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올린 <지공선사 황노인>에 문우께서 퇴고를 보내 주셨다. 금쪽같은 반가움으로 읽고 또 읽었다.
한 마디도 버릴 것 없는 소중한 의견이었다. 제목을 바꾸고 외래어 두개를 고쳤다. 서두와 연결되는 경로석 이야기로
말미를 덛붙여 보았다. 제목을 바꾼것은 산만한 노인네의 하루가 되다보니 주제가 흐트러진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서술이 많아 묘사의 재미가 적다는 지적에는 서술능력의 한계라 독자께서 대안을 주시면 참조할 작정이다.
앞으로는 톡으로보다 공개적으로 카페 댓글로 남겨 주시면 다은 독자님들의 퇴고의욕도 북돋울 수 있을 것같아
서스름없는 답글을 욕심내보기도 한다.
황 노인의 어느날
어르신께서 경로석에 앉은 아가씨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가씨는 자기도 요금을 지불하고 승차했노라고 착석권을 주장하였다. 어르신께서 요금을 안 내고 타는 사람들의 전용좌석임을 주지시켰다. 실화일 턱은 없고 경로사상을 일깨우는 일화겠지만 우스개를 넘어 아픔으로 저려왔다.
지공선사 중에는 독거노인이 많다. 단어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일상에서 겪는 쓸쓸함을 대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철저하게 혼자이므로 하여 대중속의 고독은 사치다. 가족구조가 분열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독거노인은 널부러진 현실이다.
가정이라고 하는 울이 안식처요 피난처였다. 자식들이 독립해 나가면 부부는 겨울들판 같은 스산한 낯선 분위기를 만난다. 그러다 또 한 쪽이 먼저 가면 독거노인이 된다. 희망해서도 아니고 강제집행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다. 당연한 결과지만 미리 대비하기가 쉽지 않아서 마치 내동댕이쳐진 돌멩이 같은 심경이 된다.
생로병사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윤회다. 알기야 하지만 그 변화속도가 워낙 빨라 어느새 종점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질병이 아니라도 근력이 노화 되고 정신 쇠약이 겹쳐 질병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는다. 당연히 거동이 불편해지고 사고의 폭이 좁아진다. 그러면서 조금씩 죽음을 달관하는 자세를 익힌다.
아침저녁 깃발을 들고 건널목을 지키는 노인들. 초등학교 인근에서 아이들 등하교를 돕는 노인들. 폐기된 종이상자를 모아 손수레에 담아 끄는 노인들. 장기판, 바둑판 훈수에 여념 없는 노인들. 생활은 다른 듯하지만 비슷한 점은 잠을 깨는 것이 고통이라는 점이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복지 현장에는 시간 죽이기 지식을 전달하고자 애쓰는 정책이 난무한다. 동참하는 노인들은 그나마 호주머니에 여유가 있다. 당연히 점심은 무료라서 수강증과 식권을 동시에 수령한다. 점심시간을 기다리며 구청응달에서 한담을 나누는 다른 어르신들은 어려서부터 뒷자리를 잘 챙기는 습관이 있었던가 싶다.
괜찮은 정책 같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누가 어떻게 내 시신을 거두어줄 것인가. 고독을 넘어 서러움으로 다가오는 순간. 산소마스크를 쓴 채 죽고 싶지 않다는 공통된 희망을 품는다. 정신이 혼미해 지면 그런 희망이 있었던지 조차 모른다. 아무것도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홀로 맞이하는 점심시간. 기본적 본능을 충족하는 시간이건만 때로는 고역이다. 쌀을 씻으면서 설거지를 걱정한다. 겨울철 냉온수가 자유롭지 못하면 라면으로 손이 간다. 오늘은 아예 무료급식소에 가고 싶다. 걸친 옷에 반시간정도면 전철역에 다다를 수 있다. 오늘도 김 씨랑 박 씨가 줄 앞자리를 지킬 터이다. 배보다 만남이 더 고프다.
세탁은 날이 궂으니 좋아지면 하자. 목욕은 오늘 거르자. 도둑이 왔다가 보태주고 갈 살림에 자물쇠를 야물게 채운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지하철 입구 계단을 내려선다.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황 노인에겐 지하철로 이어지는 경사가 가파르기만 하다.
낮 시간 대부분을 지하철에서 보내는 문 씨를 만난다. 그는 시내 전역의 무료 급식소를 꿰뚫고 있다. 구서 역 가느냐며 질문으로 인사를 대신 한다. 그는 항상 중절모에 다림질이 잘된 옷매무새로 독거노인이 아닌 티를 낸다. 그는 문화 수준이 높아 각종 무료공연 프로그램도 빠짐없이 외고 다닌다.
훈수를 둘라치면 빤히 보이던 장기도 돈을 걸고 앉으면 안 보인다. 잃는 게 싫어서 아예 훈수꾼으로 남는다. 문 씨는 영도물량장에 품바공연이 있으니 가잔다. 무릎에 좋다는 알약 한 병을 사서 의기양양하게 귀가한다. 두 달 치 물세가 5천원이라는 주인집 새댁의 메모가 자물통 고리에 꽂혀 있다.
운동복 아랫단이 느슨하여 반짇고리를 뒤적여도 마땅한 고무줄이 없다. 아직 연속극 시간이 멀었다. 저녁을 안친다. 냉장고에 먹다 남은 소시지가 있을 게다. 동회에서 나누어준 발효간장과 김치가 있어서 반찬 걱정은 없다. 김치찌개를 바특하게 끓이면 성찬이 된다.
며느리에게 전화를 낸다. 손자가 보고 싶어서다.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살아가는 홀시아버지가 고마운지 며느리의 목소리가 밝다. 아들은 퇴근 전이고 손자는 학원 갔단다. 별고 없으시냐고 걱정한다기보다 별고 없으셔야 한다는 다짐 같은 인사다. 건강하셔야 한다는 며늘아기의 당부가 메아리로 허허롭다.
옛날에는 전원일기도 재미있었고, 전설의 고향도 볼만했는데 요즘 연속극은 통 재미가 없다. 고함지르고 다툰다. 젊은 의사들 건강이야기 들으나 마나다. 다큐멘터리가 볼만 하나 늦은 시간대에나 방영한다. 시간을 쪼갤 요량으로 인터넷 안테나를 설치했건만 볼 것이 시원찮다. 살 것은 없는데 파는 물건은 무에 그리 많은지.
내일은 병원 예약일이다. 똑같은 약을 매월 처방하는 의사는 믿음직하지 않지만 처방전이 없으면 약을 구입할 수 없다. 아플 때는 자식보다 의사요 이웃이다. 마지막 잎새를 실오라기로 동여맨 듯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는 육신이다.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약물. 낯선 이와 정 나눔에 익숙해진 독거노인. 지하철이 공짜라서 마음 놓고 나다니는 지공선사. 고독을 무간섭이라는 자유로 치장하며 홀로 사는 독재자. 체념한 삶을 달관으로 자위하며 오늘을 산다. 내일도 지하철에 몸을 싣고 고독이라는 무료함과 한 판 붙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몸에 밴 관습 같은 경로석 제도가 외국인 유튜버 들에겐 기사꺼리가 되곤한다. 아무리 비좁아도 빈 경로석과 임신부석엔 젊은이들이 앉지 않는 모습을 어떤이는 기괴하게 어필하기도 한다. 문화란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라서 한편으로 국위선양이 되고 있다. 젊은이들의 양해로 빛나는 경노사상의 발로인지라 은근히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