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견과 행실이 같았던 큰 봉우리
문경공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또 다른 여러 역사 기록에 등재된 기사 중에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노라면 대개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첫째는 양식이 행동으로 옮겨지면서 자신에게는 불운이 된다는 사실을 감내하면서라도 국가나 사회에 공헌한 사람들이다. 따지고 보면 이들의 올곧고 아름다운 행동에 의해 역사가 발전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후대의 자손들은 선대의 빛나는 명예를 긍지와 보람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었다.
둘째는 자신의 실익만을 챙기다가 공익을 해친 부류들의 참담한 결과를 들 수가 있겠다. 이들로 인해 옳고 그름이 뒤바뀌면서 사회정의가 혼란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해 공적으로는 역사가 침체되고, 사적으로는 후대 자손들이 얼굴을 들 수 없는 불행의 굴레를 쓰게 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후대의 사람들은 첫 번째 경우의 선인(先人)들의 행적을 살펴서 귀감으로 삼고 아름다운 시대를 만들어 보겠다는 결기를 다짐하게 되지만, 자신은 물론 가솔들이 맞이하게 될 일시적인 불운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로 밀려오는 온갖 재앙과 불이익을 감내하면서까지 후대의 귀감이 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학문으로 익힌 도리를 실천궁행(實踐躬行)함으로써 자신의 불운과 후대의 행운을 바꾸는 용단을 보였다는 점이다.
후세까지 아름다운 이름과 두터운 신망을 남긴 고매한 선비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책 속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 염원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임금의 명을 거역하면서 정의의 편에 서야할 때도 있다. 살아있는 권력인 임금의 명을 거역하면 엄중한 문책을 받게 된다. 그 문책은 임금이 내리는 독약 사발(賜藥)을 비우고 목숨을 버리는 것이 될 때도 있다.
성종 조의 명신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은 하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배우고 익힌 바를 몸소 실천에 옮기면서 자신에게 밀려오는 모든 불이익을 기꺼이 받아 들였고, 따르는 문도들에게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지식인의 소임을 실행으로 보여 주면서 사약을 받고 생애를 마감한다. 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방도를 한훤당 김굉필이 모른대서야 말이 되는가. 알면서 그 길을 택하는 지식인의 실천의지에 후학들은 머리를 숙이게 된다.
김굉필의 죽음은 얼핏 불행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죽음이 정의로웠기에, 또 한없이 아름다웠기에 문묘에 배향되어 5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명현(名賢)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
김굉필은 본관이 서흥(瑞興)이고, 자는 대유(大猶)이다. 아버지 유(紐)는 무과에 급제하여 사용(司勇)에 올랐다. 어머니 한씨(韓氏)는 성품이 엄하고 예법(禮法)을 소중이 여겨서 어린 자제들에 대한 훈도도 철저하였다.
“너희들은 항상 마음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게을리 하지 말 것이며,
남이 혹시 너희를 비평하더라도 절대로 서로 맞서서 말하지 말아라.
남의 나쁜 점을 말하는 것은 피를 머금었다가 남에게 뿜으려면
자기 입이 먼저 더러워지는 것과 같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이것으로써 경계를 삼을 것이라.”
어린 아이들에게 먼저 예[人性]를 익히게 하면 나라가 반드시 편안해질 것이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편중하게 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후세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명현들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어머니의 자애로우면서도 엄중한 인성교육이 있었고, 그 어머니를 섬기는 자제들의 효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공통된다.
어린 김굉필은 아침마다 어머니의 안부를 살펴 대청 아래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거르지 아니하였고, 혹시라도 어머니에게 불쾌한 기색이라도 있으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서 감히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어린 김굉필이 공경과 효도를 다하여 어머니의 기뻐하심을 보고서야 물러났던 것은 그의 온몸에 인성의 아름다움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 또한 어머님의 깨우침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굉 필은 젊어서 현풍(玄風)에서 살았다. 성품이 호탕하고 뛰어나 구속을 받기를 싫어하였으며, 어머님의 가르침을 뇌리에 새기고 있었기에 거리에 놀고 다니면서도 행실이 여의치 않은 사람을 만나면 그 잘못을 꾸짖고 회초리로 때릴 정도였음으로 사람들은 그를 보면 곧 피하여 숨기까지 하였다.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기를 청하면서 비로소 학문에 힘을 쏟게 된다. 처음에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청하였을 때 김종직은 바로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사람의 도리부터 일깨운다.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이 책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주렴계(周濂溪)의 광풍제월(光風霽月)같은 쇄락(灑落)한 인품도
역시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김굉필은 스승의 가르침에 일념한다. 그는 항상 명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고, 배운 바를 실행하기가 특출하여 아름다운 행실이 누구에게도 비할 데가 없었다.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밤이 깊어서야 잠을 잤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본부인 외에는 여색(女色)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고, "사람들이 혹시 나라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소학을 읽는 동자가 어찌 알리요.(人問國家事 必曰 小學童子何知大義)” 하면서 겸손해 하였다. 이와 같은 겸손은 그가 남긴 시의 구절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글을 업으로 삼아도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業文猶未諳天機
오히려 소학 책 속에서 그 전의 잘못을 깨달았네. 小學書中悟昨非
스승 김종직이 이를 평하기를 “이 말은 성인이 되는 기초이니 허노재(許魯齊) 이후에 어찌 그런 사람이 없으리요.”라 하였다.
김굉필은 나이 많고 덕이 높으매 세상을 돌이킬 수 없음과 도(道)를 행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기의 명성을 숨기려 애썼으나, 사람들은 그의 실청궁행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한훤당 김굉필은 25세가 되던 해인 성종 11년(1480)에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해 6월 종로에 있는 원각사(圓覺寺, 지금의 탑골공원)의 부처가 돌아앉았다 하여 도성의 민심이 흉흉해지고, 인수대비(仁粹大妃)까지 나서서 소문의 진화를 위해 불공을 드리는 등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에서 불사에 기대는 듯한 기미가 보이는 데도 조정의 대신들이 우왕좌왕할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에 한훤당 김굉필은 생원의 처지로 분연히 일어나 군왕과 조정의 처사를 일갈하는 장강(長江)과도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출처 : ‘조선선비의 거울, 문묘18현, 사약으로 죽어 천년을 산다’(13-18쪽)
신봉승 지음, 청아출판사刊
첫댓글 경현록의 기록에
김굉필의 생원시에 합격년도는
성종11년(1480)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