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의 음악인생을 거론하면서 그의 친구들에 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슈베르트를 통해서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되었다”고 슈파운이 회고했듯이, 그의 주변에는 많은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그들 중에는 시인과 극작가, 화가, 철학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보헤미안의 삶을 즐기는 유쾌한 젊은이들이었다.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연극 리허설을 하는 친구들과 슈베르트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기에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친구들은 그가 음악가로서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정해진 거처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집에서 살며, 여유가 있을 때는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친구들에게 얻어먹으며 방랑자처럼 살았다. 슈베르티아데는 그의 집이었고, 가족이었다.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슈베르트
이 모임은 술집이나 친구들의 집에서 열리곤 했다. 그 모임에서 슈베르트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친구들은 부인이나 연인들과 춤을 추었다. 또 독서토론회를 열어서 괴테, 하이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낭송했고, 새로 나온 예술작품이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덕분에 슈베르트는 낭만주의 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었고, 자신의 음악이 지향할 바를 발견하고 개척할 수 있었다.
행복(Seligkeit) / Elisabeth Schwarzkopf
1813년 슈베르트는 슈타트콘빅트를 중도에 그만두었다. 아버지의 요청도 있고 해서 사범학교 연수교육을 받기로 했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사범학교 연수를 받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입대하기에는 신체조건이 맞지 않았다. 키는 너무 작았고, 시력 또한 매우 나빴다. 아무튼 사범학교 연수를 10개월 정도 받는 동안도 그는 계속해서 작품을 써서 교향곡 1번과 현악사중주곡, 미뉴에트, 독일춤곡 등을 작곡했다. 연수를 마친 1814년 가을부터는 아버지가 세운 초등학교의 보조 교사로 일하면서 한편으론 살리에리에게 작곡 지도를 받았다.
독일 무곡 1번
베네치아 출신의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는 고전주의와 초기 낭만주의 시대에 걸쳐 오랜 기간 활동한 음악가로 일찍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진출해 궁정 오페라 감독을 거쳐 황실의 교회음악을 담당하는 카펠마이스터 자리까지 올랐던 유명한 인물이다. 어린 슈베르트가 슈타트콘빅트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고, 콘빅트를 떠난 뒤에도 3년 동안이나 그가 쓴 작품들에 대해 자세한 조언을 해주는 등 슈베르트가 음악가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슈베르트는 1814년에 고향인 리히텐탈의 교회 100주년 행사를 위해 <미사 F장조>를 작곡했다. 미사 초연 때 소프라노를 맡은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는 그 후에도 자주 슈베르트의 작품을 불렀는데, 그는 어느 사이엔가 이 아름다운 소프라노 가수를 연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보조교사로 받는 형편없는 연봉 때문에 이 사랑은 고백 한번 해보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슈베르트와 테레제 그로브
이 미사곡은 재공연까지 하게 되면서 출판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얻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작품이 이즈음 탄생했다. 당시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은 슈베르트는 ‘물레를 돌리는 그레첸’ 부분을 가사로 해서 노래를 작곡한다. 피아노 반주에서 물레가 계속 돌아가는 것을 표현하고, 성악파트는 사랑에 빠진 순진한 처녀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따라간다. 이 곡은 그가 이후 수없이 많이 작곡하게 될 ‘시와 음악의 완벽한 결합’인 ‘리트’의 전형이 된 첫 작품이었다.
물레를 돌리는 그레첸(Gretchen am Spinnrade) D.118/ Jessye Norman
이 곡을 필두로 해서 1815년까지 슈베르트는 네 개의 오페라와 교향곡 2번과 3번, 현악사중주곡, 2곡의 미사곡, 10여 편의 피아노곡, 그리고 140여곡의 리트를 작곡한다. 이 중에는 <마왕>도 들어있다. 이 곡이 탄생하던 날의 얘기를 슈파운은 이렇게 적었다.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의 ‘마왕’
“어느날 오후 나와 마이어호퍼는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는 슈베르트를 방문했다. 우리는 괴테의 <마왕>을 손에 들고 흥분하여 큰 소리로 읽고 있는 슈베르트를 발견했다. 그는 책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더니 갑자기 자리에 앉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 위에는 멋진 발라드가 씌어져 있었다. 피아노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콘빅트로 달려갔다. 바로 그날 밤 마왕은 불려졌고, 그리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마왕 / Thomas Quasthoff
< 마왕>의 가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체로 되어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아버지는 몸이 아픈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숲 속에서 말을 달리는데 아들은 잔뜩 겁에 질려 자꾸 마왕이 자기를 쫓아온다, 죽이려 한다며 무서워한다. 아버지는 아이를 진정시키며 달려가지만 결국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죽어있었다.” 슈베르트는 이 내용을 가사로 매우 드라마틱한 음악을 작곡한 것이다.
괴테
슈베르트는 이 곡을 당시 바이마르 극장의 감독으로 있는 괴테에게 헌정하고 싶었다. 친구 슈파운이 괴테에게 마왕의 헌정을 허락해달라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으나, 괴테는 이름도 잘 모르는 젊은이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괴테는 음악적인 식견도 꽤 있는 편이어서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의 음악취향은 18세기 중반의 고전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시는 베토벤과 베버, 슈베르트 같은 작곡가들을 자극해 낭만주의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작품이 불러일으킨 낭만주의적 환상으로 무질서해 보이는 세계를 기피했던 것이다.
빌헬미네 슈뢰더
세월이 한참 지난 1830년에 괴테는 자신의 집에서 유명한 여성 성악가 빌헬미네 슈뢰더의 연주로 마왕을 듣게 되었다. 괴테는 크게 감탄했고, 오래전 슈베르트의 헌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실수를 인정했다. 자신의 소박한 작품을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낭만적 환상의 세계로 변형시킨 것을 뒤늦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슈베르트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 곡을 잘 불러준 가수에게 경의를 표했다.
슈베르트
1817년, 슈베르트는 쇼버의 주선으로 절정기를 누리고 있던 바리톤 가수 요한 미하엘 포글을 소개받았다. 포글은 슈베르트의 노래 몇 곡을 불러보고는 그의 천재성에 감탄해 그을 빈에 널리 알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기꺼이 이 젊은이의 친구, 나아가 매니저가 되기로 작정한다. 29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머지않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사이가 되었다.
요한 미하엘 포글
무대경력이 많은 포글은 슈베르트 가곡의 멜로디를 보다 성악적인 느낌으로 다듬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노련한 작품해석으로 슈베르트의 노래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포글은 슈베르트의 가곡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가곡이라고 여겼다. 음악으로 옮겨진 말과 시, 화음으로 표현된 말, 음악의 옷을 입은 사상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요한 크리스토프 에르할트 '산속에서 쉬는 예술가들'
1819년 두 사람은 함께 북 오스트리아 지역를 여행했는데 이 동안에 피아노 5중주곡 <송어>가 완성되었고, 리트로는 <송어>, <음악에 부쳐>, <죽음과 소녀> 같은 명곡들이 탄생되었다. 이 곡들은 포글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어 호평 받았다. 그리고 이 무렵 슈베르트는 피아노 소나타 작곡에도 전념해 5곡의 풍요롭고 매력으로 가득 찬 소나타를 만들어냈다.
Piano Quintet D.667 송어(The Trout) 중 4악장
출처:스토리텔러 장옥님 : 오랫동안 1FM과 2FM에서 음악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노래의 날개위에》, 《장일범의 가정음악》 (1FM), 《유열의 음악앨범》, 《이금희의 가요산책》 (2FM)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했으며, 2006년에는 라디오의 동료 피디들과 함께 《KBS FM 월드뮤직》 책을 발간하기도 했음