이 안된 큰형이기에 안보고 사니 마음이 너무 편합니다.
작년(2022년)에 77평의 남양주 땅을 팔아 세금을 내고, 은행 빚을 일부 갚은 뒤에 약 ”1억원의 목돈을 따로 만들어서 형1명, 동생3명, 누나, 외사촌 누나, 처제 등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는데, 몸이 아픈 것 등의 경중을 감안하여 분배해주었습니다.
지금 도와주지 않으면 나중에 주기 힘들다고 ”아내와 상의“해서 1억을 주게 되었다. 1억원이면 매월 50만원(지금 6.14%의 4억원 은행대출 등)이 넘는 이자를 줄일 수 있다.
많은 은행 빚 중에서 딸, 사위 아파트에서 빌려쓴 2억원이 넘는 은행 빚부터 먼저 갚아야 했지만 나중에 갚을 것이다.
결혼 생활 37년 동안, 이자 지출 없이 살아본 적이 없어서 경용이 아내는 빚 걱정없이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능력으로 ”경용이 혼자만 잘 살아서는 안되며“, 못배우고 가난하고 어려운 형제 등을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하여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즘 ”고금리 때문에 은행 이자가 너무 많이 나가서 생활이 적자“이지만, 팔아서 쓸 부동산이 있어서 가난한 형제 등에 비하면 많이 부자입니다.
베풀고 도와줄 수 있는 것도 큰 복(福)이고 낙(樂)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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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경용이 집을 떠날때인 2014.12월에 ”어머님 앞 정기예금 3천만원“이 있었는데 형이 모신 뒤로 8만 2천원만 남기고 써버린 뒤에
요양원에 안가는 것으로 확정되자, 즉시 1천만원을 입금하였고, 경용이가 잘못을 지적하자 1천만원만을 추가 입금하였는데
경용이는 어머니 돈을 이렇게 형이 마음대로 쓰는 것에 대하여 이해가 안 갔으며, 어머님이 누나들한테는 돈 한푼을 못쓰게 하면서??
형 집에 4년 있을 때 경용이는 어머님 용돈으로 매월 50만원을 입금해줬는데 경용이가 4년째 모시는 동안 50만원의 반도 안되는 용돈을 입금해주는 형이다.
어머님 앞으로 용돈 쓰는 것도 그렇게 아까울까? 싶다. 형 부부는
”➀. 3천만원 건, ➁. 매월 50만원 용돈 건“을 상의는 하는 것인지?
③. 요양원에 안보내고 동생이 모셔주면 더 잘해주자(용돈 등)고 형 부부는 상의도 안하는지? 참말로 인색하고 불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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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형님 집에 아버지의 아내가 4년 계실 때, 경용이는 ”매월 한번씩 꼭 어머니, 아내와 셋이서 강화도, 일산 등“으로 바깥구경 겸, 저녁 외식을 함께” 하였다.
셋째 형네 집에서 4년(2014.12~2018.12월)간을 모시면서 “3년 넘게 흙침대의 차가운 돌판(전기 코드 안 꽃음: 무관심)위에서 잠을 주무신 영향”으로 건강이 나빠져서 음식점에 출입할 때 마다 “잘 걷지를 못해 휠체어를 타고 내리신 노모”였다.
경용이 집에서 28년을 모셨고, 또 다시 모신지 벌써 4년째이다. 지금, 99세의 어머니는 음식점에 갈 때에 휠체어를 안타시며, 94세 때보다 더 잘 걸으신다.
95세 노인의 고관절 뼈가 부러져 수술 후에 더 잘 걸으신다는 것은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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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세인 아버지의 아내를 집에 두고서는 60대의 아들 경용이 부부는 단 하루도 여행을 갈 수가 없는 것이 너무 아쉽지만 즐겁게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큰형님 아들인 이우순 부부께서 아버지의 아내에게 깍듯이 잘합니다.
이우순 사촌 형님의 부인이신 형수(탁봉희)님 덕분에 아버지의 아내를 2번이나 맡기고 경용이 부부는 아들과 함께 강릉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 올 수 있었습니다. 너무 고마우신 큰 집 형수님이십니다. 사촌 형수님이 형제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아침 일찍, 영원한 애인이며 친구인 아내와 차 드라이브 구경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점심 외식도 하며 즐겁게 행복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2023. 1. 16일 이경용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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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언:
부모님은 많은 자식(7남2녀)을 낳으셨지만 설명절, 추석이 오면 대가족의 음식을 거의 혼자 만드는 경용의 아내이다.
이번 설명절(2023. 1. 22일) 음식도 거의 혼자 만들었고, 노모의 손자 며느리까지 많은 가족들이 모여 99세 노모께 세배를 드리는 화목한 명절을 보냈다.
저녁에는 노모의 딸, 손녀사위 등, 7명이 찾아와 노모께 세배드렸고, 저녁식사까지 차려 준 후에 “허리병이 와서 4일 동안 너무 아파하는 경용의 아내”이다.
설명절 3일 후에 하남 S병원에서 허리주사, 물리치료, 7일치 약 처방을 받은 아내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매번 명절마다 명절 후에 허리, 팔 등이 아파서 고생하는 아내를 옆에서 보는 경용의 마음은 항상, 아프지만 어떻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도 낙이고 복이라 여겨야 마음이 편해진다.
90세 넘으신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 집은 같이 사는 며느리가 힘들 수밖에 없다.
32년 동안, 정성을 다해 노모를 모셔주고 “대가족의 명절과 제사”를 지내준 아내에게 그저 고맙고 미안하기 그지없는 경용이다.
경용이의 외가집 외할머니 제사에 32년 동안, 노모를 대동하고 남편과 함께 한번도 빠지지 않고 적극 참석해준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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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형은 노모를 모시고 아버지 제사를 2번 지내던 2016년 경에, 경용이 아내에게 말하기를 “노모 사후에 집에서 지내는 제사를 없애고 형제들이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는 것”으로 대체하자고 동생 경용이를 설득시키라 하였다.
※. 노모를 모시기도 정말, 싫어하고, 부모 제사도 극도로 싫어하는 셋째 형이다.
※. 훗날, 제사와 명절에 식당에서 만날 형제 모임에 경용이는 절대 불참한다.
※. 노모 살아생전에 “3년간 동생을 괴롭히며 불효를 저지른 자”에게 노모 사후에 제사는 필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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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용이는 결혼하기 전에 맞선을 100번도 넘게 보았다. 외할머니, 어머니, 동생 3명과 같이 살자하면 좋다는 여자가 하나도 없었다.
아내와 맞선을 보면서, 형이 3명이나 있어 “1~2년만 살면 형이 모실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경용이었다.
아내를 속여 32년의 오랜세월을 대가족의 노모를 모시는 동안, 수많은 시련과 상처, 고통을 겪게 한 것에 대하여 너무나 죄스러운 경용이다.
이런 연유로 아내만을 사랑하기에 “절세미인 양귀비같이 예쁜 여자가 옆에 있어도 돌맹이, 막대기”로 본다.
지난 일은 파묻어 버리고, 앞으로 아내와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복 받는 인생이다.
2023. 1. 26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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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살아생전의 옛날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나서 쓴 글인데
이경용의 지난 삶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