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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몽(占夢)
▣ 작품 내용
옛날에 유생 세 사람이 있었다. 장차 과거 시험을 보러 가고자 하는데, 한 사람은 꿈에 거울이 땅에 떨어졌고, 한 사람은 쑥으로 만든 사람〔애부(艾夫):쑥으로 만든 인형]을 문 위에 달아 놓았으며, 또 한 사람은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 세 유생이 꿈을 꿈
모두 함께 꿈을 점치는 사람의 집을 찾아갔다. 꿈점 치는 사람은 없고 그의 아들만이 있었다. 세 사람이 꿈의 길흉을 물으니 그 아들이 점을 치면서,
"세 가지 꿈이 다 상서롭지 않습니다.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 점술가 아들의 해몽
조금 후에 꿈점 치는 사람이 와서 자기 이들을 꾸짖고는 시를 지어 주기를,
艾夫人所望 (애부인소망) 쑥 인형은 사람이 우러르는 것이요.
鏡落豈無聲(경락기무성) 거울이 떨어지니 어찌 소리가 없을꼬.
花落應有實(화락응유실) 꽃이 떨어지면 응당 열매가 있을 것이니,
三子共成名(삼자공성명) 세 분은 함께 이름을 이루리라.
라고 하였다." 과연 그 세 사람은 모두 과거 시험에 급제하였다." ▶ 점술가의 해몽과 세 유생의 급제
▣ 감상 길라잡이
용재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서 발췌한 꿈을 소재로 한 설화이다. 같은 문제를 앞에 놓고 그것을 풀이할 때, 그 방법과 결과가 다를 수 있듯 점술가와 그 아들의 해석결과가 다르다.
부정적으로 풀이해 준 아들과는 달리 긍정적으로 풀이해 준 점술가 덕분에 꿈을 풀이하러 왔던 유생 3인은 과거 시험에 모두 급제하였다 긍정적인 꿈풀이 덕분에 용기를 얻었음이 분명하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가능성을 찾아 힘써야 한다는, 평범한 듯 보이는 깊은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내용에서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속담을 떠올릴 수 있다. 한편, 춘향전의 옥중 꿈풀이인 '화락 하니 능설실 이요 파경하니 기무성가. 문상에 현우인하니 만인이 개앙시라.'는 이설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핵심사항
▶작자 : 성현 채록
▶갈래 : 설화, 패관 문학
▶연대 : 조선 성종 때
▶짜임 : 3단 구성 (기-서-결)
▶표현 : 열거법, 설의법
▶제재 : 꿈풀이
▶주제 : 꿈 속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용기를 줌.
▶출전 : 용재총화
▣ 어휘 및 구절 풀이
#. · 유생 : 유학을 닦는 선비 · 애부 : 쑥으로 만든 인형. 단오 때 문 위에 걸어두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 함 · 상서 : 복되고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 · 인소망 : 사람들이 우러를 것이다. · 경락 : 거울이 떨어지다. · 기무성 : 어찌 소리가 없겠는가. · 화락 : 꽃이 떨어지다. · 응유실 : 응당 열매가 있다. · 삼자 : 세 사람. · 공성명 : 함께 출세할 것이다.
#. 세가지 꿈이∼ 못하겠습니다. : 점술가 아들의 부정적인 해몽. 인생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이 같은 해석은 긍정적인 가치관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대조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 과연 그∼ 시험에 급제하였다. : 꿈속의 가능성을 찾아내어 용기를 준 점술가의 해몽이 가져다 준 결과이다.
▣ 참고 자료
◇ 성현(成俔 ;1439~1504) : 조선 전기의 명신·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경숙(磬叔). 호 용재(齋)·허백당(虛白堂). 시호 문대(文戴). 1462년(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박사(博士)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록(司錄) 등을 거쳐 68년(예종 즉위) 예문관(藝文館) 수찬(修撰)을 지냈다. 형 임(任)을 따라 명(明)나라에 가는 도중 기행시를 지어 《관광록(觀光錄)》을 엮었다. 75년 다시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때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88년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 해 유자광(柳子光) 등과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했으며 관상감(觀象監) 등의 중요성을 역설, 격상시켰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죽은 지 수개월 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왕명에 따라 유자광 등과 《쌍화점(雙花店)》 등 고려가사(高麗歌詞)를 바로잡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 문집 《용재총화(齋叢話)》는 조선 전기의 정치·사회·제도·문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허백당집(虛白堂集)》 《풍아록(風雅錄)》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주의패설(奏議稗說)》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많은 저서가 있다.
◇ 용재총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활자본. 3권 3책. 1525년(중종 20)에 경주에서 간행. 그 뒤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간행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책록되어 널리 알려졌다.이 책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의 이 책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의 풍속 지리 역사 문물 제도 음악 문학 인물 설화 등 문화전반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당시의 전반적인 문제를 살 필수 있는 저술이 내용 서술상의 특징 신분 지위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인정세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유려한 산문을 구사한 점이다. 특히 잔치음식의 종류와 맛의 특징, 나례 등을 수록하고 유명인의 일화 일반 대중이나 천인들의 소화 등 다양한 설화를 수록하고 있어서 민속학 및 구비 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이용되고 있다.내용은 문담(文談)·시화(詩話)·서화(書畵)에 대한 이야기와 인물평(人物評)·사화(史話)·실력담(實歷談) 등을 모아 엮은 것으로, 문장이 아름다운 조선시대 수필문학의 백미편(白眉篇)이다. 전편이 《대동야승》에 실려 있고, 시화(詩話) 부분은 《시화총림(詩話叢林)》에도 들어 있다. 1934년 계유출판사(癸酉出版社)에서 간행한 《조선야사전집(朝鮮野史全集)》에 한글로 토를 달아 실었다. 64년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국역하여 《파한집(破閑集)》과 합본(合本)으로 간행한 바 있다. 고려에서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형성·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물제도·문화·역사·종교·예술 등 문화발전을 다루고 있어 민속학이나 구비문학 연구의 자료로서 중요하다.
◇ 점복(占卜)
미래에 대한 어떤 징조를 미리 판단하고자 하는 기술. 단순히 점(占)이라고도 한다. 자연현상이나 생리적 현상을 판단하는 것과 인위적(人爲的)으로 어떤 현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판단한 결과로써 장래를 점치는 것 등이 있다. 이같은 속신(俗信)에는 점복과 함께 예조(豫兆)·금기(禁忌)·주술(呪術) 등이 있어 이들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으며, 이 밖에 귀신·도깨비·부적(符籍)까지도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조나 점복은 미래를 사전에 예지(豫知)하는 지식과 기술이며 금기와 주술은 불측(不測)의 결과를 예방하고 처리하는 기술이다.
점복의 역사는 인류생활과 더불어 찾아볼 수 있고, 점복의 발달과 더불어 인류의 문명도 발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점을 치는 목적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기에서 진실이란 신의(神意)를 말하는 것으로, 고대인들은 신의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면 곧 신의 벌을 받는 것으로 믿었으며 그 신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는 먼저 신의를 정확히 파악하여 그 신의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점복이 필요했을 것이며, 이러한 목적은 점차 확대되어 나중에는 점복이 범인(犯人)의 방향이나 실물(失物)의 행방을 추측하여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까지 이용되었다.
둘째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하여 점복이 생겼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지욕(豫知欲)은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이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아왔을 때, 새해에 전개될 일들을 미리 알고자 하는 것도 인간의 기본심리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예지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점복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긴 점복은 동서양에서 문화정도의 고저(高低)와 상관없이 일찍부터 어느 민족에게나 있어왔다. 유럽에서는 바빌로니아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성술(占星術)과 동물의 간 등에 의하여 점치는 내장점(內臟占)이 일찍이 발달하였고, 점장(占杖)에 의하여 지하수나 광맥을 찾아내는 점법이 있는가 하면, 무심히 책을 폈을 때 먼저 눈에 띄는 문장으로 점을 치는 개전점(開典占) 등도 있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서로써 개전점을 쳤는데, 이것을 성서점이라 하였다. 또 트럼프로 점치는 가루다점도 유명하였으며 몽점(夢占)도 있었다. 동양에서는 인도의 점성술, 중국의 복서(卜筮)가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특히 중국의 점복은 한국과 일본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대표적인 점복은 복서로서, 복(卜)은 수골(獸骨)이나 귀갑(龜甲)을 사용하여 행하는 점이며 서(筮)는 서죽(筮竹)과 산목(算木)을 사용하는 점이다. 수골은 견갑골(肩胛骨), 귀갑은 거북의 복부(腹部) 껍질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불에 구워 트는 모양으로 길흉을 점쳤다. 이 점의 뜻을 판단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점자(占者)를 두기도 하였다. 서는 《주역(周易)》을 전거(典據)로 삼아 음양의 산목과 서죽의 산술적 조작으로 괘를 얻어 판단하는 점으로, 민간에서 크게 발전하여 오행설(五行說)과 간지설(干支說)을 받아들이면서 몇 개의 유파가 생겼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서죽이나 산목 대신 동전 등을 이용하는 역점이 일반화되었다. 이들 점법 이외에도 중국에서는 각종 점성술이 발달하여 중국의 역사는 실로 점성술사에 의하여 발달되었다고도 한다.
한국의 점복도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미 상고시대부터 복, 즉 수골이나 귀갑을 이용하는 점이 있었다. 그 예로서 부여의 점속(占俗)을 보면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톱을 보고 전쟁의 승패를 미리 점쳤다. 즉 소의 발톱이 벌어져 있으면 흉(凶)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했다. 이것은 분리와 결합을 뜻하는 것으로 결합하면 이긴다는 진리를 나타낸다. 점복은 상대(上代)로 소급할수록 정치와 밀착되었고 그 결과를 믿는 경향도 강하였다. 점의 결과를 판단하는 기술은 원래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것이어서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에 민심을 통합하기 위하여는 몇 개의 결과가 나와서는 곤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점을 치는 과정도 비밀에 싸여 있었고 그 점복자는 권력과 밀착된 전문가가 관장하였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점복은 크게 나누어 자연적인 점복과 인위적인 점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어떤 특이한 자연현상을 통하여 미래의 천후를 추측한다거나 어업·수렵 등의 생산 결과를 예지하는 일월성복(日月星卜)·홍복(虹卜)·운복(雲卜)·수빙점(水氷占)·천기점(天氣占) 등과 같은 자연현상점을 말하며, 후자는 적극적인 점복술로 탁선(託宣)·주법(呪法) 등으로 길흉을 판단하는 몽점(夢占)·신비점(神秘占)·작괘(作卦)·현상점(現象占) 등을 가리킨다. 이 인위적 점복을 행하는 점자를 그 직능에 따라 전문적인 점자와 부업적인 점자로 구분할 수 있어, 전자는 고대 사회의 일관(日官)·일자(日者)·무자(巫者)·사무(師巫)·점복관(占卜官)·복술자·신점자(神占者) 등이 이에 해당되며, 후자는 다른 직업을 주업으로 하면서 부업으로 점복 행위를 하는 기도업자·승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위정자는 점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점복가를 두었는데 백제에서는 이들을 일자 또는 무자라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사무 또는 단순히 무(巫)라 하였다. 신라에 이르러 이들을 일관이라 부르고 그들이 소속된 관청을 관상감(觀象監)이라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시대에 구체화되어 천문·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를 담당하는 태사국(太史局)과 점복을 담당하는 태복감(太卜監)을 두고 여기에 복박사직(卜博士職)과 복정직(卜正職)을 임명함으로써 점복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었다. 이들 관청은 그 후 여러 가지 명칭으로 개칭되는 한편 과거제도를 통하여 점복사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서운관(書雲觀)을 두고 천문·지리·역수·점산(占算) 등을 관장하게 하였다. 한편 이들 국가기관이 관장하는 점복과 병행하여 민간에서도 많은 점복술이 오랜 세월을 두고 깊이 뿌리를 박게 되었다.
특히 점세적(占歲的) 행사가 크게 성행하여 전통적인 점복 이외에도 토정비결(土亭秘訣)·직성행년법(直星行年法)·행년치성법(行年致誠法)·오행점(五行占)·행년액일법(行年厄日法)·출행법(出行法)·분출행법(分出行法)·절초법(折草法)·구궁법(九宮法)·사주법(四柱法)·병인마채점(病人馬采占)·병인산점(病人算占)·천간자병점(天干字病占)·지지자병점(地支字病占) 등 각종 점속이 횡행하였으며 그 일부는 지금도 전한다. 현대 과학 문명의 발달은 이들 미속(迷俗)을 근본적으로 부인하여 이를 불식시키려 하나 인간의 본능 속에 자신의 운명과 길흉을 예지하려는 심리작용이 있는 한 좀처럼 이들 속신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동아대백과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