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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웅 고태문 육군대위
□ 육군예비역 소위로 임관
고태문 호국영웅은 1929년 1월 3일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에서 고상봉의 3남으로 태어나 자랐고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 소재 제총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당시 제주는 1948년 4.3사건으로 많은 도민의 희생을 불러왔고 청년들은 자위수단으로 향토방위의 일선에 서게 되었다.
그 사건이 어느 정도 소강국면으로 접어들던 1950년 초에는 향토방위의 주축이 될 방위훈련학교(교장 대령 박승훈) 제 4기 간부후보생 모집이 있었다. 이에 고태문 비롯한 도내청년들 207명이 지원하였다.
이들은 3월1일 충남 온양소재 육군 방위훈련학교 제 4기 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하여 1개월간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3월 31일 졸업하고 당 일자 신성모 국방부장관 명의로 된 예비역 육군소위 임관장을 받았다.
그 즉시 귀향한 고태문 소위는 4월에 발족한 청년방위대 제주도단 제 1지대 제3편대의 간부로서 청년방위대 조직. 훈련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에는 7월 16일 육군 제5훈련소가 설치되었다.
이 때 고태문 소위는 전선에 나가기를 희망하여 제 5훈련소 산하 소대장이 되었다.
시시각각 조여 드는 전황이라 고 소위는 자기가 맡은 소대의 편성을 시급히 완료하고 전투력을 갖춘 병사로 만들어 나갔다.
□ 포탄이 터지는 전선으로
9월 21일 고소위는 030군번을 받은 제주건아들을 인솔하여 제주항을 떠나 장도에 올랐다.
그 익 일 수송선은 부산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7일정도 대기하며 부대 편성이 있었다.
고 소위는 신편보병 제11사단(사단장 준장 최덕신) 제9연대(연대장 대령 김희준) 제7중대의 제1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보병 제 11사단은 그해 8월 27일 낙동강 교두보에서 대량소모전을 전개할 때 시급히 경북 영천에서 창설하였다
제 9연대는 원래가 1946년 11월 5일 조선경비대로 제주도 모슬포에서 창설하였지만 6.25때 포천에서 적과 교전하다 병력이 거의 소진되어버려 7월에 충주에서 제1연대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다 제주도와 거제도에서 새로운 병력자원이 확보되자 9월 25일 대구 방직공장에서 재 창설하였다.
이러한 제 9연대에 고 소위는 배속되었고 그는 제 22대대 제 7중대 제 1소대를 이끌고 연대 지휘소가 있는 경북 상주로 올라갔다.
마침 그해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적군은 서남부지역에 있는 소백산맥으로 숨어들어 산간 지역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제 11사단에는 이러한 적 패잔병과 토착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급거 서남부지역으로 이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따라 제 11사단 사령부는 전북 남원에 설치하였고 제 9연대는 경남 진중에 본부를 두었다.
그 즉시 제 9연대는 행동을 개시하여 산청, 함양, 거창방면의 적 패잔병 토벌에 임하게 되었다.
그런 10월 22일에 고 소위는 예비역소위에서 현역소위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신분이 현역장교가 되면서부터 힘을 더욱 실려 주게 되었다.
연말이 되니 지리산(△1916)을 비롯한, 덕유산(△1,614), 괘관산(△1,251), 월봉산(△1,272), 기백산(△1,331), 황석산(△1,190)을 비롯한 소백산맥 일대에 눈이 덮여왔다. 적 패잔병은 식량이 떨어져 자주 산간마을에 출현하게 되자 제 9연대는 이들을 쫓아 설산을 누비었고 고 소위는 늘 선두에서 적병을 공격하여 그때부터 담력이 크고 용감한 소대장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 최전방인 동부전선으로
1951년 4월 6일 서남부지방의 패잔병 소탕작전을 성롱 리에 마무리 짓자 보병 제11사단은 새로운 피복과 장비 등 군장을 갖추고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군 수송선을 타고 4월 15일 주문진항에 상륙하고 행군하여 낙산사에 당도하면서 제 11사단은 한국군 제 1군단(군 단당 소장 백선엽)에 예속되어 강원도 동부지방에서 치열한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다.
고 소위가 속한 부대는 설악산 전투와 건봉령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따라 동해안의 거진에서 건봉령에 이르는 주저항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거쳤던 전투에서 고 소위는 소대원을 이끌고 용감히 전진하였으니 항상 앞에서는 선봉소대장이었다
그때부터 건봉령에서 진지보강과 수색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보병 제 11사단(사단장 준장 오덕준)에서는 제 9연대(연대장 대령 김안일)에게 884고지를 점령토록 하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884고지는 고성군 수동면 남강 북쪽에 접해있다. 이 고지 서쪽으로는 펀치볼(만대리분지)과 이어져 있고 아군 방어선인 캔사스선이 전개되는데 바로 884고지에서 이를 감제할 수가 있어 아군은 매우 불리하였다.
그리고 북한군 보급로가 고성에서 이 고지 북부를 통하여 인제군 북면 원통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적은 이 고지를 잃는다면 보급로가 차단되어 버리므로 한사코 사수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북한군 제 45사단 6,500여명명의 정예 병력은 884고지로부터 591고지, 602고지, 751고지를 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아군이 탈환을 못 하도록 요새화하여 놓았다.
그러나 아군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이 고지를 탈취하여 적의 심장부를 눌러야 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제 9연대에서는 제 2대대 제 7중대에 이 고지 탈환임무를 부여했고 그 첨병소대장으로는 전부터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제 1소대 고 소위가 선정되었다.
고 소위는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이막중한 임무를 대한민국 장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이래서 8월 24일 새벽4시에 고 소위는 제 1소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나아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남강을 넘고 884고지 능선에 가까이 접근하여 공격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동해에 정박했던 미전 함 미주리호에서 40센티 함포가 10여 분간 계속되다가 이번에는 사천 리 방향에서 아군이 105밀리 야포가 날아와 적진에 작렬하였다. 1
10분후 포격이 그치니 드디어 공격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자 고 소위는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쑥대밭이 된 줄 알았던 적 진에서 는 아직도 중화기가 남아있어 기관총탄이 아군에게 날아왔다.
아군은 적탄에 하나둘 쓰러졌고 살아있는 병사는 전진을 망설였다.
고 소위의 “돌격 앞으로” 라는 명령과 함께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제 7중대 전 병력이 공격을 감행하였고 고 소위가 이끄는 제 1소대의 뒤를 따라 올라왔다.
고 소위는 884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의 성공으로 적의 주보급로인 강원도 고성~사천리~원통에 이르는 453번 도로를 아군이 통제하게 됨으로 전선을 보다 북쪽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것은 양구 북방의 해안분지인 펀치볼 확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 호국의 별 351고지에서 지다
이 884고지 전투가 끝나자 9월 1일 고 소위는 육군중위로 승진하였다.
동시에 보병 제 5사단(사단장 준장 김종갑)으로 전출하였다.
고 중위가 고성지구를 방어하는 제 5사단에 부임하였더니 제 27연대 제 9중대장으로 보직이 내려졌다.
이래서 고 중위는 보병 3개 소대와 화기소대를 이끌고 전투에 임하는 지휘관이 되었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고성군 현내면에 있는 351고지 방어였다. 고성지구에 있는 아군의 최전방 전초인 351고지는 표고가 낮은 야산에 불과하지만 감제고지로 전략적가치가 매우 높았다.
그래서 이 고지는 아군이나 적군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다.
한편 고 중위는 지금까지 2년여 동안 전선에서 앞장서는 첨병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이력이 붙었고 부하를 이끌고 전투 지휘에 자신도 있었다.
이런 고 중위가 최전방에 놓인 351고지 방어하던 1952년 11월 10일에 적 2개 중대가 공격해오자 중위는 선두에 서서 격퇴하였다. 그 다음에도 강력한 적이 다시 몰려오자 백병전이 벌어졌고 진지일부를 돌파 당하였다.
이에 전중대원이 필사적으로 돌파구를 봉쇄하기 위해 악전고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진지사수가 어려워졌다.
이 때 고 중위는 먼저 중대원들을 철수시킨 후 마지막으로 철수하다 아깝게도 적탄에 맞았다.
그는 대원들에게 반드시 고지를 탈환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믈 셋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적개심에 불타오르는 장병들은 전사한 고태문 중대장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그 다음날 불굴의 투혼으로 반격작전을 전개 351고지를 공격하여 351고지를 탈환하였다.
이 351고지는 그 후에도 뺏고 빼앗기는 승패 작전이 계속되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던 적 사살은 1,962명, 아군 1,635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1953년 6월 2일 부터 7월 18일까지 3차례 격전이 벌어졌고 아군은 이 고지를 끝내 탈환하지 못하고 휴전이 되었다.
정부는 고태문 중위에게 884고지전투에서 세운공로를 기려 1952년 1월25일 화랑무공훈장과 1952년 10월 21일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더불어 351고지전투에서 그의 희생정신과위훈을 추모하기 위해 1952년 1120일 대위로 추서하였고 동년 12월 31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전쟁기념사업회에서는 1995년 4월 100인의 호국 인물 중 한분으로 고태문을 선정하였고 전쟁기념관은 1999년 11월과 2002년 11월에 이 달의 호국인물로 발표하고 현양행사를 거행하였다.
고태문 대위의 유해는 현제 제주시 충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 후 2001년 6월 2일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에서는 한동리 1168번지 한동초등학교 교정에 용사의 흉상을 건립하였다.
고태문 영웅의 가족으로는 외동딸 고옥희여사와 부군인 윤두호 선생님이 계시다.
<발췌> 정수현,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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